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4년 차인 2006년 7월 김형오 의원이 야당인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당시 김 의원은 원내대표 자리를 두고 동향이자 친박계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그는 2012년 5선(選)을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10년도 더 지난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한국당 일각에서 그의 원내대표 시절 정치력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한덕수 국무총리는 취임 직후 김형오 원내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비공개 만남을 제안했다. 중요 법안처리를 앞두고 여당이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건 이상할 게 없지만 이날 회동의 참석자와 장소는 특별했다. 한 총리는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서울 시내 P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김 원내대표에게 알렸다. 그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한 총리와 문 실장은 이날 대화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 협상 결과를 토대로 국회 비준동의안을 만들고 있었다. 국민연금법, 사립학교법, 로스쿨법 등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이 많았던 시절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김 원내대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십 분 뒤 다시 한 총리가 전화를 걸어 “교통정리가 끝났다”면서 김 원내대표의 발길을 돌려 세웠다. 두 사람이 있던 장소로 돌아왔을 때 변양균 정책실장도 현장에 와 있었다. 이후 대화는 주로 변 실장이 주도했고 문 실장과 한 총리는 그의 말에 이견(異見)을 보이지 않았다.

김 원내대표는 이날 호텔에서 정부 측 입장을 충분히 듣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협조하기 어렵다. 오늘 대화가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법안 논의는 국회에서 여야 원내지도부가 한다.” 한국당에서 김 원내대표 시절을 함께 보낸 한 인사는 “김 의장은 그해 7월 원내대표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정부 측의 비밀스러운 협조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야당 원내대표는 가난할지언정 선비의 꼿꼿함을 잃지 않아야 여당과 청와대로부터 멸시받지 않는다. ‘야성(野性)’을 말로만 외치는 그런 야당은 설 자리가 없다”고도 했다.

최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만나 5개 사항의 합의안을 발표했다. 야당 원내사령탑이 여당 원내대표가 아닌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나 합의안을 마련했다는 뉴스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핵심 내용을 살펴보니 한국당은 ‘임 실장의 UAE특사 파견 의혹’을 국익 차원에서 더 이상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김 원내대표 본인이 앞장서 제기한 의혹이 국익 차원에서 무슨 문제라도 야기했다는 것인가. 국정운영에 있어 야당과 협조한다는 식의 ‘하나마나한 협의안’도 보였다. 대통령의 비서가 야당 문턱을 넘는데, 제 집 드나들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원내대표는 며칠 뒤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인 양정철씨의 책 일부를 인용하며 “문 대통령 측근 중 괜찮은 분이 있다”는 발언도 했다. 그가 양씨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이런 평가를 하는 건지 의아했다.

임 실장은 UAE 관련 의혹을 무난하게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당 원내대표가 국익을 거론하며 문제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니 문 대통령도 크게 만족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국민은 국정에 협조한 자유한국당에 박수를 보내줄까. ‘강한 야당’을 기대했던 보수층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10여년 전 야당일 때보다 지금의 야당이 유약해 보이는 건 비단 기자만의 시각일까.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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