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일, 주북한 소련대사 글렙 크리울린이 작성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타전한 기밀 외교전문.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1979년 12월 1일, 주북한 소련대사 글렙 크리울린이 작성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타전한 기밀 외교전문.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사건’ 직후 북한 김일성이 일련의 상황을 오판한 증거가 박정희 서거 42주년을 앞두고 드러났다. 북측은 10·26사건 후 불과 1달여 만에 벌어진 ‘12·12사태’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전 대통령) 겸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남한의 권력을 장악할 것이란 예상을 전혀 못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오히려 북측은 10·26사건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전 대통령)가 집권을 계속 이어가는 와중에, 남한 내 혁명세력의 봉기로 ‘박정희’라는 구심점을 잃은 남한 정권이 자연 붕괴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연히 10·26사건 직후 남한과 미국에서 가장 우려했던 김일성의 제2 한국전 도발 시도도 애당초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안가(安家)에서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쏜 총에 시해당한 10·26사건이 있었던 1달여 뒤인 1979년 12월 1일, 주(駐)북한 소련대사인 글렙 크리울린(1923~1988)이 본국에 타전한 외교전문으로 확인됐다.

크리울린 주북 소련대사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평양에서 대사로 근무했고, 10·26사건 한 달여 뒤인 1979년 12월 1일, ‘남조선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10·26)들과 조선반도에서 우리의 영향력 강화를 위한 가능한 대책에 대하여(정치 요지)’라는 제목의 전문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타전했다. 10·26사건이 터진 지 1달여 뒤, 12·12 사태가 일어나기 11일 전 작성된 기밀 보고서다.

주북 소련대사가 본국에 타전한 외교전문은 국민대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박사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자료를 보관하는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가현대사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해 주간조선에 제공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앞서 김일성의 구소련 88독립보병여단 편입 직전 수기(手記)이력서, 김일성의 조봉암(전 진보당 당수) 지원을 통한 1956년 남한 대선개입 발언록 등을 주간조선에 제공한 바 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10·26사건 직후 작성된 해당 외교전문을 보면 북측이 당시 남한의 내부적 상황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며 “유신(維新)체제로 남한에 대한 정찰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북한, 최규하 계속 집권 판단

12쪽 분량의 문서 우측 상단에 ‘기밀’이라고 적힌 외교전문에서 글렙 크리울린 주북 소련대사는 자신이 만났던 북한 고위급 인사들과 북한 내 소련 정보망을 가동해 습득한 일련의 정보들을 취합, “박정희 피살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정권이 1980년대 초반으로 예상되는 헌법 개정 때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어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공식대변인들의 추측에 따르면, 새로운 정권 형성화 첫 단계에서 최규하가 이길 것”이라며 “1980년 초반으로 예상되는 헌법 개정에 따라 대선이 진행되면 그때서야 본질적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크리울린 대사는 “서울에서 나오고 있는 공식 발표 역시 이 추측들을 확증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올해 12월에 진행될 예정인 선거(10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전 국무총리)이 불출마를 선언했고 야권도 아직 후보자를 내세우지 않았다”며 “아마도 여기에 정당들, 군인들 사이에 어떤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 것 같다”는 관측이었다.

박정희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던 김종필 당시 민주공화당 상임고문의 불출마 선언(11월 10일)에 이은 최규하의 대통령 당선(12월 6일)까지는 예상했지만, 12·12사태를 계기로 한 신군부의 전격 등장은 예상 못 한 셈이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이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을 전격 체포한 12·12사태가 발발하며 12월 6일 10대 대통령에 선출된 최규하는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이듬해인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에게 권력을 넘기고 하야(下野)한다.

