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삼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1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수삼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1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걸 생각하면 징글징글하네요.”

지난 11월 17일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의 발표 직후 부산의 한 야권 인사는 수화기 너머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2020년 벌어지고 있는 동남권 신공항 논란에서 느껴지는 건 기시감이다. 케케묵은 이 갈등은 대부분 비슷한 모습으로 전개됐다. 근거만 놓고 보면 가덕도신공항을 주장하는 쪽과 가덕도는 안 된다는 쪽의 주장 중 어느 한쪽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주긴 어렵다. 오랫동안 반복해온 논란이라 각 진영의 근거는 과거보다 더욱 치밀하고 정교해졌다.

매번 신공항 입지를 두고 다퉈온 과정은 이랬다. 일단 김해공항은 포화상태라는 건 모두 동의한다. 더 크고 넓은 곳이 필요한데 유력한 장소가 부산 인근 해안에 자리 잡은 가덕도와 경남 내륙에 위치한 밀양이다. 둘 중 어디에 신공항이 들어서느냐를 두고 부산과 나머지 영남권 광역자치단체(경남·울산·대구·경북)가 대립하며 갑론을박을 벌였다. 정부는 신공항이라는 주제만 제시했을 뿐, 어느 쪽 손도 선뜻 들어주지 않았다. 한 번은 두 군데 다 별로라며 부적합하다고 했고, 다른 한 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지금 있는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게 답이라고 하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전 정부가 해법으로 내놓은 김해공항 확장안 자체가 잘못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들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신공항은 정치 문제라는 데 대다수가 동의한다. 국제공항 같은 국가적 인프라는 경제 논리만 적용할 수는 없는 고도의 정책 사안이다. 이미 대통령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이다. ‘10조원이 넘는 예산 폭탄’과 ‘1300만명의 표심’은 정치인과 정당에 너무나 매력적이다.

백지화 후 탈당 요구받은 MB

이 오래된 신공항 논쟁을 쫓으려면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남권 신공항이 처음 거론된 건 1992년이었다. 당시 서의택 부산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가덕도 신항만 연구’ 용역을 통해서 ‘신공항’을 처음 제시했다. 서 교수는 부산 신항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가덕도에 신공항이 건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제안을 깊이 생각하게 된 건 10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김해공항의 항공 수요가 폭증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항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때마침 큰 사고가 터진 것도 한몫했다. 2002년 4월 중국 민항기가 김해공항 인근 돗대산에 충돌해 12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김해공항 안전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남권 5개 지자체(부산·대구·울산·경남·경북)는 김해공항의 처리능력이 2027년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며 정부에 신공항 건설을 건의했다. 이를 받아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제3차 공항 개발 중·장기 종합계획’을 확정해 동남권 신공항을 ‘장기 계획’으로 지정했고, 2006년 12월 정부 차원의 첫 검토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긴 건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동남권 신공항 건립은 그의 대선 공약이었고 당선된 뒤 국책사업이 됐다. 하지만 관련 논의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원래 국토해양부는 2008년 3월 국토연구원에 ‘동남권 신공항 개발의 타당성 및 입지조사’ 용역을 주고 2009년 9월 입지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부산 vs 나머지 지자체’의 다툼이 심해지고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여당도 발표를 반기지 않았다. 영남 표심을 괜히 분산시킬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앞섰다. 그래서 선거 이후로 발표를 연기했다.

지방선거는 ‘아사리판’이 됐다. 경남에서는 당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우리 후보 뽑아줘야 ‘경남 신공항’이 밀양으로 오는 데 도움이 됩니다”라고 발언했다가 부산시장 3선에 도전하던 같은 당 허남식 후보를 발끈하게 했다. 당장 이달곤(한나라당) 대 김두관(야권 단일)의 경남도지사 선거가 급했던 정 대표가 경남에서 승부수를 던졌다가 허 후보와 김정길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의 비판을 받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영남권을 돌며 선거 내내 줄타기를 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경남지사를 야당에 뺏겼고 부산시장은 접전 끝에 가까스로 수성했다. 선거가 끝나자 정부는 신공항 발표를 해를 넘겨 2011년 3월에 하겠다고 밝혔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가덕도냐 밀양이냐를 두고 격한 내홍이 오가던 중 “굳이 왜 짓느냐”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했다. 수도권 친이계 의원들이 주축이 된 한나라당 지도부가 신공항 백지화론의 축을 이루었다. “두 곳 모두 타당성이 없다면 양쪽 다 못 할 수 있지 않느냐”(안상수 대표), “이미 1년 반 전에 경제성이 없다고 나왔다”(정두언 최고위원)며 백지화에 군불을 지폈다. 영남권 내 대결이 ‘수도권 대 영남권’ 대결로 확전되는 모양새였다.

