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알고 나면 모든 게 시시하다.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었다. 지난 20여년 북핵 문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아는데도, 트럼프 변수 때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 세계 수천 명의 기자들이 싱가포르로 모여들었다. 다들 ‘미·북 정상회담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정보는 없는데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무얼 해도 마음이 불안해지는 상태 말이다.

트럼프에 대한 기대와 실망은 트럼프가 ‘규칙을 바꾸는 사람’이란 데서 나온다.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트럼프가 전통적인 외교의 문법을 무시하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김정은도 바로 그 점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날 밤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시내 구경을 나갔다. 공동선언 문안을 작성하기 위한 미·북 실무자들 간 협상은 끝나지 않았는데 여유 있게 시내 관광에 나선 모습을 보니 미국이 받든 안 받든 이미 카드는 던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무 협상은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새벽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당초 원했던 구체적인 비핵화 시간표 등을 포함시키는 방안에서 한발 물러서 북한이 원했던 포괄적인 비핵화 원칙에 합의했다. 다시 한 번 정상회담 취소 카드를 던져 판을 깨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비핵화에 대한 의지보다는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했는지도 모른다.

정상회담 당일엔 두 번 놀랐다. 공동선언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뿐이어서 우선 놀랐다. 길고 힘들었다던 실무 협상 과정 동안 도대체 무얼 했나 싶을 정도였다. 두 번째 놀란 건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었다. 공동선언엔 담겨 있지 않지만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줄줄 나왔다. 이날 기자회견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와 핵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얼개를 거의 그대로 보여줬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하고야 말겠다던 구체적인 내용들은 다 빠져 있는데도 트럼프는 주저하지 않고 정상회담을 성공으로 포장했다.

거대한 목표를 세우고 100% 성공을 확신하다가도 필요할 땐 언제든 방향을 트는 저 신속함이라니! 트럼프 시대에 번복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순발력 있고 실용적인 쪽에 속한다.

미·북 정상회담이 끝나고 트럼프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선언했다. 비핵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지난 연말 미국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적 방안을 쓸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위기감이 고조됐었다. 그러다 김정은의 신년사와 평창 동계올림픽 등을 거쳐 미·북은 정상회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너머에 극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트럼프는 늘 ‘좀 지켜보자’고 한다. ‘트럼프 변수’가 있는 한 언제 이 모든 일이 극적으로 방향을 틀지는 알 수 없다.

싱가포르에서 워싱턴으로 가려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한다. 같은 일도 거창하게 고생하며 취재해야 하는 게 트럼프 시대이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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