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1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금식 후 첫 식사인 ‘이프타르’를 준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1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금식 후 첫 식사인 ‘이프타르’를 준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팔레스타인 가자(Gaza)지구(地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불린다. 면적이 서울의 60%인 365㎢에 달하는데 높이 7~9m의 콘크리트 장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가자지구 서쪽의 지중해 바다로 헤엄치거나 보트를 타고 탈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가능에 가깝다. 해안에서 10㎞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감시 군함이 최첨단 레이더를 켜놓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육·해·공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사람과 물품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가자지구 주민 200만명이 10여년째 죄수 아닌 죄수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개방하면 그곳의 강경 무장단체 ‘하마스’ 대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유 등으로 가자 봉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 17일 이례적으로 ‘가자 감옥’의 문 하나가 전면 개방됐다. 가자지구의 출입문은 모두 5개인데 이 중 4개는 이스라엘이, 나머지 1개는 국경을 맞대는 이집트가 관리한다. 그런데 이날 이집트가 관리하는 문이 열린 것이다. 이집트 대통령 압델 파타 엘시시(64)는 이날 성명에서 “가자지구 형제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국경을 개방한다”고 밝혔다. 이집트 언론들은 “엘시시 대통령이 라마단을 맞아 이 기간에 특별히 가자 국경 문을 열어놓기로 했다”면서 “‘라마단 특별사면’으로 수백 명의 죄수도 풀어줄 계획”이라고 했다. 이날 병원 치료가 필요한 사람, 외국의 친인척을 만나보려는 사람 등 수많은 가자지구 주민들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로 넘어갔다.

올해는 5월 17일부터 6월 15일까지

라마단이 무엇이기에 엘시시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라마단은 이슬람의 금식 성월(聖月)이다.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한 달간 해가 떠서 지기 전까지 물을 포함해 어떤 음식도 먹지 않으며 신앙생활에 매진한다.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달로 여겨진다. 올해는 라마단 기간이 5월 17부터 6월 15일까지다. 이슬람력은 음력 체계이기 때문에 라마단 시작일이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에서는 매년 다르다. 설날이 매년 다른 것과 같은 이유다.

엘시시 대통령이 라마단을 맞아 가자 개방·특사 조치를 한 건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권력자로서 이슬람의 성월인 라마단의 가치를 성실히 따른다는 모습을 드러내야 무슬림의 마음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이집트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엘시시 대통령이 종교적 행사인 라마단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레바논, 요르단 등 아랍 전역에 친인척을 두고 있다. 또 팔레스타인은 이슬람권에서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억압을 받는 형제 민족으로 여겨진다. 엘시시 대통령은 이들을 돕는 모습을 전 아랍·이슬람권에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도 만들었던 것이다. 라마단은 이슬람권 권력자가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과시해 주목받을 수 있는 ‘시간적 무대’인 것이다.

작년 라마단 기간 400여건 테러

안타깝게도 라마단은 테러단체의 범행에 악용되기도 한다. ‘이슬람국가(IS)’ 같은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이 “성스러운 달에 순교하면 신으로부터 더 큰 보상을 받는다”고 설파하며 자폭 테러를 부추긴다. 이런 프로파간다로 인해 라마단만 되면 세계적으로 테러 사건이 급증한다. 지난해 프랑스 수도 파리 샹젤리제 테러, 영국 수도 런던 테러 모두 IS 추종자가 라마단 기간에 저질렀다. 과거 라마단 기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외교 단지에서는 대형 폭탄 테러로 한 번에 약 150명이 사망하는 참사도 벌어졌다. 당시 테러범은 자폭 직전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聖戰)의 전사(戰士)라 믿었던 것이다.

