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가 흔들린다는 건 꽤나 상투적인 얘기가 됐다. 과거에는 흔들린다고 하다가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보수 정당 혹은 후보가 승리하는 뻔한 결과가 반복됐다. 그래도 그런 흐름 속에서 민주당 수용성은 꾸준히 커졌다. 그 가능성을 엿본 건 2002년 대선이었다. 승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얻은 득표율은 30%에도 못 미쳤다. 분명한 한계였다.

다만 부산 출신 민주당 대통령의 등장은 더 큰 가능성을 가져왔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나선 김정길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44.5%. 보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결과였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도전보다 10% 이상 더 얻어내며 39.9%의 득표율을 부산에서 기록했다.

‘PK 출신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다’는 구도가 만들어진 건 이런 부산·울산·경남의 변화 때문이다. PK의 중심인 부산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게 지난 19대 대선이다. 다자대결 구도였지만 문재인 후보는 38.7%를 얻어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32.0%)에 앞섰다. 그리고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벌어졌다. 문 대통령의 인기를 등에 업고 보수 텃밭의 지방 권력이 대거 교체됐다. 민주당은 부산시장을 따냈고 16개 기초자치단체장 자리 중 13곳을 차지했다. 부산시의회 47석 가운데 41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대다수의 기초의회도 민주당 후보의 몫이었다.

그랬던 부산의 지형은 2년 뒤 총선에서 완벽하게 바뀐다. 2016년 5개 의석을 얻었던 민주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했지만 2020년 총선에서는 부산지역 의석수가 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지난해 4월 부산시장 재보궐선거까지 완패했다. 정치 지형은 좌우를 오가며 바뀌었고 그렇게 부산은 완벽한 ‘스윙스테이트(경합지역)’로 자리매김했다.

이재명의 동진, 지역의 역량은 의문

좌우를 넘나드는 PK의 정치적 향배를 점치는 건 쉽지 않다. 표의 유동성이 꽤 크다. 게다가 부산에서 만난 지역 정치권 인사들은 이번 선거가 다른 선거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말한다. 6월 지방선거에서 부산지역 구청장에 출마할 한 인사는 “대선 때문에 내 선거를 뒤로 미뤘다가도, 지방선거 때문에 내 선거도 해야 하고,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선거운동 분위기도 달라지고…. 하여튼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밑단의 민심이 크게 움직인다면 이것을 일반화해 파악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지역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단초는 있다. 일단 부산에서는 민주당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동진(東進)에 힘을 쏟고 있다. 당장 새해 첫 행선지로 부산을 낙점한 것만 봐도 그렇다. 1월 1일 이 후보는 부산항을 찾아 ‘유능한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띄웠다.

‘경제’는 어디에서나 가장 중요한 이슈지만 부산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부산이 겪는 지역적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인 지난해 12월 28일 문재인 대통령도 동남권 철도 개통식 참석을 위해 부·울·경을 방문했다. 대통령과 여당 대선후보까지 부산을 잇달아 방문하는 건 여권이 ‘PK 민심 잡기’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중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라면 지역 선대위에서 받쳐줘야 하는데 그게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다. 지역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아마 6월 지방선거 때 지금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국민의힘 쪽에 대부분 질지 모른다. 이대로 간다면 8 대 2 정도로 질 수 있다”고 말했다. 패배의 이유를 물으니 ‘능력의 문제’를 언급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바람이 불어 압승하는 바람에 준비가 안 된 시의원, 구의원들이 많이 당선됐다. 기초와 광역의원을 합치면 100명이 넘는데 부산시당에 이렇게 선출직이 많았던 적이 없다. 이들이 대선 같은 큰 선거에서 지상전을 담당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잘 못한다. 지역구 오프도 자주 뛰고 단체나 모임도 나가며 스킨십을 해야 하는데 이전에도 그런 걸 잘 못했고 당선되고서도 뚫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바닥을 훑지 못하는, 현실 정치에 필요한 부분들을 못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린다. 이런 건 확실히 국민의힘 쪽이 더 잘한다.”

중앙선대위는 현역 의원이 중심이 돼 굴러간다. 지역 선대위는 상대적으로 광역의원이나 기초의원의 역할이 좀 더 중요하다. 부산의 현역 국회의원이 적은 민주당에서는 이들 풀뿌리 의원들의 능력이 보다 부각된다. 방송이나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하는 공중전으로 포착할 수 없는 유권자를 이들이 담당해줘야 하는데 스킨십이나 네트워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윤 후보, PK 신경 좀 써주면 좋겠다”

민주당이 지역 내 문제로 고민이라면 국민의힘은 중앙의 문제가 지역에 영향을 줬다. 국민의힘 부산선대위는 1월 15일 꾸려진다. 중앙선대위가 후보와 당대표의 갈등으로 오랜 시간 파행을 겪은 게 부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민주당보다 조직 구성이 한 달 정도 늦었다. 국민의힘 부산선대위 총괄선대위원장이 된 서병수 의원이 지난 1월 12일 첫 회의에서 강조한 것도 “우리끼리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면 국민들이 등을 돌린다”였다. 지역 선대위가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는 점은 이전 대선이라면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국민의힘 부산시당 관계자는 윤석열 후보의 PK 소구력이 약하다고 지적한다. “윤 후보가 부·울·경 유권자에게 얼마나 매력 있는 상품인지 어필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고 말했다. 일단 윤 후보는 이 후보와 달리 PK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있다. 이른바 ‘PK패싱’이다.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철학을 간절히 원하는 PK의 바람을 쉽게 들어주지도 않는다.