2011년 3월 30일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는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동남권 신공항 건립 백지화를 밝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명박 정부의 대표 공약 중 하나는 그렇게 지역 민심만 갈라놓은 채 끝났다. 청와대와 정부는 ‘경제성’을 입지 선정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정치권에서는 다음 해 있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표를 잃을 수도 있는 결정을 하지 않으려는 속내가 드러난 결과라고 봤다. 민심을 갈라쳤던 정부와 여당은 스스로 갈라치기를 당했다. 한나라당 내 영남권 후보들은 백지화 결정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 책임론을 물었다. 2012년 다음 총선을 걱정하던 대구·경북지역 의원들은 “대통령이 탈당해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MB 국토부는 ‘여유’, 박근혜 국토부는 ‘포화’

시끄럽지만 그렇게라도 끝이 난 줄 알았던 동남권 신공항 이슈가 부활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발표 다음 날인 3월 31일 미래 권력에 가장 가깝다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이 문제를 다시 손에 쥐었다. “지금 당장 경제성이 없더라도 미래에는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남권 신공항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 이 한마디의 파괴력은 꽤 컸다. 곧바로 ‘레임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영남권 의원들이 탈(脫)이명박을 선언하고 차기 유력 주자 곁으로 갈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졌다.

신공항이 지닌 정치적 매력은 선거 때마다 유효했다. 동남권 신공항은 대표적인 지역 공약으로 2012년 대선판에 다시 끌려 나왔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는 김문수 후보를 제외한 4명의 후보가, 민주통합당에서는 문재인 당시 후보를 비롯한 5명의 후보가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가장 적극적인 이는 TK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박근혜 후보였다. “부산시민이 바라는 신공항을 건설하겠다”며 TK 민심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부산의 민심을 얻기 위해 신공항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산에서 지지율 45%에 머물던 박근혜 후보는 실제 선거에서 59.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신공항 덕을 봤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국토부는 2013년 신공항 수요조사 연구용역을 추진했다. 그리고 2014년 8월, 3년 전 백지화했던 동남권 신공항을 공식적으로 재추진하기로 했다. “저비용항공사가 급성장하면서 2023년부터 김해공항의 활주로가 혼잡해질 것으로 예상돼 항공 수요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명박 정부가 2011년 신공항 불가 결정을 내린 근거는 경제성이었다. 국토부는 당시 “김해공항의 운용 여력이 2027년까지 충분하다”며 백지화를 이끌었는데 2014년에는 “2023년이면 김해공항이 포화상태가 된다”며 자신들의 말을 뒤집었다. 불과 3년 만에 현저히 다른 결론을 가져온 것을 두고 ‘윗분들의 의중’ 때문이란 설명이 설득력을 얻었다.

재추진이 발표되자 대구시가 강경하게 나왔다. 신공항은 무조건 대구·경북에서 1시간 이내로 접근 가능한 지역이어야 한다며 못을 박았다.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는 “물구덩이(가덕도)보다는 맨땅(밀양)이 낫다”고 했다. 반면 친박인 서병수 당시 부산시장은 직을 걸었다. 신공항의 조건은 24시간 운영이 가능해야 한다며 가덕도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또다시 영남권은 가덕도와 밀양이 일전을 치러야 했다. 부산의 한 중견 언론인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보다 더욱 TK에 쏠린 정부라는 게 부산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청와대와 정부가 밀양으로 이미 정해놓고 형식만 갖추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많았다. 상의를 중심으로는 인천공항 원포트(one-port)만 고집하는 수도권에 대한 불신이 컸다. 중국의 물류가 부산으로 흘러와야 부산도 살아갈 수 있는데 항공 화물이 전부 인천으로만 가게끔 하는 게 말이 되냐는 분위기였다.”