국제테러감시단체 ‘시테(SITE)’에 따르면 작년 라마단 기간 10여개 국가에서 총 400여건의 IS 관련 테러가 발생했다. 사망자만 500여명에 달한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라마단이 피로 물들어버리며 ‘비극의 달’이 된 것이다.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이 라마단에 테러를 집중적으로 일으키는 건 선전(宣傳)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테러단체는 테러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며 조직원을 포섭한다. 무슬림 사회에서 라마단은 일 년 열두 달 중 정신적·심정적 민감도가 가장 높은 시기다. 이때 ‘지하드’라는 이름의 테러 사건을 터트리면 극단주의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무늬만 이슬람’인 사회에서 가난하고 억울하게 사는 무슬림들은 세상을 뒤집고 ‘이슬람 파라다이스를 만들자’는 논리에 쉽게 현혹된다. 가난한 자뿐 아니라 영미권에서 명문대를 나온 부유한 무슬림도 테러에 투신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에 환멸감을 느껴 방황하다 신의 질서대로 움직이는 나라를 만들자는 IS 같은 단체에 매료되는 것이다.

라마단 기간 테러 범죄를 꾀하기가 기술적으로 쉽다는 이유도 있다. 이 기간 이슬람권 국가는 경계 태세가 느슨해진다. 운용 가능한 군·경찰 병력이 확 줄어들고 근무 집중도도 크게 떨어진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낮 시간 금식을 하다 보니 벌어지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외국 대사관 차량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나 사람이 붐비는 시장 한쪽에 폭약을 숨겨놓더라도 색출해내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IS는 작년 말 국제연합군의 격퇴전에 밀려 3년간 차지했던 시리아 락까·이라크 모술 등 점령지 대부분을 잃었다. 하지만 중동에서 인도네시아·아프가니스탄 등지로 은신처를 옮겨 여전히 테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월 13일 인도네시아 제2도시 수라바야 교회 3곳을 연쇄 자폭 공격한 이들도 IS 연계 조직원들이었다.

라마단 기간과 일부 겹치는 러시아월드컵(6월 14일~7월 15일) 때 IS의 테러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IS는 작년 말 인터넷 영상을 통해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 맞춰 테러 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이들은 영상에서 “우리는 매 순간 습격할 때를 노리며 숨고 있다”면서 “레반트(시리아 일대)는 러시아인과 미국인 등의 묘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피로 물든 라마단에 가장 속상해하는 이는 무슬림들이다. “이슬람은 왜 그래?”라는 세상의 손가락질에 “테러범은 제대로 된 이슬람 신앙인이 아니다”라고 해명하지만 손가락질도 테러도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작년 중동에서 한 이동통신사는 라마단을 맞아 ‘테러가 아닌 사랑으로 신을 섬겨라’란 노랫말이 나오는 반(反)테러 광고 영상을 내보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라마단 기간 소비도 폭증

라마단 기간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낮에 썰렁했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상점들은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손님을 맞는다. 식당들도 닫았던 문을 열고 하얀 연기를 피우며 양고기 ‘케밥’(중동식 꼬치구이)을 굽느라 정신이 없다. 이집트 카이로 같은 대도시의 대로들이 놀러 나온 차량으로 뒤엉켜버린다. 낮에는 금식하지만 해가 지면 넉넉히 식사를 하고 가족과 친구를 만나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극소수 무슬림의 테러로 얼룩진 라마단이긴 하지만, 대다수 무슬림이 보내는 보통의 라마단은 평온하다. 아니, 해가 지면 오히려 축제에 가까워진다. 금식하며 신의 뜻을 곱씹는 엄숙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저녁엔 친인척과 친구를 만나 한데 어울리며 공동체의식을 다진다.

