평양에 차린 자신의 일식당 ‘다카하시’에서 초밥을 만들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 지난 11월에 촬영해 주간조선이 입수한 동영상에서 캡처했다.
평양에 차린 자신의 일식당 ‘다카하시’에서 초밥을 만들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 지난 11월에 촬영해 주간조선이 입수한 동영상에서 캡처했다.

묵묵히 초밥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가명). 그의 근황이 담긴 동영상을 주간조선이 단독입수했다. 지난 11월 촬영한 영상이다. 그가 평양에 차린 일식당 ‘다카하시’에서 촬영했다. 다카하시는 낙원백화점에서 운영하는 ‘평양라면집’ 내부에 위치해 있다. 평양라면집이 일종의 푸드코트라면, 다카하시는 그 안에서 따로 영업하는 일본요리집이다. 평양라면집 내부 영상도 입수했다. 평양라면집 영상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게 입구 사진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사진도 입수했다.

후지모토 겐지가 누구인가. 1947년생, 일본 아키타현 출신이다. 서른다섯이던 1982년, 북한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1983년 5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1987년 다시 북한에 갔다. 고려호텔 지하 일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1989년부터는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다. 김정일을 비롯한 ‘로열 패밀리’의 총애를 받았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그해 북한의 국민가수 엄정녀와 결혼했다. 1남1녀를 뒀다. 그렇게 총 13년을 평양에서 보냈다. 2001년 4월 느닷없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실질적으론 탈출이었다. ‘초밥 재료를 사러 가겠다’며 평양을 떠났다. 부인과 아이들은 평양에 둔 채였다. 훗날 그는 귀국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로열 패밀리와 가까웠기 때문에 나도 어느 날 숙청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탈출 직후 두 권의 책을 냈다. ‘김정일의 요리사’ ‘김정일의 사생활’. 이후에도 3권의 책을 더 냈다.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결정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김정은 때문이다. 후지모토는 2003년 낸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후계자는 김정은뿐’이라고 예언했다. 김정은의 진짜 생일(1983년 1월 8일)과 어릴 때 일화, 성격 등이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큰 선글라스와 두건을 쓰고 인터뷰에 응했다. 암살 우려 때문이었다.

그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건 1990년 1월 8일, 김정은의 생일파티에서였다. 김정일이 후지모토를 소개하자 김정은은 인상을 썼다고 한다.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김정은은 나를 노려보며 ‘이 친구가 바로 제국주의 쓰레기군’이라고 했다. 김정일이 ‘악수하라’고 꾸중하자 비로소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정은 왕자’와 친해진 건 연날리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로열 패밀리의 전용 별장인 ‘신천초대소’에 갔다. 김정은이 연을 날리려 했는데 잘 날리지 못했다. 연을 건네받아 꼬리를 붙여줬다. 그제야 잘 날아올랐다. 김정은은 무척 좋아했다. 어머니 고영희가 옆에서 ‘봐라, 정은아. 후지모토씨가 아니었더라면 연을 못 날렸다’고 말해줬다. 그때부터 김정은과 친해졌다. 며칠 지나 정철·정은 형제의 ‘놀이상대’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평양라면집 내에 위치한 ‘다카하시’. 입구에 서 있는 입간판 사진이다.
평양라면집 내에 위치한 ‘다카하시’. 입구에 서 있는 입간판 사진이다.

“후계자는 김정은뿐” 후지모토 예언

그는 김정일의 후계자가 결정된 일화도 공개했다. 2000년 8월의 일이었다. “김정일은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못 하게 하려고 결심했다. 김정일 패밀리가 ‘원산초대소’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김정일 부부는 정철·정은 두 아들을 앉혀놓고 ‘후계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정철은 싫다고 했다. ‘그러면 정은이를 후계자로 앉혀도 되겠는가.’ 정철은 좋다고 했다. 이렇게 후계자가 정해졌다.”

