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근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 사과한 문재인 대통령.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근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 사과한 문재인 대통령. ⓒphoto 뉴시스

최근 두 개의 ‘큰 사과’가 있었다. 그 뒤엔 국가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죄송’이라는 한마디로 지나갈 일이 아니다. 국민적 심판이 흔한 여론조사가 아니라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내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야 모두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를 보선에 내세워 진검승부를 벌여야 한다.

첫 번째 사과는 청와대에서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월 7일 윤석열 검찰총장 사태와 관련해 “혼란스러운 정국이 국민들께 걱정을 끼치고 있어 대통령으로서 매우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 사태에서 대통령의 사과는 처음이었다.

사과는 본인의 과오를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대통령의 사과에선 과오에 관한 말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검찰을 목표물로 정했다. “권력기관 개혁에 흔들림 없이 매진했다.”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들의 권한을 분산하고… 공수처가 출범하게 되길 희망한다.”

이후 문 대통령은 윤석열 징계 이슈의 전면에 서다시피 했다. 징계위에 들어가는 법무부 차관이 부담을 느껴 사퇴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월성원전 사건 피의자의 변호인 출신인 이용구씨를 법무부 차관에 앉혔다.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윤석열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12월 15일엔 야당의 공수처장 임명거부권을 박탈한 공수처설치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역이 돼 왔다는…”이라며 검찰을 비판했다.

12월 16일 새벽 법무부 징계위는 윤 총장에 대해 ‘정직 2개월’ 중징계 결정을 내렸다. 여당은 “징계위 결정을 존중한다. 국민 눈높이에 엄중한 비위”라고 평했다. 반면 윤 총장 측은 “징계 사유가 무리하고 징계위 구성이 편파적이며 진행 과정이 절차를 위반했다”라고 말한다. 진보성향 정의당도 “이정화 검사의 감찰 보고서 누락, 징계위원 구성 정당성 시비”를 지적했다.

그간 윤 총장은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 혐의와 울산시장 선거 개입 혐의에 관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지휘했다. 수사의 종착지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될지 모른다. 법무부 징계위가 직무정지를 밀어붙인 진짜 이유는 ‘정권 수사 좌초시키기’라는 해석이 나온다. 진중권 교수는 윤석열 정직에 대해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죽창만 안 들었지 인민재판”이라고 평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출신 김종민 변호사도 이 징계에 대해 “징계위원들 쇼하느라 고생 많았다”라고 했다.

과오가 빠진 대통령의 사과

윤석열 징계와 공수처 출범은 같은 시기에 단행됐다. 이 사건의 ‘본질’은 ‘권력의 전횡을 제어할 우리 사회의 사실상 유일한 견제장치가 뽑혀나가기 직전에 놓였다’라는 점이다.

“법치를 지키겠다”라는 윤석열의 말은 그 개인을 넘어 사회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가치를 대표한다.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장이 비상식적으로 잘려나가면, 법치가 설 자리가 없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검찰이 당면한 비리를 외압 없이 수사해 죄가 있으면 지위고하를 떠나 재판에 넘겨야 한다. 그래서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 시스템이 멈춰 설 위기다.

지금 출범하는 공수처는 고인(故人)이 된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도 반대한 공수처다. 노회찬은 “삼성에 떡값 받은 검찰”을 폭로해 고초를 겪었고 누구보다 ‘검찰 견제용 공수처’를 지지했다. 그런 그도 대통령과 여당이 사실상 공수처장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현 방식에는 맞섰다. 한국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점엔 반론이 별로 없다. 대통령과 주변 세력이 공수처로 판검사를 통제하려 들면 삼권분립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

권력자의 형사범죄가 단죄되지 못하는 곳에서 일반 국민인들 온전할까? 444개의 월성원전 문서를 없앤 혐의를 받는 공무원들은 상관의 압력이나 지시로 그렇게 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소돼 유죄가 확정되면 이들은 일자리와 명예, 연금을 잃는다. 누가 보상해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부당한 압력이나 지시를 거부하기도 어렵다. 곧바로 조직에 찍혀 자신의 직업적 커리어가 끝장나기 때문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지배하는 공직사회에선 이런 ‘부조리’와 ‘희생양 만들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옛날부터 소유하고 있던 작은 주택에서 나오는 100만원 안팎의 월세와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퇴직자들은 최근 껑충 뛴 건강보험료를 받아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노후가 정부의 정책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변호사 유튜버가 수개월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을 했다가 정정·사과한 일로 자택에서 체포됐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은 자신의 발언권이 조금씩 위축되고 있음을 느낀다.

국민은 보통 ‘정치는 나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탄생은 일선 공무원부터 퇴직자,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 노후, 신체를 위협하는 ‘나의 일’이 된다.