기자가 국민의힘 부산시당 관계자를 만난 지난 1월 11일, 윤 후보는 서울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운영 구상을 공개했다. 이날도 지방에서 기대했던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이전에도 PK에 대한 발언이 인색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준석 대표와 화해를 이뤄낸 ‘울산 회동’ 다음 날, 빨간색 후드티를 입고 부산을 찾았지만 윤 후보가 부산 시민을 향해 약속한 건 이미 경선 때도 언급했던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의 적극적인 지원뿐이었다. 부산지역 오피니언리더들이 요즘 가장 챙기는 사업이 엑스포 유치이긴 하다. 그렇다 보니 “이준석 대표만큼만 우리 지역을 신경 써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은 해체했지만 이전 국민의힘 선대위에는 PK 현안을 두고 논의할 수 있는 인사들이 적었다. 특히 가덕도 신공항 반대파가 윤 후보 주변에 많이 포진된 걸 PK 정치권은 우려했다.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조직총괄본부장이었던 주호영 의원 모두 TK 출신으로 가덕도신공항 특별법 처리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측근이었던 윤한홍 의원은 창원에 적을 두고 있지만 가덕도 신공항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왔던 히스토리가 있다.

PK와 TK는 보수라는 이념으로, 그리고 영남이라는 지역으로 함께 묶여 있던 역사가 오래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연결이 느슨해진 상태다. 영남벨트에서 PK는 이탈한 지 꽤 됐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센터장은 “TK 출신 대통령이 2번 연속 배출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정치적 소외감, 정권의 인사에서 TK만 중용된다는 인식, 대선 과정에서 약속됐던 PK지역 공약이 이행되지 않는 데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지적했는데 이건 현재의 윤 후보에게도 적용될 만한 이야기다.

PK 지역 정가의 고민은 윤 후보가 거두고 있는 민심 지표에도 반영되고 있다. PK에서 썩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 못해서다. 여론조사에서 부·울·경의 정권교체 의견은 대략 60% 정도인데 이를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JTBC-글로벌리서치의 최근 세 차례 정례조사를 보면 오히려 PK에서 앞서는 건 이재명 후보다. 39.4% 대 35.7%, 38.8% 대 28.6%, 30.7% 대 27.4%로 세 번 모두 우세했다. 1000명 표본 여론조사에서 부·울·경의 표본은 150명 정도다. 표본이 적어서 결과가 튈 수는 있지만 추세는 참고할 수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수도권, 특히 서울과 지지율이 비슷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보통 부동표로 분류되는 ‘지지후보 없음’ 비중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앞선 조사에서 ‘모름·무응답’은 14.2%, 15.0%, 17.4%를 기록해 부유하는 표가 많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지역 정가에서는 PK의 부동표를 대략 60만~100만표 정도로 추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지역은 양 후보의 지지율이 붙어 있을수록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합지다. “이번 대선은 이전과 다르게 2030보다 4050이 진보층으로 분류돼 이들의 투표율이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칠 것”(차재권 부경대 교수)이라는 분석대로라면 부산에서도 윤 후보는 2030의 지지가, 이 후보는 4050의 투표율 상승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수도권 선거 지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만 유일한 부산 토박이 후보

거대 양당의 아성(牙城)으로 여겨지던 PK의 흔들림은 제3후보가 등장한 덕에 또 한 번 흥미로운 결과를 낼 수도 있다. 부산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유일하게 PK를 고향으로 둔 후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졸업한 부산 토박이다. 안 후보는 지난해 12월 23일부터 3박4일간 PK지역을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PK에서 머물렀던 적은 없었다.

고향에서 그는 서울 중심의 구조를 문제 삼았고 민간기업 유치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지자체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말하며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코어 지지층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PK지역에서 안 후보의 표가 강고해지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안 후보는 부산 출신이지만 활동무대는 서울이다. 연고성이 약한 탓에 그동안 고향에서 정치적 이득을 얻었던 적이 없었다. 실제로 PK의 국민의당 지역 조직은 열악하다. 부산의 경우 시도당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안철수의 당은 ‘호남당’으로 시작했으니 PK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호남 출신들과 정치를 시작했고 호남에서 의석을 얻으며 체급을 키우지 않았나. 그동안 PK에는 보수 지지자들 외에 ‘친노’와 ‘친문’이 있었으니 중간에 서 있던 안 대표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바뀌었다. 안 후보와 두 차례에 걸쳐 대선에서 매번 경쟁했던 부산 정치인 ‘문재인’이 이제 없다. 그리고 TK 출신인 이재명 후보와 ‘충청의 아들’을 강조하는 윤석열 후보보다 안 후보의 PK 연고성이 훨씬 강하다. 전국 단위에서 지지율 강세를 보이는 최근 추세는 PK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부·울·경 지지율이 10%대를 기록하고 있다. “조직력이 약해 미풍일 것”이라는 게 지역의 지배적 의견이지만 PK 표심의 유동성을 극대화할지 모를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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