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토론회에서 손바닥 왕(王) 자가 노출돼 논란을 빚은 윤석열 국민의힘 예비후보(왼쪽)와 경기도 국감에서 대장동 사태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photo 뉴시스
TV토론회에서 손바닥 왕(王) 자가 노출돼 논란을 빚은 윤석열 국민의힘 예비후보(왼쪽)와 경기도 국감에서 대장동 사태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photo 뉴시스

대선(大選)과 주술(呪術), 참 난해한 인연이다. 정치와 제사는 한 몸이었으니 깊은 인연이라 해야 하나. 고리짝 같은 시절의 제정일치(祭政一致)가 사라지고 한참인데 여전히 서로를 놓지 않고 있으니 질긴 인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각별한 인연의 연유에 대해선 잊자. 대신 2021년 11월의 주술(呪術) 정국을 일도양단하면 두 가지 논점이 남는다. 손바닥에 왕(王)을 새긴 자는 왕이 되는가. 화천대유(火天大有)의 패(牌)를 쥔 자는 대권도 거머쥐는가.

왕과 화천대유, 둘 다 부적(符籍)이다. ‘왕’이 명시적이고 솔직한 부적이라면, 주역의 괘 ‘화천대유’ 아래 숨은 대장동 사태는 그 자체로, 은밀하면서도 거대한 무형의 부적이다. 그래서 과연 부적은 통할까. 주술은 먹힐까.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를 풀기 위해선 왕과 화천대유가 던지는 질문을 좀 더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온갖 부적과 술수의 원형(原形)에 해당하는 질문들이 튕겨 나온다. 조상의 묏자리에 손을 대면 운명이 달라지는가(풍수). 삶의 특정 국면에 대운(大運)이 들면 대권을 쟁취할 확률이 높아지는가(사주). 64괘 중 혁(革) 괘를 뽑으면 혁명이 이뤄지는가(주역). 조금 멀리서 시작하자.

2000년 전 중국, 그러니까 한나라 때 일이다. 대륙의 동쪽에 미앙궁(未央宮)이란 궁이 세워졌다. 초한지의 유방이 황제로 등극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다. 이 궁엔 청동으로 만든 종(鐘)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스스로 운다. 누구도 종을 타격하지 않았는데 소리를 낸 거다. 괴이한 현상에 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원인이 밝혀지면서 더 놀란다. 종이 스스로 울던 바로 그 시각에, 대륙 서쪽의 구리광산이 무너진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서쪽 구리광산의 붕괴에 동쪽의 구리 성분이 반응하면서 종이 울어댄 것이다. 물리적 단절은 문제되지 않는다. 같은 종류의 기(氣)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실시간으로 서로 느끼고 반응한다. 이게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다. 무기물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은…. 묏자리 속, 유해로 남은 조상의 컨디션이 좋으면 자손들에게도 즉각 좋은 일이 생긴다. 기의 전달은 실시간 공명이다.

대장동은 ‘거대한 부적’이다

동기감응은 묏자리를 뜻하는 소위 음택(陰宅) 풍수의 근거이지만 그 범위를 제한하기 어렵다. 주술이 무엇인가. 우주의 기운이라 해야 할까, 초자연적인 힘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초자연의 힘을 빌리기 위해 쓰는 주술들을 해체하면 잠복해 있던 동기감응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리광산을 건들면 청동 종이 운다. 묏자리를 손대면 자손들의 삶이 변한다. 대운이 들어오면 출세한다. 혁명의 괘를 집어들면 혁명이 이뤄진다. 손바닥에 왕을 새기면 왕이 된다. 하늘 위로 쩡쩡히 빛나는 화천대유의 상(像)을 소유한 자는 스스로 화천대유, 곧 지존(至尊)이 된다. 다 동기감응이다.

주술은 유사한 기운의 조응에 기댄 채 시간적·물리적 거리를 극복한다. 주술은 그러니까 동기감응의 술수이고, 고이 접어 지갑에 넣어둔 부적은 휴대용 동기감응 장치다.

