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를 마친 후 방명록을 적고 있다. ⓒphoto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지난 1월 4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를 마친 후 방명록을 적고 있다. ⓒphoto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이른바 ‘윤석열 현상’으로 정치권이 요동치면서, 윤석열의 향후 진로와 관련해 ‘제3지대’가 주목받고 있다. 에스티아이의 지난 3월 12~13일 여론조사는 제3지대론에 불을 붙였다. 현 상태에서의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36.8%, 민주당 30.7%, 국민의당 5.9% 순이었는데, 윤석열 신당 창당을 가정한 조사에선 ‘윤석열 신당’ 28.0%, 민주당 21.8%, 국민의힘 18.3% 순으로 나타났다. 윤석열 신당의 출현으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반토막 나고, 민주당 지지율 역시 3분의 1 가까이 소멸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에 일부 호사가들은 윤석열이 제3지대에서 독자세력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심한 진영논리로 나라를 분열시킨 좌우 양극단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 ‘제3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중도주의를 내세워 프랑스 대선판을 평정한 마크롱의 앙마르슈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검찰총장 퇴임 후 첫 외부 일정으로 101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자택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단독 보도한 동아일보는 “기왕 대선에 나올 바에는 국정농단과 탄핵 사태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던 기존 보수야당이나,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게 국정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현 여권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품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윤 전 총장이 귀를 기울이는 정치적 행보를 김 명예교수 만남을 시작으로 사실상 내디딘 것으로 풀이된다”고 했다.

하지만 역대 대선에서 제3지대가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1992년 정주영, 1997년 이인제, 2002년 정몽준, 2007년 고건, 2012년 안철수, 2017년 반기문 등이 대표적인 제3후보였다. 이들은 독자 출마로 3위(정주영·이인제), 중도 포기(고건·반기문), 후보 단일화로 사퇴(정몽준·안철수)와 같이 모두 실패했다.

제3지대, 제3후보는 기성 양당정치에 실망과 염증을 느낀 대중의 정치 변혁 열망에 기초한다. 초기에는 신선함을 무기로 돌풍을 일으키며 기성 정당의 후보를 압도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검증을 명분으로 네거티브 공세가 강화돼 진흙탕 싸움으로 들어가면, 결국 조직력과 자금력 그리고 축적된 노하우에서 열세인 제3후보가 패배의 쓴잔을 마신다. 여의도 정치 경력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기성 정당의 등 위에 올라타지 않고 대권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단언한다.

안철수가 야권 단일후보 경쟁에서 초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거대 야당의 지원을 받은 오세훈의 벽을 넘지 못한 것도 제3지대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조직력의 열세로 인한 뒷심 부족은 제3후보의 치명적 약점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제3지대라는 용어에 숨어 있는 정치적 함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정치지형에서 윤석열이 제3지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야권분열을 의미한다. 1여2야의 구도로 민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극심한 이념 전쟁, 진영 대결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또 동서 지역갈등 및 좌우 대결로 양분된 대한민국에서 대선은 곧 진영 전쟁을 의미한다. 오세훈이 “안철수가 서울시장이 되고 윤석열이 가세하게 되면 야권분열로 대선에서 필패한다”고 주장한 논거는 바로 제3지대의 탄생으로 인한 야권분열이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이 같은 구조적 제약에서 나온 필연이었다.

2011년 서울시장 후보를 박원순에게 과감히 양보했던 안철수는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면 특정 진영논리에 기대지 않을 것”(2012년 3월 서울대 강연)이라고 했다. 진영을 뛰어넘는 ‘새 정치’를 외쳤으나 결국 실패했다. 반기문은 2017년 1월 귀국길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밝혔다. 평생 외교관으로 살아온 반기문다운, 어느 진영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라지만 “도대체 당신의 정체성은 뭐냐?”는 의문을 증폭시켰다.

현실정치는 명분과 실리의 조화다.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종식시킬 통합의 정치 구현이라는 시대정신을 내걸면서도 진영 쪼개기로 인한 야권분열이 아니라 야권 대통합을 통한 정권교체로 귀결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참고할 만한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영국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을 들 수 있다. 1979년 보수당에 정권을 내준 이래 대처리즘의 기세에 눌려 맥을 못 추고 있던 노동당은 1994년 41세의 토니 블레어를 당 대표로 선출한 후 1997년 5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18년 만에 정권을 교체하였다. 승리의 비결은 ‘제3의 길’에 있었다. 블레어는 당 대표가 된 후 1918년부터 노동당 정책의 대명사였던 당헌 4조 국유화 강령을 폐기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으로의 파격적 변신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내 강경파들은 그를 토리당(보수당의 옛 이름)에 빗대어 ‘토리 블레어’라고 비꼬기도 하였으나, 일반 여론은 그를 비전과 결단력, 카리스마를 겸비한 새 시대의 지도자로 칭송하였다. 블레어의 성공 공식은 노동당이라는 제2지대에서의 제3의 길이라는 신(新)노선 실행이었다. 진영 분열 없이 외연 확장에 성공한 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의 전쟁영웅으로 대통령에 오른 아이젠하워를 들 수 있다. 1948년 대선에서 그는 민주·공화 양당의 출마 권유를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 자신이 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지만, 민주당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거절하였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을 선택하였다. 당시 공화당은 좌파·우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고립주의라는 강경노선을 내건 우파의 태프트에 맞설 후보를 찾지 못했던 좌파가 그를 영입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빈손으로 공화당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시민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외치는 ‘나와라 아이젠하워(Draft Eisenhower)’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상당한 조직력을 확보하였다. 민주당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면서도 공화당 내 강경우파 세력에 반감이 큰 국민 다수의 호응을 얻었다. 공화당이 영입한 형식이지만 아이젠하워가 사실상 공화당을 접수해 본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바람은 일시적이지만, 진영과 조직은 반(半)영구적이다. 이 둘을 슬기롭게 묶을 전략적 혜안이 필요하다. 안철수의 지적처럼 제3지대론은 여권의 이간계일 수 있다. 제2지대를 창조적으로 재편하여 ‘더 큰 2번’을 만드는 전략지도를 그려야 한다. 기존의 국민의힘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윤석열의 이름으로 조직하고, 국민의힘의 부정적 잔재를 과감히 털어내는 대수술을 통해 제2지대의 확장적 재편을 이루는 것이 정치인 윤석열이 풀어야 할 숙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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