오히려 북한과 소련 측은 12·12사태 불과 10여일 전인 1979년 12월 1일까지만 해도 10·26 이후 남한 내 정세가 북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울린 대사는 “저희들과 만난 공식 대표자의 주장을 보면 평양에서는 서울 지도부의 교체가 남조선의 사회정치적 제도를 본질적으로 바꾸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남조선 정권이 어느 정도로 민주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여기에는 외교전문을 타전하기 이틀 전인 1979년 11월 29일, 불가리아 정부 대표단과 만난 김일성이 남한에서 어느 정도의 민주화 가능성에 대해 직접 이야기했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 그는 당시 미(未)수교 적성국(敵性國)이었던 한국 대통령을 ‘박’으로 지칭하면서 “‘박’의 제거는 조선 동지들에게 남조선과의 연락에서 중요한 방해물이 없어진 것”이라며 “남의 손으로 그들이 명확하게 목표했던 것이 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크리울린 대사는 “아마도 북한 지도부가 ‘박’이 없는 새로운 남조선 지도부와의 회담이 보다 큰 성과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융통성이나 양보심까지 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그 예로 10·26사건 직후인 1979년 11월 9일에 나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1면 사설(社說)을 예로 들기도 했다.

크리울린 대사가 “친절한 스타일, 덜 날카로운 표현, 평화에 대한 의도와 강도 등을 주목하라”고 밝힌 노동신문 사설은 박정희 사후 북측의 부푼 기대로 가득하다. 1979년 11월 9일, ‘합작, 단결, 통일로 민족의 출로를 열자’는 제목의 사설을 1면에 통틀어 게재한 노동신문은 “지금 남조선은 이전과 같이 파쇼와 분열의 길로 계속 나가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새길로 나가는가 하는 중대한 국면에 놓여 있다”며 “남조선에서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탄압하거나 박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민족 내부의 단결을 해치는 반공(反共)정책이 폐기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밝힌다.

크리울린 대사 역시 “남조선 독재자(박정희)의 동반자들과도 그들이 여태 걸어온 길에서 벗어난다면 함께 손잡고 나갈 용의가 있다”는 노동신문 사설의 구절을 근거로 “조선 동지들은 아마도 서울 지도부가 국민들 속에 자기 위신이 높아지도록 사회를 어느 정도 민주화하거나 조선과의 대화를 더 융통성 있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 같다”며 “조선의 벗들은 이 모든 요인들이 남쪽에서 평양의 지도를 받는 지하공작을 대규모화하고 합법행위까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1979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photo 뉴시스
1979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photo 뉴시스

북한, 미국 암살 개입 낮게 봐

북한과 소련은 박정희 피살 직후 일각에서 제기됐던 미국의 개입설 또는 암살사주설 역시 낮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울린 대사는 “서울과 워싱턴에서 박(정희)의 1인 정권, 야(野)권에 대한 태도와 학생반란에 관한 불만이 존재했고 남조선 군부 내에서 독재자를 타도하는 음모의 가능성이 생겼을 수도 있고, 이런 음모가 생겼다면 미국 측의 어느 정도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가능성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도 “중앙정보부장(김재규)의 발포는 사건의 도래를 앞당긴 것일 뿐”이라며 이 사건은 ‘소수 엘리트 정변’이라고 규정했다. 10·26사건의 성격을 남한 내 소수 엘리트들 사이의 파워게임으로 규정한 것이다.

크리울린 대사는 북측 역시 미국의 박정희 암살 개입설에 대해 별다른 무게를 두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크리울린 대사는 “북한의 공식 대표자들과 매체는 남조선 독재자의 피살을 정치적 위기의 논리적 결과 또는 남조선에서 사회경제적 갈등이 강화된 결과로 본다”며 “숨겨진 세력이 참가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북한 매체는 이 사건들과 미국이 직접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이어 그는 “북한에 어느 정도 호감이 있거나 최소한 비슷한 입장을 갖는 세력 역시 10·26사건과 이 사건 이후 벌어진 일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명확하다”고 밝혔다.