그런데 선거철이면 정치판으로 소환되는 ‘강호의 동양학’들은 사실 주술의 방편이라기보다 예측의 도구에 가깝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측의 사례가 ‘풍표낙엽(楓飄落葉) 차복전파(車覆全破)’의 점사(占辭)다. 한문이란 게 조사가 없다 보니,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된다. 단풍 풍(楓)으로 시작하는 여덟 글자도 그렇다. 무슨 사연일까. 단풍 들고(楓) 바람 불어(飄) 나뭇잎 떨어질 때(落葉), 차가 뒤집혀(車覆) 완전히 부서진다(全破)….

1979년 초, 점사를 받아든 주인공은 긴장했다. 단풍 고운 늦가을, 차 사고로 목숨이 간당간당할 수 있단 얘기 아닌가. 사내는 여름을 넘기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내내 긴장했다. 운전기사에게도 조심을 당부했다. 그러나 사고는 늘 뜻밖이다. ‘차복전파’의 ‘차’는 자동차가 아니라 차지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전’도 부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했다. 연초 당대의 걸출한 도사에게 차량 전복의 경고를 받은 중년의 김재규는 붉은 단풍이 전국의 산하를 핏빛으로 물들이던 10월 26일의 저녁, 차지철을 엎어뜨리고(차복) 전두환에게 망가진다(전파).

긍정과 낙관의 점사에 마음 설렐 수도 있다. 선거를 앞두고 주역의 지택림(地澤臨) 괘를 받았다 치자. ‘림(臨)’은 세상에 임하고, 사람들에게 임하고, 일에 임한다는 뜻이니 나쁠 게 없겠다. 군림의 뜻도 가졌으니 큰 뜻을 품어도 되리라. 화천대유와 천화동인(天火同人)의 괘 역시 대권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만약 주역으로부터 밀운불우(密雲不雨)의 메시지를 얻는다면? 구름은 뻑뻑한데(밀운), 비는 오지 않는다(불우). 시기상조란 말 아닌가. 설칠 때가 아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옳다. 행여 천산둔(天山遯) 괘를 받는다면? 선거에 나설 게 아니라 피하고 볼 일이다. ‘둔(遯)’이 피하고 물러난다는 뜻이다. 성리학으로 세상 이치에 통달했던 주희(朱熹·1130~1200)조차 이 괘를 받아들곤 잠시 세상을 등졌다.

‘동양학’들의 예언과 주술, 신뢰도는?

그런데 선거 때면 정치판에 스며들어 판세를 흔들어대는 ‘동양학’들의 예언과 주술을 믿어도 될까. 믿으면 안 된다.

주역의 경우 나중에 예언이 틀리고 주술이 무력해져도 메시지의 발설(천기누설이라 해도 좋겠다) 주체가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택화혁(澤火革) 괘를 면밀히 들여다보자. 택화혁은 주역 64괘 중 대표적으로 정치적인 괘다. 혁(革)은 혁명을 뜻하고 괘에 딸린 메시지들엔 정벌, 변혁의 언어, 위태로움, 흉함, 회한 등 격정의 용어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혁명의 성패에 대한 단정은 사실상 없다. 혁명을 암시하되 핵심 메시지는 결국 신중과 인내다. 변혁의 말이 세 번 돌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하루해를 다 보낸 후에야 거사(擧事)를 결심해야 한다. 공세적으로 움직이면 흉하고, 눌러앉아 있으면 길하다는 식의 알쏭달쏭한 메시지도 낸다.

물론 주역으로 ‘하늘의 뜻’을 묻는 실제 과정은 좀 더 정교하다. 괘 하나에 뒤엉킨 메시지들 중 몇 개의 메시지를 특정해 뽑아낸다. 메시지는 한 개가 될 수도 있고 여럿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구체적 단정은 없다고 보면 된다. 현란한 메타포와 모호한 암시 앞에서 괘를 뽑는 자도, 받는 자도 길을 잃는다.