문 대통령의 사과에는 이러한 사회적 논쟁이 내재해 있다.

지난 12월 15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5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photo 뉴시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탄생은 ‘나의 일’

두 번째 사과는 문 대통령의 대척점에 서 있는 보수 야당에서 나왔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2월 15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과 관련해 “저희가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저질렀다. 용서를 구한다”라면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국가를 잘 이끌어가라는 공동경영의 책임과 의무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게 된다. 대통령의 잘못은 곧 집권당의 잘못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특정 기업과 결탁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경영 승계 과정에 편의를 봐줬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 대해서도 “자숙해야 마땅했다”라고 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의례적인 사과 퍼포먼스’를 하지 않았다. 대신 과오의 내용을 조목조목 밝혔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은 “민주와 법치가 오히려 퇴행한 작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며”라는 문장만으로 절제했다. 개선 방법으로 “과거 잘못과 허물에 대한 통렬한 반성” “정당을 뿌리부터 다시 만드는 개조와 인적 쇄신” “정치의 근본적 혁신 방향을 모색하는 과제에도 노력”을 제시했다.

친박근혜계 조원진 전 의원, 친이명박계 이재오 전 의원 등은 “배알도 없는 야당” “없는 죄 만들어”라며 반박했다. 일부 보수정치인의 시각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죄상’이라는 용어는 너무 나간 것이었다. “경영 승계에 편의를 봐줬다”라는 단정한 표현도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부인하는 점이나 ‘묵시적 청탁’ 같은 혐의 내용이 모호하다는 점을 반영하지 않았다.

이번 사과에 대한 긍정적 반응도 나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김종인 위원장의 용단을 높이 평가”라고 했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잘하신 일”이라고 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국민께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지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과 이전에는 이 사과의 적정성에 대한 찬반 논란이 심했다. 막상 사과 이후엔 우호적 반응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논란이 완화됐다.

그러나 ‘최순실’로 대표되는 보수정당의 부정적 이미지가 당대표의 사과 한마디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대중을 설득하는 기본 수단인 ‘에토스(ethos)’는 정치집단의 공신력에 바탕을 둔다. 이 공신력은 ‘청취자를 속일 의도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서 나온다. 속일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대중은 대체로 대통령이 하는 말을 일단 믿어준다. 이렇게 에토스는 양면적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대통령이 공중을 속여온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통령에게 치명적이다. 일단 믿어준 호의를 배신한 것이므로 그 불신이 넓게 그리고 깊게 확산한다.

이 관점에서 ‘박근혜 탄핵의 하이라이트’는 ‘천만 촛불시위’가 아니라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사과담화문’이었다.(‘정치수사학’) “최순실씨는… 연설이나 홍보 등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이라고 고백한 박 전 대통령의 담화문은 국민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줬다.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무너져 국정 지지율이 4%로 떨어졌다.

왜 그렇게 됐는가? 이 담화문이 박 전 대통령의 이전 발언과 모순됐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18일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선후보 경선 검증청문회를 비롯한 여러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정윤회씨가 의원실 보좌관을 그만둔 후 정씨의 부인인 최순실씨를 접촉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말해왔다. 결국 1차 담화문으로 인해 오랜 기간 공중을 속여온 것으로 인식됐고 이에 따라 공신력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 불신은 대통령이 소속된 보수정당에 전이됐다.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불신이 워낙 커서 보수정당은 대통령 탄핵, 대선 패배, 지방선거 패배, 총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응징’ 위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 내야

이렇게 ‘문재인의 사과’는 집권세력의 치명적 문제를, ‘김종인의 사과’는 보수 야당의 치명적 문제를 각각 내포한다. 국민은 둘 중 어디를 응징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어디를 응징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절실한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은 결정적으로 2021년 4월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 선거는 차기 대권의 향배를 결정짓는 중대 변수도 된다. 여야는 국민이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를, 즉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후보를 내야 한다. 우리 선거 결과는 ‘구도 반, 인물 반’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시간도 없고 여러모로 불리한 야권이 느긋한 건 이상한 일이다. 야권에 최상 시나리오는 나경원(전 의원) 외에 오세훈(전 서울시장), 유승민(전 의원) 등 국민의힘의 대중적 후보가 모두 출마하는 것이다. 이어 조은희(서초구청장), 윤희숙(의원) 등 신예가 선전한다. 여기에 안철수(국민의당 대표), 금태섭(전 의원) 등 범야권 후보가 합류한다. 이러한 경선판이 벌어져 흥행해도 야권은 서울에서 이길까 말까다. 그러나 전혀 교통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이번 선거는 나라와 국민 각 개인의 장래에 너무나 중요하지만, 선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서는 절실함이 보이지 않는다.

허만섭 국민대 교양대학 부교수ㆍ전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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