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헌법기관장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헌법기관장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뉴시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최근 한 차기 주자 품평론을 했다. “그 사람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없고 부친으로부터 ‘국가에 충성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대통령 5년 임기 중 2년만 하고 2024년 총선에서 내각제를 도입하는 개헌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겐 그런 생각이 있는지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람’은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다. 김 전 위원장은 최재형이라는 인물을 빌려와 개헌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개헌은 매번 대선을 앞두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이번에도 언젠가 튀어나오리라 예상했지만 대선주자가 아니라 외곽에 있는 인물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의외의 일이다. 예상 밖의 시점에 이제 막 감사원장을 관두고 정치 참여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인물이 개헌의 연결고리가 됐다.

최 전 원장은 투영체다. 야권의 원로들은 그에게 개헌을 구애하며 권력구조의 개편을 투영하고 있다. 최 전 원장을 언급한 김종인 전 위원장은 “1987년 이후 대통령을 뽑아왔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보지 못했기에 내각제로의 변화를 가져올 시기가 됐다”는 의견을 종종 내비쳤다. 최 전 원장을 적극 지지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정의화 전 국회의장도 마찬가지다. 의장직을 수행하던 20대 국회 때부터 분권형 대통령제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대표적 개헌론자다.

올드보이들의 ‘개헌’ 투영체 최재형

최 전 원장은 윤석열 전 총장보다 대선 출마 명분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 약한 명분을 보완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개헌은 모든 걸 덮을 수 있는 큰 명분이다. 최 전 원장이 개헌 위에 올라타 출마할 수 있다는 게 여의도식 시나리오다. 과거에도 5년 대통령 단임제를 바꾸자는 권력구조 개편론은 정치세력을 모으는 연결고리였다. 1997년 내각제 개헌을 내세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 간의 ‘DJP연합’, 2002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제기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이 대표적이다. 정치 신인인 최 전 원장 입장에서도 세 규합용 카드로 권력구조 개편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

하지만 최 전 원장 측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개헌이라는 화두를 거부하고 있다. 최 전 원장의 한 지인은 “정치를 할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개헌 같은 앞서가는 이야기를 할 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친한 친구로 알려진 강명훈 변호사도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개헌론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정치권의 전망과 거리를 두고 있다.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한 개헌론은 정치주체별로 호응과 반발을 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정치권 ‘새판 짜기’의 깃발이 되기도 한다. 뜨거운 주제로 자주 등장했지만 매번 식어버린 채 끝나기도 했다. 주제의 성질이 민감하다 보니 여러 정치 세력 간의 합의를 끌어내기도 어렵고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는 단일안을 도출하지 못해서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국민의힘 한 초선의원은 “김 전 위원장이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가 더 관심거리”라고 말했다. “기사를 찾아보니 5년 전에도 김 전 위원장이 임기 절반 포기하고 개헌 공약하는 후보가 대선에서 이긴다고 인터뷰했더라.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30대 중반의 대표가 보수 야당을 움켜쥐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다. 대선판이 혁신 경쟁으로 치러질 거라는 전조현상이다. 이런 변화를 담을 그릇이 필요한데, 현재의 ‘87년 체제’ 사회로는 담는 게 불가능하다. 당장 대통령 피선거권 나이부터 줄이자는 이야기가 힘을 받는데 이것부터가 개헌이 필요한 문제다. 대통령의 권력 분산에 국민도, 정치인도 모두 동의할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이것도 개헌 문제다.” 분위기가 그만큼 무르익었다는 해석이다.

권력구조 개편안에도 기준점은 있다. 2018년 5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자동폐기됐던 청와대의 개헌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 13일 실시되는 지방선거 때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2018년 3월 26일 발의한 헌법개정안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겼지만, 권력구조 개편 구상에 한정해 본다면 이렇게 요약된다. ‘일단 제왕적 대통령제의 원인 중 하나인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를 폐지한다. 대통령 임기는 4년이며 1회 연임할 수 있다. 2022년에 대선과 지방선거를 함께 치르면 2024년에 총선이 치러지며 2년 주기로 대선과 총선이 교차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도 할 수 있게 된다.’

일종의 미국식 선거 시스템이다. 대선 5년과 총선 4년의 불규칙적인 간격은 국정 운영 측면에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시스템이다. 대선과 총선이 인접해 치러지면 표의 쏠림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이 일관성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윤환 건양대 교수는 ‘헌법개정의 필요성과 권력구조 개편방향’이라는 논문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하려는 대통령제 정부 형태에서는 중간선거제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조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2018년 6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당시 야3당 대표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photo 뉴시스
2018년 6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당시 야3당 대표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photo 뉴시스