특정 시각에 집중된 우주의 기운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사주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특정 시각을 오행(이게 우주의 기운!)으로 치환하려면 만세력이라는 특수 달력이 필요한데, 이 달력에 담긴 날짜들의 최초 개시일이 언제인지에 대한 설명은 누구도 못 한다. 전통의 사주 명리 체계 전체가 한갓 낭설(浪說)일 수도 있단 얘기다. 만세력의 기능을 인정하고 우주의 기운에 대한 통찰을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복잡해 봐야 다섯 개(오행) 또는 열 개(오행×음양)의 카테고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판단으로, 수많은 욕망과 음모가 얽히는 정치판을 읽어낼 수 있을까. 혹시 존재할지도 모를 기(氣)의 흐름조차 수많은 도로와 강력한 전파로 잘리고 끊겼을 상황에서 풍수에 대한 추가 설명은 하지 않겠다.

정치판의 불안, 점(占)의 위로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왜 선거철만 되면 명리에 매달릴까. 선거를 앞두고 유명 점집들을 순례하는 정치인과 참모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선거가 임박하면 유명 역술인들에게 뻔질나게 전화를 걸며 판세 분석의 업데이트를 요구하는 이들도 많다. 여전히 조상의 묏자리를 옮겨야 하고, 여전히 미래를 위탁할 점괘를 찾아내야 하고, 여전히 영험한 스님을 만나야 하며, 또 여전히 신기(神氣) 내린 무속인의 기운을 나누어 받아야 한다.

그건 아마도 점(占)의 위로 때문일 것이다. 주역과 사주와 풍수와 신점과 주술과 부적에 담긴 메시지들은 말하자면 영혼을 위한 소염진통제 같은 것이다. 주역이 됐든 사주가 됐든 운명을 재료로 마케팅을 하는 담론 체계 속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의 드라마가 녹아 있다. 천 년여에 걸친 상담과 데이터베이스(DB) 축적을 통해 이 세상의 ‘점’들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특유의 메시지들을 개발해왔다. 예언의 메시지가 아닌, 위로의 메시지들 말이다.

혼탁하고 불투명하고 흔들리기 쉬운 정치판에서 모든 정치인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정치는 말 하나만으로 자신의 세(勢)를 불려가야 하는 아슬아슬한 비즈니스다. 유권자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정치인들은 그 앞에서 정처를 잃는다. 궤도에 오른 듯하다가도 순식간에 투명인간 취급받는 게 평균적 정치인의 삶이다. 그 모든 불안과 초조가 극대화되는 게 선거철이고, 선거철이면 정치인은 분별을 잃고 시대착오적이 된다. 주술과 미신에 자신을 내던진다.

두 번, 세 번 점치면 모독

근대 이후 정치는 합리의 영역이다. 주술과 부적이 정치를 흔들어대면 5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막힌 일이 다양한 변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나. 반대파들이 조작한 ‘부적’ 한 장으로 졸지에 쿠데타의 주동자로 몰렸고, 죽었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들로 하여금 글자를 파게 만든 기상천외한 부적이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초록 부적에 새겨진 단 네 글자가 조광조를 역모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나뭇잎이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조(走+肖)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려 한다…. 부적은 내밀하고 음흉하다. 주술이 횡행할 때 정치는 음모가 된다.

과도한 걱정이려나. 어쨌거나 우주의 기운을 무분별하게 끌어다 쓰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낭패 보기 십상이다. 감옥에 가기도 하지 않던가. 주역의 경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64괘 중 네 번째 산수몽(山水蒙) 괘가 엄중하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처음 점칠 때는 알려준다. 두 번, 세 번 치면 모독(冒瀆)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는다.” 주술의 남용은 점에 대한 모독이다. ‘왕’도 ‘화천대유’도 과도하면 우주의 반발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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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형 주역연구가·‘강호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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