라마단은 무슬림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해가 진 뒤 밤을 새우며 더 풍성한 식사를 즐기고 가족·친구끼리 선물을 교환하기 때문에 관련 품목 특수(特需)가 생긴다. 무슬림 5대 의무 중 하나인 ‘자카트(기부)’도 많이 이루어진다. 재력가들은 금식 후 먹는 첫 식사인 ‘이프타르’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대하게 베풀기도 한다. 서양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이슬람권에서는 라마단 때 TV 광고 단가가 오르고 전화·인터넷 사용량도 급증한다”며 “백화점도 대대적 상품 홍보와 사은품 행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요르단타임스는 “시리아 내전 여파로 중동 국가들의 경기가 침체에 빠져 있지만, 라마단 때만큼은 일시적으로 시장이 살아난다”고 했다. 2011~2015년 5년간 평균을 내보면 라마단 기간 아랍권에서는 식품은 20%, 통신서비스는 10% 정도 소비가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라마단이 끝나고 사흘 동안 이어지는 이슬람 명절인 ‘이드 알피트르’는 무슬림 사회의 대표적인 결혼 시즌이기 때문에 이를 준비하려고 라마단 중에 백색가전 등 혼수품 구매가 많이 이뤄진다는 특징도 있다. 다만 이란에선 라마단 특수 현상이 거의 없다. 이란은 새해 명절인 ‘노루즈’를 더 중요하게 여겨 그때 주로 가구나 가전제품 등을 장만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라마단

기자가 라마단을 처음 겪은 건 2007년 두바이 에미리트항공 여객기를 타고 카이로로 갈 때였다. 인천에서 이륙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 무렵 승무원들이 노트북 크기만 한 검은색 상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식사시간도 아닌데 뭘 주는가 싶었다. 어린이 승객에게 주는 장난감도 아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승무원들은 승객에게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물어보고 사람을 가려 검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랍인인 듯했다. ‘아랍 항공사라고 아랍 사람들에게만 따로 선물이라도 챙겨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무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자리의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아랍 남자와 얘기를 하다가 그의 무릎에 상자를 하나 올려놓고 갔다. 승무원에게 “사람 차별하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그럴 순 없었다. 옆의 아랍인에게 “상자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뚜껑을 열어 보였다. 갈색 빛 대추야자 열매, 납작한 빵과 양고기 한 덩이가 들어 있었다. 아랍 전통식 도시락이었다.

더 아리송했다. ‘왜 도시락을 따로 받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그 아랍인은 “요즘이 라마단이기 때문”이라면서 “이따가 해가 지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챙겨준 것”이라고 했다. 무슬림 승객들은 이륙 직후 제공된 기내식을 금식 규율을 지키기 위해 먹지 못한다고 했다. 무슬림 이용객이 많은 항공사는 라마단이 되면 이런 경우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라마단 도시락’을 별도로 만든다고 한다. 30분 뒤 비행기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해가 떨어지자 무슬림들은 기내 복도에 작은 양탄자를 깔고 엎드려 기도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몇 명은 자신이 지켜야 할 일몰 시각이 지금이 맞느냐고 주위에 물어보며 혼란스러워했다. 비행기가 지구 자전 방향의 반대인 서쪽으로 이동해서 일몰 시각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나 그에게 계시를 내린 신은 7세기 금식에 대한 율법을 정하면서 훗날 비행기 여행이나 기내식 같은 것이 생겨날 줄은 몰랐던 듯하다. 여름이면 해가 22시간 동안 지지 않는 백야(白夜)가 있는 러시아 북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북극 인근까지 무슬림이 퍼져나갈 것이라고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올해 라마단이 지난 5월 17일 시작됐다.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주한 아랍국 대사는 “한국에 ‘유혹’이 많다”며 올해도 어김없이 휴가를 내고 귀국했다. 라마단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란다. 금식은커녕 평소보다 더 방탕하게 먹고 노는 무슬림도 있다. 이들에게 라마단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삶 그 자체인 듯하다. 한국에도 이제 외국 무슬림 수가 20만명이 넘는다.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아직 우리 한국인에겐 생경한 문화이지만, 이번 라마단에 무슬림을 향해 따뜻한 인사말 한번 나눠보는 건 어떨까. “라마단 카림(자비 넘치는 라마단 보내세요)!”이라고 말이다.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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