현재 북한의 공식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 역시 ‘박정희’를 ‘전 남조선 괴뢰대통령’으로 서술하면서 “1979년 10월 당시 남조선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죽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김일성 제2 한국전 기도 없어

북측이 10·26사건 직후 남한 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오판하면서 ‘제2 한국전 도발 기도’ 역시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10·26사건 직후 남한을 비롯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에서는 김일성이 박정희 사후 벌어진 권력 공백을 틈타 ‘제2 한국전’을 도발하지 않을까란 우려가 팽배했다. 실제로 10·26사건 직후에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하는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평양에 있었던 크리울린 대사가 본국에 타전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박정희 피살은 조선반도의 상태를 절대 악화시키지 않고 북한은 침착하고 관망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며 “모든 것에 의하여 판단하면 올해 10·26 이후에 북한에서 전쟁 준비태세 강화 또는 병력 재배치 등의 조치를 대규모로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오히려 소련 측은 김일성이 호언장담했던 소위 ‘남한 내 혁명세력’에 의한 남한 체제붕괴 시도를 회의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북한이 박정희 사후의 혼란을 틈타 남한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소위 ‘남한 내 혁명세력’이 실제로는 빈약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크리울린 대사는 “처음에 서울에서 벌어진 일(10·26)들에 대한 발표에 ‘남조선 인민의 투쟁이 계속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강조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남조선 지배층에 원래 정책을 버리고 민주화 길로 나가라는 호소가 강조되었다”며 “북한이 남조선 정권과 투쟁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세력의 빈약성이 재확인되었다”고 평가절하한다.

1980년 8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가운데)에게 육군 대장 계급장을 수여하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왼쪽). ⓒphoto 정부기록사진집
1980년 8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가운데)에게 육군 대장 계급장을 수여하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왼쪽). ⓒphoto 정부기록사진집

10·26 계기 ‘한·소 수교’ 역제안

오히려 크리울린 대사는 10·26을 계기로 남한과의 수교를 앞당길 것을 역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크리울린 대사는 “객관적으로 보면 조선반도에서 양국 체제가 유지될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고 조선 문제의 군사적 해결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며 “상기한 상황들을 고려하면 남조선과 미래 가능한 접촉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제안한다. 스포츠, 도서교환, 국제기구 소속 소련 국민의 남한 방문, 제3국을 통한 무역 등을 통해 남한과 접촉하자는 제안이다.

크리울린 대사는 “북조선과의 관계에서 일시적 불이익은 우리가 전체 조선반도에서 받을 이익보다 작을 것”이라며 “미군이 주둔한 남조선에 대한 직접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1980년 7월 모스크바올림픽 개최를 약 8개월가량 앞두고 나온 파격적 제안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소련 내에서 한·소 수교를 공식 제안한 사람은 크리울린 대사가 최초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크리울린 대사가 본국에 보낸 해당 전문에 소련공산당 중앙위 부부장으로 있던 미하일 스미르놉스키는 1980년 3월 25일 자로, “주북한 소련대사관의 ‘정치 요지’에 포함된 제안들은 고려 중이며, 앞으로 소련 외교부와 소련공산당 중앙위가 할 사업에 이용될 것”이라는 회신을 달았다. 미하일 스미르놉스키는 주영(駐英) 소련대사, 소련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10·26사건이 도리어 한·소 수교를 앞당길 뻔했던 셈이다.

하지만 크리울린 대사가 본국에 최초 제안했던 남한과의 점진적 접촉을 통한 한·소 수교는 전두환 정부 때인 19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KAL) 007편이 소련공군기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끝내 무산됐다. 269명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당시 사고로 한·소 수교는 북방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에야 성사된다. 1991년 구소련 해체 바로 직전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크리울린 대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북한을 바꿀 수 없으며, 소련이 무엇을 해도 북한이 중·소 분쟁에서 중립노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느낀 것 같다”며 “그래서 남한과 관계를 발전시키고 나중에 한·소 수교까지 하면 낫지 않을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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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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