후계자로 내정된 후 불안해하던 17세 소년에게 후지모토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들려줬다. “개미는 여름 내내 열심히 일했지만, 베짱이는 노래만 부르고 게으름을 피웠다. 겨울이 되자 개미는 무사했지만 베짱이는 굶어죽었다. 조선도 열심히 일하면 굶주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거다. 이 얘기를 들려주자 김정은은 대단히 기뻐했다.”

NBA 스타 ‘로드먼 미스터리’를 일정 부분 해소해준 것도 그다. “북한에서 농구는 정말 인기 있는 스포츠다. 김정은은 항상 로드먼의 선수시절 등번호 10번이 새겨진 셔츠를 입곤 했다.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 26번이 적힌 셔츠를 입을 때도 있었다.”

2012년 7월, 전격적으로 북한에 다시 들어갔다. 그해 권력을 손에 쥔 김정은이 그를 초대했다. 세상은 놀랐다. 사실 그는 북한을 나온 후에도 로열 패밀리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연평도 포격 때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 김정일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장군님, 조지워싱턴함이 연평해역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미국 항모에 한 발이라도 사격을 해선 안 됩니다. 미국은 그걸 기다리는 겁니다. 북한이 공격하는 동시에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십시오.’”

북한을 나온 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고 훗날 그는 말했다. 2012년 방북 당시 후지모토는 리설주에게 디올 핸드백을 선물했다. 2012년 8월 리설주가 들고 다니는 게 공개돼 화제가 된 그 가방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국 내 판매가격은 약 180만원.

2016년 4월 1일, 그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태양절을 맞아 평양에 초대하고 싶다.’ 4월 12일 평양에 들어가 12일 동안 체류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정은과의 재회는 극적이었다. “평양공항에서 직접 고려호텔로 갔다. 정문에 있으니 대형 벤츠가 다가왔다. 조수석에 김창선 부부장이 앉아 있었다. 운전석엔 바로 김정은이 있었다. 직접 운전해서 보러 와준 거다.”

그리고 지난해 8월, 후지모토는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대략적인 근황이 알려진 건 지난 2월. ‘조선신보’에 평양발 기사 형태로 공개됐다. ‘조선신보(朝鮮新報)’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다. 평양에 지국을 갖고 있다. 일본 내에선 후지모토의 안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북한 측이 이를 의식해 일부러 조선신보에 공개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다음은 기사 일부다.

‘평양시 중구역에 일본 료리사가 솜씨를 발휘하는 개성적인 식당이 개업하였다. 락원백화점의 별관 4층에 있는 평양라면집이다. 이 식당에서는 카운터석에 앉아 본격적인 초밥도 맛볼 수 있다. 초밥을 짓는 것은 후지모또 겐지씨. 평양에 일본 료리점을 꾸린 동기에 대해 후지모또씨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개선과 국교정상화에 기여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이 식당에는 50딸라부터 150딸라까지의 4가지 코스 메뉴도 있다. 후지모또씨가 카운터에서 초밥을 짓는다. 초밥의 재료는 그날의 매입에 따라 변하지만 150딸라의 코스는 초밥 이외에 다른 고급 료리도 제공된다. 후지모또씨는 식당의 개업에 앞서 재료와 조미료 등의 조달을 위해 중국을 방문하였다. 평양라면집은 개업 이래 평양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련일 흥성이고 있다.’

낙원백화점은 창광거리에 있다. 당간부 등 특수계층만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이용 가능하다. 조선신보 기사엔 잘못된 기술이 있다. 평양라면집은 낙원백화점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식당이다. 후지모토는 이 안의 초밥 식당 ‘다카하시’를 운영한다. 기사에 쓰인 대로 ‘평양라면집’은 초기엔 꽤 인기를 끌었으나 요즘엔 텅텅 비어 있다고 한다. 입수한 동영상 속에서도 손님이 한 명도 없다. 후지모토의 식당은 요즘도 꽤 인기 있다.

평양라면집 내부 모습. 텅텅 비어 있다.
평양라면집 내부 모습. 텅텅 비어 있다.

