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4월 2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 차려진 재보궐선거 사전투표소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4월 2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 차려진 재보궐선거 사전투표소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도떼기시장은 상품, 중고품, 고물 등 여러 종류의 물건을 도산매·방매·비밀 거래 하는,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을 일컫는다. 진중권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을 도떼기시장에 비유했다. 야권 유력주자인 윤석열의 향후 행보와 관련해 “국민들에게 충족되지 않은 정치적 욕구가 있다. 그런 욕망을 타고 가야지 국민의힘에 들어가는 순간 끝”이라고 잘라 말했다. 얼마 전 국민의힘을 ‘아사리판’이라고 비난하면서 윤석열이 그런 흙탕물에 들어가면 백조가 오리 되는 것이라고 한 김종인의 화법과 맥을 같이한다.

김종인과 진중권은 ‘마크롱 모델’을 강조한다. 의원 한 명 없는 ‘전진(En Marche!)’이라는 당의 후보로 나선 마크롱이 강력한 중도주의를 기치로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했듯이, 윤석열도 거대 양당에 염증을 느낀 다수 유권자의 열망을 새로운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한때 마크롱 모델에 흥미를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내 한국적 현실에서는 ‘그림의 떡’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프랑스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국민직선제로 선출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결선투표제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는 경우 1·2위 후보가 2차 결선투표를 치르는 방식이다.

결선투표제는 다당제와 후보 난립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양대 정당의 후보인 자크 시라크와 리오넬 조스팽이 결선투표에 진출할 것으로 점쳐졌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결선에서 좌파인 조스팽을 지지하겠다는 응답이 우파인 시라크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을 압도했다. 그러자 좌파진영 내에 “결선에만 오르면 누구라도 시라크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 후보 난립을 초래하였다. 좌파 유권자들의 표는 분산되었고, 우파 시라크(19.88%)와 극우파 장 마리 르펜(16.88%)이 결선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당시 좌파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은 60%를 넘었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개 결선투표에서 좌우 양 진영을 대표하는 후보자 2인이 맞붙는다. 한국처럼 인위적 후보 단일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거의 매번 후보 단일화 성사 여부가 선거전의 판세를 가를 핵심요인으로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정당과 후보는 소모적인 ‘밀당’을 반복하고, 유권자들은 후보 선호도와 승리 가능성 사이에서 고심한다.

마크롱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환경적 요인은 프랑스 좌파진영의 대표선수인 사회당의 몰락이었다. 2012년 출범한 올랑드 정권의 실정으로 사회당은 대중적 버림을 받았고, 사회당 정권의 장관이었던 에마뉘엘 마크롱은 탈당하여 앙마르슈를 만들었다. 2017년 5월의 1차 투표에서 사회당 후보 브누아 아몽은 불과 6.4%를 득표해 탈락하였다. 마크롱(24.01%)과 극우파 장 마리 르펜(21.30%)이 결선에 진출하였고, 마크롱은 66.1%를 얻어 33.9%에 그친 르펜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요컨대 마크롱의 앙마르슈는 제3지대를 표방했지만, 사회당이라는 제1지대의 상당 부분을 잠식해 중도 및 좌파진영의 대표선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파의 대표선수였던 공화당의 몰락으로 결선에서 극우파와 맞대결한 것도 행운이었다.

강력한 대선후보가 마땅치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재의 국민의힘은 2017년 프랑스 사회당과 완전히 다르다. 국민의힘은 4·7 재보선의 압승으로 전국단위선거 4연패의 수렁에서 벗어나 반등곡선을 그리고 있다. 당 지지율에서도 민주당을 넘어섰다. 윤석열이 아무리 강력한 후보라 할지라도 국민의힘과의 연대 및 협력 없이 대선 승리 방정식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2017년 마크롱 모델은 지금의 윤석열이 아니라 2017년 반기문이 벤치마킹했어야 할 사례였다. 대통령 탄핵으로 몰락하고 있던 새누리당의 대안으로 제3지대에서 강력한 중도주의를 내세워 중도 및 보수를 아우를 수 있었다면, 지난 4년간 우리 국민은 문주주의를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결선투표라는 제도적 환경과 양대 정당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환경의 차이를 무시하고 윤석열에게 마크롱 모델을 들이미는 것은 수준 낮은 훈수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2단계 접근 전략’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단계는 기존 정치권 밖에서 자강의 토대를 구축하는 단계다. 탈(脫)진영논리, 상식과 합리, 실사구시에 기초한 중도혁명, 공정국가 건설, 진정한 국민통합 등을 내걸 수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 필자가 제시했던 아이젠하워 모델도 이 단계에서 적용할 수 있다. ‘(가칭)공정과 상식을 위한 범국민연대’라는 정치 결사체를 창건하여 청년층, 중도층, 무당층 등 국민의힘으로는 담기 힘들었던 인적 자원을 결집하면 된다.

이런 움직임이 가시화하면 “드디어 윤석열이 제3지대를 선택했구나” 하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을 것이다. 김종인·진중권과 같이 제3지대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부류와 윤석열의 제3지대 행(行)으로 야권 분열이 현실화했다고 은근히 반색하는 부류다. 윤석열을 4·7 재보선 과정에서의 안철수로, 자신을 오세훈으로 인식하고 싶은 국민의힘 잠룡들도 이 과정을 즐길 수 있다.

2단계는 정권교체를 위한 범국민 연대를 성사시키는 단계다. 방법은 국민의힘 대선후보와의 단일화와 국민의힘과의 통합을 통한 단일후보 선출이 있는데, 후자가 정공법이다. 윤석열을 조폭 리더십이라고 맹비난한 홍준표의 입, 적폐수사의 정당성에 대한 김용판의 시비, 박근혜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서병수의 집착 등 여러 교란 요인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공화당과 3당 합당을 성사시킨 김영삼과 같은 결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서울시장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을 복기해 보면, 이러한 선택의 유효성을 금방 알 수 있다. 안철수가 기호 4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세훈, 나경원 등과 경선을 벌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국민의힘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접수하기 좋은 내부 문화와 생리를 가지고 있다. 윤석열에게 태클을 걸려는 사람들보다 격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하다. 마크롱은 사회당을 버리고 나와 성공했지만, 윤석열은 국민의힘으로 들어가 성공해야 한다. 언젠가 윤석열이 ‘도떼기시장’에 가야 하는 이유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