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9일 서울역 KTX 플랫폼에서  바른정당 지도부가 귀성객들에게 추석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주호영 당시 대표 권한대행, 정운천 의원, 하태경 의원,  이준석 최고위원, 유승민 의원의 모습. ⓒphoto 뉴시스
2017년 9월 29일 서울역 KTX 플랫폼에서 바른정당 지도부가 귀성객들에게 추석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주호영 당시 대표 권한대행, 정운천 의원, 하태경 의원, 이준석 최고위원, 유승민 의원의 모습. ⓒphoto 뉴시스

“(이준석 후보의) 아버지와 (유승민 전 의원이) 친구인 특별한 친분이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대선 관리가 되겠나.” 지난 6월 2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주호영 후보는 이전처럼 ‘유승민’을 이준석 전 최고위원에게 던졌다. 전날인 1일,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경원 후보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특정 후보를 대통령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은 통합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특정 후보’는 유승민 전 의원이고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은 이 후보다. 나 후보 역시 유승민을 이준석에게 던졌다.

원내 경험이 없는 서른여섯 청년의 돌풍은 보수정당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신구 대결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0선의 최고위원은 지금 주인공이 됐다. 무대 한가운데서 조명받는 여론조사 1등 청년을 끌어내리기 위해 다선의 중진들은 힘을 쏟는다. 그중 하나의 선거 전략으로 채택된 건 계파 프레임이다.

중진들의 말대로라면 유승민계의 힘은 막강하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지난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간 전국 만 18세 이상 국민의힘 지지층 39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당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이 후보는 48%의 지지율을 얻었다. 5명의 다자대결 구도에서 절반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중진 후보들의 주장대로 유승민계의 지원이 존재했고 이 후보의 여론전에 도움이 됐다고 치자. 유 전 의원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이는 ‘대선주자 유승민’의 파괴력과 맞닿는다. 최근 여론조사의 결과들을 추려보면 유 의원이 얻는 지지율은 5% 안팎이다.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보수적 유권자들은 오히려 그에게 표를 덜 던진다. 민심도 당심도, 유 전 의원이 갖는 파괴력이 크지 않다는 걸 증명해주는 숫자다.

유승민과 만나는 ‘탄핵’이라는 지점

반면 하나 알게 되는 건 있다. 보수층 지지율이 낮다는 건 여전히 그를 향한 비토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국민의힘 당대표는 당원 70%, 일반 국민 30%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선출된다. 국민 여론에서 뒤처지는 중진들은 당심에서 이 후보를 뒤집어야 승산이 있다. 당심 어필 포인트로 유 전 의원을 던진 건 당원들의 유승민 비토 정서를 활용하려는 전략이다. 이 전 최고위원에게 유 전 의원의 비토를 덧씌우는 작업이다. 이 후보도 “유 전 의원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필연적으로 당심과 유승민이라는 정치인은 ‘박근혜 탄핵’에 대한 가치평가 지점에서 만나게 돼 있다. 유 전 의원을 정치권에 끌어들인 사람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였지만 대중은 그를 ‘박근혜의 비서실장’으로 기억한다. 2005년 10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고,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박근혜 캠프 정책메시지 단장을 맡는 등 대표적 친박 인사로 분류됐다. 하지만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된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2016년 11월 ‘최순실 사태’로 생긴 탄핵 정국에서 “법 절차에 따라 탄핵 사유가 발견되면 탄핵 절차에 들어가면 된다”고 말했던 그는 같은 달 20일, 박영수 특검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공소장을 공개하자 탄핵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같은 해 12월 9일 탄핵소추안은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는데 유 전 의원을 포함한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의 표 이탈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 바른미래당에 적을 뒀던 유 전 의원은 고향이자 정치적 터전인 대구에서 ‘배신의 정치인’이 됐다.

탄핵은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었지만 모두의 지지를 받진 못했다.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지만 모두가 같은 역사로 기억하진 않는다. 헌법적 가치를 어긴 대통령을 주권자들이 끌어내린 명령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수다.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릴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이 잘못했는지를 반문하며 정치적 보복으로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PK지역의 한 국민의힘 당협위원장의 얘기다. “내 지역을 보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애석함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많아지면서 이런 흐름에 영향을 주는 듯하다.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사건 등을 보면서 박 전 대통령이 그 정도로 잘못한 것까지는 아닌데 당시에 너무 과했던 것 아닌가 생각하는 정도의 안타까움이 늘었다.”

이번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도 과거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사면에 대한 가치 판단이 숙제로 떨어졌다. ⓒphoto 뉴시스
이번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도 과거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사면에 대한 가치 판단이 숙제로 떨어졌다. ⓒphoto 뉴시스

“박 전 대통령 명예회복? 대선부터 이겨야”

지난 6월 2일 부산에서 열린 후보 합동연설회에서 나경원 후보는 “정권을 교체해서 서민들의 손을 잡아드리고, 고령에 장기간 구금돼 있는 전직 대통령을 석방하겠다”며 사면론을 공개적으로 꺼내 들었다. 현장 방청석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흐름이 가장 강한 곳이 대구·경북이고, 그다음이 부산·울산·경남이다. 두 지역을 합친 영남에 적을 둔 국민의힘 당원 비율은 51%로 절반이 넘는다.