노무현식 개헌안에 개헌 연석회의까지

개헌은 헌법 규범과 헌법 현실의 간격을 줄이는 작업이다. 아무리 열려 있는 해석을 통해 헌법을 보려 해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 속도가 법 조문보다 훨씬 빠르다. 그 간극이 너무 벌어진다면 현실과 헌법의 내용을 가급적 일치시켜 법 조항이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대통령 권한의 분산을 시대적 요구처럼 받아들이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겼다. 대통령의 권한을 누구에게 나눠줄지 결정해야 했다. 문 대통령은 내각제라는 제도를 신뢰한다. “권력의 균형이라는 점에서 볼 때 내각제가 낫다”는 게 대통령이 과거 인터뷰나 책을 통해 밝혀온 지론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백지상태에서 처음 붓을 들 때’라면 내각제가 낫다고 했다. 하지만 의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한국적 상황은 백지가 아니다. 국민들은 개헌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권력이 국회로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청와대의 지난 개헌안 중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인사권을 국회에 주지 않고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로 한 것도 그런 배경이 영향을 줬다. 대신 문 대통령이 선택한 권한 인수의 대상은 의회보다 지방정부였다. 청와대가 만든 개헌안에는 ‘대한민국은 분권국가다’라는 헌법 1조 3항이 신설됐다.

2017년 2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국회개헌특위가 발간한 보고서 역시 현행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 체제의 국정운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보고서는 우리의 현실에 맞는 국가경영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분권형 정부제(이원정부제)와 대통령제(4년 중임제)였다. 국회가 만든 특위에서도 올드보이들이 내세우는 내각제는 한국적 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대안에서 빠졌다. 현재 대권주자들이 내세우는 개헌안도 마찬가지다. 이 두 가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개헌은 정국의 다른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폭발성을 갖는 이슈다. 그래서 판을 흔드는 데 적격이고 때로는 전략적으로 활용된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주자들이, 특히 지지율에서 뒤지고 있는 후보들이 적극적으로 권력구조 개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상황이 만들어진 이유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대통령 4년 중임제’와 함께 대통령은 외교·안보·국방 등 외치를, 총리는 내치를 담당하도록 하는 ‘분권형 개헌안’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이광재 의원이나 박용진 의원은 역시 내치를 총리에게 맡기는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분권형 개헌을 주장한다. 양승조 충남지사와 최문순 강원지사는 아예 “대선주자 간 개헌 연석회의를 열자”는 쪽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대신 친문이자 이 전 총리의 핵심 참모인 최인호 의원이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지난 6월 15일 최 의원이 제안한 개헌안은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을 담았다. 차기 대통령이 국회와 개헌에 착수해 대선과 총선 시기가 일치하는 2032년부터 개정헌법을 적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흥미로운 건 대통령이 내놓은 개헌안과 최 의원이 제시한 개헌안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과 지방선거를 일치시켰고 총선을 중간선거 격으로 뒀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총선을 둬서 견제의 저울추로 삼았다. 반면 최 의원은 대선을 총선과 함께 치르는 안을 제시했다. 견제보다는 여권이 안정된 의석을 갖출 수 있도록 해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개헌안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안과 같은 형태다. 그때도 4년 연임제에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권력구조를 디자인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선 결과에 왜곡” 거리 두는 야권

상대적으로 덜 급한 쪽은 개헌론과 거리를 둔다. 불확실성이 큰 개헌 논란을 정치공학적 접근이라고 차단하며 견제하는 게 유리하다. 여당 내 1위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경국대전’을 고치는 일보다 국민의 구휼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 ‘구휼론’도 그런 맥락이다. 국민의힘 역시 거리두기 중이다. 이준석 대표는 “개헌은 대선 투표와 엮는 순간 난장판이 된다. 대선과 개헌 찬반이 엮이면 대선 결과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며 휘말리지 않으려고 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현재까지 무대응이다. 한 방송사에서 여야 대선주자 10명에게 개헌 필요성에 관해 물었는데 답변하지 않은 두 명의 후보 중 하나였다. 캠프 내부에서는 개헌이 화두로 올랐지만 “정권교체에 대한 명분을 희석시킨다”며 대응하지 않는 쪽으로 금세 정리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승자독식 권력구조를 바꾸자는 의견은 생명력이 강하다. 개헌을 물으면 찬성하는 쪽이 훨씬 많다. 올해 1월 2일 발표된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지난해 12월 27~29일, 전국 만 18세 성인 남녀 1002명 대상)를 보면 개헌 찬성이 57.9%(적극 찬성 18.7%, 다소 찬성 39.2%)로 과반을 넘었다. 개헌 반대 의견인 28.7%(매우 반대 10.0%, 다소 반대 18.7%)보다 두 배가 많다. 선거의 해, 대권주자들의 개헌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개헌 동력은 좀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분권과 협치’라는, 국민들이 원하는 바람직한 권력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도 안에서 움직여도 성공하기 어려운 게 개헌이다. ‘87년 체제’ 이후 손대지 못했던 지난 34년의 시간이 이를 보여준다. 선거를 위한 게임용으로 활용되는 개헌이라면? 그 성공 확률은 더 낮아진다.

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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