보조요리사 2명 고용해 영업

주간조선이 입수한 동영상은 4개, 총 1분2초 길이다. 창광거리로 가는 풍경을 찍은 동영상이 10초, 평양라면집 내부 촬영분 20초, 나머지는 다카하시 안에서 후지모토를 촬영한 영상이다. 그는 일식 요리사가 보통 입는 조리복을 입고 있다. 머리엔 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두건, 보라색이다. 지어놓은 밥이 들어 있는 나무통에서 밥을 푸고 있다. 나무통 옆으로 참치보관용 냉동고가 보인다. 그 위쪽엔 칼 소독기가 달려 있다.

후지모토가 뭘 하는지는 자세히 보인다. 주방과 붙어 있는 자리, 흔히 ‘다치’라고 부르는 카운터석에서 촬영한 덕분이다. 후지모토 옆쪽엔 보조요리사가 서 있다. 북한 남성 한 명이다. 20대로 보인다. 조금 있다 주방보조 한 명이 더 등장한다. 이번엔 여성이다. 역시 20대로 보인다.

식당 내경(內景)도 비교적 잘 보인다. 인테리어에 나름대로 꽤 신경을 쓴 눈치다. 수사(壽司)라고 쓰여 있는 붉은색 등이 곳곳에 놓여 있다. 수사는 스시의 일본어 표기다. 주방을 정면으로 봤을 때 왼쪽엔 작은 쇼케이스가 놓여 있다. ‘네타’를 넣어놓는 일종의 일식용 냉장고다. 네타는 스시의 생선 부분을 뜻한다. 원래는 종류(種類)의 일본어 단어인 다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앞뒤 음절이 바뀐 네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밥 부분은 ‘샤리’라고 한다. 샤리를 오른손에 쥐고 와사비를 찍어 네타를 얹는 게 스시의 정석이다. 화면 속 후지모토도 정확히 같은 동작으로 초밥을 만들고 있다. 쇼케이스는 그리 크지 않다. 1단짜리다. 일식집 분위기를 내는 데는 일조한다.

후지모토의 뒤쪽 벽엔 천장 가까이 찬장이 부착되어 있다. 찬장 안엔 일본 술이 진열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술은 ‘기쿠마사무네(菊正宗)’. 이건 좀 흥미롭다. 다카하시를 드나드는 북한 사람들이 기쿠마사무네의 유래를 알까. 조선시대 말기까지 집에서 제조하는 ‘가양주’가 보편적인 조선의 술이었다. 일제강점기 ‘주세법’을 시행한다. 양조장 중심으로 술 제조 문화가 재편됐다. 제사 때도 술을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기를 끈 술이 바로 기쿠마사무네였다. 일본식 청주다. 한자를 음독하면 ‘정종’이다. 청주를 정종이라 부르게 된 계기다. 일본 청주의 기원 자체는 한반도라는 주장이 있다. ‘사케’도 ‘삭히다’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다. 기쿠마사무네는 한국에선 일식당 기준으로 약 4만5000원에 팔린다.