국민의힘 선거관리위원회는 당대표 예비경선에서는 본경선(당원 70%·일반 국민 30%)과 다르게 당원 50%, 일반 국민 50%로 여론조사 비율을 정했다. 영남권 당원의 영향력은 전체 대비 25%로 상대적으로 줄었다. 반면 당원 투표 비율을 70%로 늘린 본경선에서는 영남권 당원의 영향력이 전체 대비 35%까지 상승한다. 사면 주장에 박수치는 당심을 자극하는 전략은 뒤지고 있는 중진 후보들에게는 매우 중요해졌다.

탄핵은 지금 당대표 경선에서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다. 부산의 한 지역구 의원은 “유 전 의원을 호출하는 건 탄핵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을 뿐 다시 등장시키는 거다. 급한 마음에 탄핵을 다시 꺼내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연설회에서 언급된 ‘사면’은 ‘탄핵’이란 단어를 끄집어내지 못해 선택한 또 다른 자극의 표현이었다.

국민의힘은 그간 전직 대통령과 관련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피해왔다. 지난해 12월 15일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받아 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면, 국민을 하늘처럼 두려워하며 공구수성(恐懼修省)의 자세로 자숙해야 마땅했으나, 반성과 성찰의 마음가짐 또한 부족하였습니다”라고 전직 대통령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 사과하기 이전부터 당내에서는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당시에도 “굳이 전직 대통령 문제를 이슈로 만들어 낙인을 찍을 필요가 있냐”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굳이 언급하지 말자는 얘기였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지금도 탄핵을 자유롭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평가한다. 재보궐선거가 끝난 뒤 나온 “탄핵이 정당했다”는 인터뷰에서 보듯 탄핵의 강을 넘어서야 했다고 봤고, 보궐선거에서 압승하며 이제는 탄핵의 강을 건넜다고 본다. 이처럼 전통적 지지층의 인식과 조금이라도 어긋난 지점을 가진 전직 ‘박근혜 키즈’에게 공세를 가해야 했던 중진들은 ‘탄핵’이란 단어 대신 ‘유승민’이라는 인물을 이 후보에게 던진 셈이다.

사실 탄핵에 대한 가치평가에 가장 예민한 쪽은 친박계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박 전 대통령이 명예회복을 하려면 다음 대선에서 보수 야당이 무조건 승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탄핵 문제에서 당당한 후보들이 지금 어디 있나. 이준석 후보뿐만 아니다. 주호영 후보도 그때 탈당하고 없었다. 나경원 후보는 당시에 탈당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탄핵 이후 우리 당은 모든 선거에서 졌다. 그런데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젊은 세대와 중도층이 합류해 제대로 이겨봤다. 과거에는 진보층이 전략적 사고에 능했지만 이제는 보수층도 전략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이번 당대표 선거도 민심이든 당심이든 대선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좌우할 거다.”

그런데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에는 반드시 승산 높은 후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국민의힘의 희망은 당 밖에서 움직이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탄핵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낸 특검 책임자라는 점에서 보수 야당과 악연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입당한다면 즉시 국민의힘 유력 대권 주자로 대접받게 된다.

황교안 당대표 시대와 다를까

윤 전 총장이라는 변수 활용법을 놓고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들은 엇갈리고 있다. 나경원·주호영 후보는 윤 전 총장과 처음부터 함께하는 대선 경선을 해야 한다며 스케줄을 늦추자고 말한다. 이준석 후보는 “특정인을 위해 기다려선 안 된다”며 당의 원래 경선 일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탄핵을 화두로 올린 두 중진 후보는 윤 전 총장을 앞장서서 모시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를 향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다. 이들이 대표가 되면 결과적으로 탄핵의 망령을 국민의힘이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는 걸 자인하는 셈이다. 탄핵의 유령이 부활한 곳에서 탄핵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들어오기란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이 후보가 승리한다면 달라진다. 윤 전 총장의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젊은 대표 체제가 들어선다면 당심이 윤 전 총장을 더이상 비토하지 않는다는 시그널로 해석할 수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당심과 민심이 탄핵에 대한 후보들의 태도를 대선 승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준비가 된 것 같다. 탄핵 사태 주역이 이 당에 대선후보로 들어올 수 있을까 묻는다면 지금 분위기로는 예스다”라고 말했다.

2년여 전인 2019년 2월,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황교안 당대표 시대를 열었다. 2016년 탄핵으로 찢어지고 상처 입은 보수정당이 선택한 당대표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인을 제공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다. ‘탄핵’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던 그였지만 존재만으로도 ‘탄핵’이란 단어가 전당대회에 덧씌워졌다.

그때의 대표 선출 방식은 이번과 같았다. 당원 70%, 일반 국민 30%의 여론조사였는데 황 대표는 총 37.7%를 얻어 1위가 됐다. 탄핵 찬성파를 대표했던 오세훈 당시 후보는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50.2%를 얻었지만 당심을 얻지 못해 전체 지지율에서 뒤졌다. 당심과 민심의 괴리만 선명하게 확인한 전당대회였다. 이런 어긋남의 결과는 혹독했다. 1년 뒤인 2020년 4월, 미래통합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한 총선에서 보수 야당은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다.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구도는 2년 전 그때와 닮은 점이 많지만 이번에는 30대 당대표 후보가 있다. 이 차이는 보기보다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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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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