2016년 4월 열릴 총선을 앞두고 부산에서는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다. 새누리당이 지역 공약에서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사실상 제외한 것이다. 새누리당 부산시당은 2012년 열린 19대 총선에서 내세운 1번 공약이 가덕도신공항 건설이었다. 같은 해 12월 열린 18대 대선에서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핵심 지역 공약에 가덕도신공항을 반영했다. 그리고 2014년 열린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덕도에서 선거대책위원회 회의를 개최하는 퍼포먼스까지 펼쳤다. 이 선거에서 보수 여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 게 신공항 효과였다. 그런데 지방선거가 끝난 뒤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중앙당에서는 ‘신공항 함구령’이 떨어졌고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신공항 문제를 시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말하며 회피했다.

신공항으로 불을 지피는 이유 중 하나가 표 때문이었다. 회피하는 것 역시 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2016년 총선이 지나야 입지가 결정될 것 같고 박근혜 정부 아래서는 부산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정치적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도 PK와 TK, 두 지역 모두에서 민심을 잃을 수 있으니 차라리 공약으로 내걸지 않는 걸 택했다.

부산이 꿈틀했던 건 오히려 지방선거 직전 조원진 당시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 때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에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신공항을 언급했는데 이게 PK에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부산일보는 “부산 정치권에서는 대구·경북이 주장해온 경남 밀양으로 신공항 입지를 결정하기 위한 여권 핵심부의 사전 작업 차원에서 조 의원의 발언이 나온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가 선택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해공항 확장안이었다. 오랫동안 시끄러웠던 국책사업이라 어느 한쪽으로 결론 낼 것이라는 전망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명박 정부 때 신공항을 백지화한 지 5년여 만에 ‘부산의 가덕도’와 ‘경남의 밀양’은 또 한 번 어느 쪽도 선택받지 못했다. 신공항이 밀양에 올 것으로 확신했던 대구는 “정부가 대국민 사기극을 벌였다”고 고함을 질렀고, 부산은 “지역갈등을 봉합하려는 정치적 미봉책”이라며 평가 과정 자체를 불신했다. 애초 죽어가던 이 논란에 다시 불을 지핀 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고 새누리당의 텃밭 내전을 불러온 것도 박 전 대통령이었다. 신공항 문제가 보수정당 내부에서 ‘대구·경북 vs 부산’이라는 정서적 결별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이명박 정부 때처럼 신공항발 정계개편론까지 등장했다.

여당은 승부수, 야당은 적전분열

탄핵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은 2017년 대선이 끝나고 2018년 지방선거 결과 PK의 지방권력이 교체됐다. 잠잠했던 신공항 문제는 부울경 광역단체장이 바뀌면서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2019년 오거돈 당시 부산시장, 송철호 울산시장,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국무총리실에 김해신공항의 안전과 소음 등의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해줄 것을 건의했다. 과거에는 부산만이 가덕도의 유일한 지지자였지만 이번에는 경남과 울산이 함께한 게 달랐다.

지난해 12월 총리실 산하에 검증위가 설치됐고 지난 11월 17일 김해신공항안의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동남권 신공항 이슈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당초 부울경 여론조차 김해신공항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여권 잠룡들의 발언이 바뀌고 정세균 국무총리의 톤도 달라지면서 비관론이 낙관론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의 이유는 대부분 내년 4월에 있을 부산시장 선거와 2022년 대선에서 찾는다.

가장 난감한 쪽은 텃밭이 쪼개지는 걸 지켜봐야 할 국민의힘이다. 서울·부산 보궐선거를 승리해야 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입장에서 부울경의 민심을 거스르긴 어렵다. 지표마저 그런 상황을 보여준다. 한국갤럽이 지난 11월 10일부터 사흘간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포인트)를 보면 부울경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22%에 그쳐 민주당(32%)보다 10%포인트 낮았다. 반면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권영진 대구시장)며 TK 지역은 반발하기 시작했고 해당 지역 국민의힘 의원들도 마뜩잖은 얼굴이다. 지난 15년간 겪은, 징글징글한 사회·정치적 비용을 이제부터 또 치러야 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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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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