찬장 아래엔 조리대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나무도마가 쌓여 있다. 소나무 도마다. 완성된 초밥을 손님에게 내어놓을 때 쓰는 용도다. 나무도마가 놓여 있는 조리대 옆으론 토치가 있다. 부탄가스로 작동되는 토치다. 그 옆엔 버너가 보인다. LPG로 작동되는 한 구짜리다. 레인지 위쪽으론 후드가 달려 있다. 다른 쪽엔 식기건조기가 있다. 한마디로 갖춰야 할 건 다 갖췄다. 꽃무늬 벽지만 빼면 서울이나 도쿄의 그저그런 일식집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일본에서 요리를 배운 일식 전문 요리사에게 보여줬다. 그의 평이다. “주방용품이나 인테리어가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 후지모토가 입은 요리복도 중국산으로 보인다. 참치 전용 냉동고를 보니 참치는 일본에서 공수한 지중해산 참치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카하시를 직접 방문한 이의 평가는 이렇다. “맛은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비싸다.” 25유로짜리 모둠초밥을 살펴보자. 생선을 얹은 초밥이 10점, 여기에 호소마키(김말이초밥) 6점, 계란말이 하나가 곁들여 있다. 초밥에 쓰인 생선은 총 일곱 가지. 날치알, 연어알, 자연산 전복, 학꽁치, 전어, 오징어, 참치오도로(참치 뱃살)다. 차는 기본 제공이다. 흥미로운 건, 다카하시를 이용하는 평양 시민들이 후지모토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저 다카하시라는 일식 요리집 주인으로 알려져 있다. 후지모토는 가게 앞에 ‘다카하시’라고 쓰인 입간판을 세워뒀다. 초밥 메뉴의 계란말이 위에도 ‘다카하시’라고 적어놨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밥 요리사일 후지모토의 정체를, 어떻게 평양 시민들만 모를 수 있을까. 평양 출신 고위 탈북자 A씨의 설명이다. “북한 정권이 그의 정체를 공개할 턱이 있겠나. 최고지도자와 관련된 건 대체로 다 비밀이다. 게다가 생각해 봐라. 고난의 행군 때 수십만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최고지도자는 일본 놈이 만들어주는 스시를 먹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겠나. 최고지도자도 강냉이죽을 먹으며 현지시찰했다고 선전하는 판인데 말이다.”

또 다른 고위 탈북자 B씨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보가 입소문으로 퍼지는 곳이니, 조금씩 알려지고 있긴 할 거다.”

모둠초밥 1인분. 25유로짜리다.
모둠초밥 1인분. 25유로짜리다.

평양으로 돌아간 이유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 북으로 돌아간 걸까. 기자는 후지모토와 접촉한 적이 있던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렇다. 후지모토는 총 세 가지를 염두에 둔 듯 하다. 첫째, 가족의 안위다. 그의 부인 엄정녀와 딸 엄정미(25)가 평양에 있다. 아들은 2012년 후지모토의 방북 직전에 죽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째, 후지모토를 또 하나의 채널로 두려는 북한 정권의 속내다. 미국에 로드먼이 있다면 일본엔 후지모토라는 식이다. 실제로 후지모토는 북·일 수교에 기여할 뻔했다. 그는 김정은에게서 “북·일 간 가교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 정계와 접촉도 했다. 2012년 방북 직후 얘기다. 일본으로 돌아오자 당시 납치문제담당상이었던 마쓰바라 장관이 그에게 연락을 했다. “노다 총리의 친필 서한을 줄 테니 전해달라.” 문제는 후지모토가 곧 평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국회가 휴회 중이라 노다 총리가 서한을 쓸 수 없다. 1주일만 방북을 늦춰달라.” 후지모토는 1주일을 기다렸지만 끝내 친필 서한을 받진 못했다. ‘외무성의 책임’이라고 훗날 후지모토는 말했다. 초밥 요리사가 북·일 간 가교 역할을 하는 것에 외무성 관료들이 불편해 한다는 얘기다.

셋째, 돈이다. 복수의 정황을 종합해 보면 후지모토는 돈 문제에 민감했다. 언론 인터뷰 사례비는 기본 20만엔에서 50만엔. TV 인터뷰 사례비는 기본 80만엔에서 출발했다. 일본과 북한 양쪽에 가족을 둔 그로서는 당연한 얘길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인 부인과는 이혼했다. 둘 사이엔 자식과 손자가 있다. 북한에선 큰돈 안 들이고 식당을 운영할 수 있다. 현재 가게 운영을 돕는 두 명의 보조요리사도 요리법을 전수해준다는 명목으로 무급으로 고용 중이라고 한다.

가게명 ‘다카하시(高橋)’. 풀이하자면 ‘높은 다리’란 의미다. 후지모토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정했을까. 북한과 일본 정상을 잇는 다리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김정일의 요리사가 만든 초밥을 김정은과 아베가 나눠 먹는 날은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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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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