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일본은 지금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권에서만 나타나는 인식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는 분위기예요. 국가 간 관계에서 우호·협력을 말하려면 반드시 ‘신뢰’라는 게 있어야 하지요. 이게 ‘외교’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일 사이에는 이것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마치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이 한·일 양국의 현 상태입니다.”

전직 외교관이자 서울 역삼동에서 일본식 우동가게 기리야마본진을 운영하고 있는 신상목(49) 대표가 바라본 한·일 관계의 현실이다. 그저 ‘일본식 우동가게 대표의 의견’쯤으로 넘겨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신 대표는 17년 동안 총성 없는 전쟁터로 통하는 외교 일선을 누빈 베테랑 외교관 출신이다. 주일 한국대사관과 외교부에서 아태지역 다자 안보 정책을 담당하는 등 외교관 생활 17년 상당 부분을 일본 외교에 관여했다.

2000년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대학원에서 일본과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연구했고, 외교관을 그만둔 후인 2017년에는 일본 근대화 태동기인 에도시대를 연구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라는 책을 썼다. 올해 4월 말에도 일본의 근대화 시기 그들이 당시 세계 최강이던 유럽과 어떻게 끈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본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를 내놓았다. 외교관을 그만둔 후에도 일본인들의 삶, 또 그들의 역사와 외교 관계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 한·일 간 교류자로서 나름의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런 신 대표가 지금 한국과 일본이 서로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 충돌을 원만하게 해소되기 힘든 이슈로 바라봤다. 1965년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수립 이후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등 과거사 문제, 일본 유력 정치인들의 망언 등으로 정치·외교적 갈등과 충돌을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양국 간 충돌 양상은 과거와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신 대표는 “과거와는 결이 다른 충돌”로 표현했다.

과거와 결이 다른 한·일 충돌

신 대표는 “지금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만큼 심각했던 한·일 간의 극한 충돌 사례는 없었다”고 단언하며 “이를 테면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일본명 난조 세이코·南條世光) 사건으로 주한 일본대사관이 습격당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이 역시 양국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지금 상황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했다. 신 대표는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 당시 격렬하게 반발했던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모습조차 현재 확인되고 있는 일본의 모습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했다.

신 대표는 “지금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국에 대한 시각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이라며 “한국과 함께해온 다양한 협력과 교류들까지도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커져 있다”고 했다. 신뢰할 수 없는 국가인 한국과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을 향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이런 시각이 우익 성향의 일본 정치권과 정부 일각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신 대표는 현재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 지식인들과 오피니언층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전과는 완연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친한파 또는 지한파로 분류되던 일본 지식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조차 최근의 한·일 관계와 격한 충돌 양상을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신 대표에 따르면 일본의 지식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는 침략과 과거사 문제에서 비롯된, 한국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암묵적으로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부채의식이 그동안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배려의 목소리를 내게 했고, 친한파와 지한파를 형성해 우익 성향을 보여온 일본 정치권을 견제하게끔 해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한국 이슈, 특히 일본의 이익이나 이해와 충돌할 만한 사안이 나왔을 때 ‘일본이 한국을 좀 더 충실히 배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던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 ‘먼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이고, 왜 일본이 한국에 대해 좀 더 배려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일본 안에서 목소리를 내주던 이들이지요. 그런데 이번 한·일 간 충돌 사태에서는 친한파나 지한파로 불리던 이런 사람들조차 상당수가 돌아서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신 대표는 일본 내 친한파와 지한파로 분류되던 이들에게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극우로 불릴 만큼 우경화 성향이 강한 아베 신조 총리 측과 외교·정치·경제적으로 견해를 달리해온 ‘반(反)아베층’이 존재해왔다. 그는 이들 반아베층 역시 우익 성향의 아베 총리와 달리 한국 이슈에 있어 ‘좀 더 배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일본의 외교 관계에서 한국은 ‘우호 국가이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동맹 체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28일 오사카 영빈관 정상만찬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아베 신조 총리 부부. ⓒphoto  뉴시스
지난 6월 28일 오사카 영빈관 정상만찬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아베 신조 총리 부부. ⓒphoto 뉴시스

일본 지식인들까지 ‘부채의식’ 눈감아

한국과 충돌을 일으킬 만한 이슈가 불거지거나, 실제 양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될 때마다 일본 내 친한파와 지한파, 반아베층이 결집해왔던 게 그동안의 모습이었다. 신 대표의 말처럼 이들이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견지해온 세력의 반대편에 서서 ‘한국 배려’의 목소리를 내왔고, 이를 통해 양국의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왔다는 게 사실이다.

신 대표는 “문제는 그동안 일본 내에서 양국의 갈등 때마다 들려왔던 이런 목소리가 지금은 전혀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2019년 한·일 충돌 상황에서는 친한파·지한파로 분류돼오던 일본의 지식인과 오피니언 리더들, 반아베층 상당수가 ‘한국에 대한 배려’와 ‘일본의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베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정부의 입장에 우호적으로 돌아서고 있는 분위기마저 있다는 것이다.

신 대표는 “최근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일본 오피니언층의 분위기와 실제 일본 내 오피니언층의 분위기는 사실 많이 다르게 느껴지고 있다”며 “이런 분위기가 평범한 일본인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이전만 해도 한·일 관계가 흔들리거나 한국 내에서 일본을 향해 강경한 목소리가 나오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러다 한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텐데’ 같은 걱정이나 우려의 소리가 나왔던 게 사실입니다. 친한파나 지한파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런 걱정을 하는 일본인들이 저변에 깔려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유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분위기조차 읽을 수 없습니다.”

일본 전 세대가 아베 지지 분위기

신 대표는 “평범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일본 정부가 취한 조치(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 7월 1일 발표한 한국에 대한 3종의 화학소재 수출 규제)에 대해 ‘정당하고 타당한 조치’라는 지지 분위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더욱이 이런 분위기가 일본의 특정 세대나 계층에 국한돼 있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최근 일본 정부의 조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젊은층부터 나이 든 세대까지 일본의 전 세대, 전 계층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며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 사회 전체의 시각이 바뀌고 있는 분위기”라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 사회 우경화를 이끄는 대표적 우익 성향 정치인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일 관계가 국교 수립 이후 가장 위태로운 상황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배상 같은 해결이 요원한 과거사 문제가 꼽힌다. 그런데 최근 한·일 관계를 더 최악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근원에는 이보다 더 핵심적인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바로 7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를 목전에 둔 아베 총리의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익 성향의 지지세력을 결집해 참의원 의석을 더 늘리겠다’는 그의 정치적 계산이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작점이 바로 지난 7월 1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한국 주력 산업과 주력 기업들을 노골적으로 겨냥한 일본 정부의 대한국 수출 규제라는 분석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 대표에게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 총리의 지지세 결집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이번 한·일 충돌을 불러온 핵심 원인으로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신 대표는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일 수는 있지만 7월 21일 참의원 선거와 아베라는 인물, 그의 정치적 선택이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는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단견’”이라고 했다.

“일본에 한국은 여러 의미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외교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참의원) 의석 몇 개 늘리겠다고 자칫 외교 관계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모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베나 일본 정치권 역시 그런 리스크를 다 알고 있습니다.”

아베 아니어도 한·일은 충돌한다

신 대표는 오히려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가 20년을 추진해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개헌 성공을 위해 한국과의 극한 충돌을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전제 역시 가능성 차원의 분석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 대표는 최근 한·일 간 극한 충돌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보이고 있는 강경 조치, 또 이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무덤덤한 반응에 대해 “기본적으로 일본 사회 밑바탕에서부터 퍼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신뢰 문제가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아베 신조가 아닌 다른 일본 정치인 누군가가 일본 정부와 정치권을 주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도, 시기의 문제일 뿐 한·일 간 극한 충돌은 결국 벌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신 대표는 인터뷰 내내 ‘깨지고 있는 신뢰’와 ‘무너진 외교’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은 현재 갈등의 틈 정도가 벌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다. 국제 관계와 외교, 국제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자칫 경제 전쟁과 외교적 파탄 경고까지 나오고 있을 만큼 심각하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우리가 일본을 압도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하다.

키워드

#인터뷰
조동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