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고리원전의 모습.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고리원전의 모습.

지난 1월 11일 부산 기장군에서 울산 울주군으로 통하는 기장대로를 빠져나와 ‘고리’ 방향으로 향했다. 원자력발전소로 향하는 국도변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도로다. 벚나무들이 길가에 가득해 봄에는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많다. 평일이지만 바다를 끼고 자리 잡은 카페 주차장에는 차들이 꽉 들어찼다. 벚나무길이 끝나면 이내 에메랄드 빛깔을 띤 바다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곳에 도착하면 어디에서든 웅장한 시멘트 돔을 자랑하는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볼 수 있다.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부산에서 북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자 울산과의 경계 지역이다. 이 지역은 ‘원자력 공화국’이다. 동남권원자력 의학원,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 등 ‘원자력’이 들어간 각종 기관이 근처에 들어섰다. 그래도 핵심은 고리원자력 본부다. 최근 이곳 정문에는 지역 단체가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동안 원전으로 고생했다. 고준위 폐기물은 대도시로’. 이들이 내건 문구는 복합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떠안아야 할지도 모를 핵폐기물이라는 존재, 그리고 지역 홀대라는 문제까지 한 문장에 담겼다.

원전도 모자라 핵폐기물까지 떠안을 판

고리원전 1호기가 착공된 게 1971년이다. 지금도 장안읍에서 울주군으로 경계를 넘어가면 엄청난 규모의 건설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신고리원전 5~6호기가 올라가고 있다. 50년, 무려 반 세기 동안 이 지역은 원전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새로 들어설 신원전과 함께해야 한다.

고리원전 바로 옆 동네인 길천리의 한 주민은 콘크리트 돔을 가리키며 ‘흉물’이라고 불렀다. “저 흉물 때문에 이 동네서 나는 미역도 사람들이 안 먹겠다고 안 사가던 때도 있었거든. 자식들이 뉴스 날 때마다 이제는 다른 데 가서 사시는 게 좋지 않냐고 말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라고 말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가 났을 때도, 수명이 다해 가동을 멈췄던 고리원전 1호기 재가동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셌을 때도 자식들의 전화를 받았다.

고리원전 덕분에 장안읍을 품고 있는 부산·울산·경남은 전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됐다. 고리원전의 원자로 개수는 9기(2기 건설 중)로 반경 30㎞ 내 인구가 382만명에 달한다. 일본 후쿠시마보다 20배나 많다. 수도권과 달리 원전 안전 관리가 가장 중요한 곳이 부·울·경이고 그래서 예민한 곳이다.

과거에는 원전 가동 때문에 논란을 빚었다면 이제는 ‘배설물’이 이 지역의 문제다. 몇 년에 한 번씩 원전은 연료봉을 교체한다. 원전 종사자의 은어로 ‘연탄불 갈기’라고 부르는 작업이다.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활용한 폐연료봉, 즉 사용후핵연료라고 불리는 배설물은 대표적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다.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보다 1000배 이상 위험하고 방사능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가 수십만 년이나 걸리는 골칫거리다.

고리원전 1~4호기에는 수조가 있다. 물을 가득 담은 저장소로 마치 수심이 깊은 수영장 같은 곳인데 다 쓴 폐연료봉은 이곳에 임시로 보관된다. 사용이 끝난 폐연료봉은 열이 4000~5000도까지 올라가면서 스스로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핵연료는 수소를 발생해 폭발을 일으킬 수 있고 건물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래서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고리원전에는 현재 5000다발이 넘는 폐연료봉이 수조에 저장돼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2021년 3분기 사용후핵연료 저장현황’에 따른 통계다. 총저장가능용량이 5492다발이니 이미 93.3%에 도달했다. 고리 1호기는 이미 100% 꽉 찼다. 고리 2호기는 89.1%, 고리 3호기는 92.7%, 고리 4호기는 94%가 찼다. 이건 고리원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지역 원전도 폐기물 저장이 점차 한계에 이르고 있다. 지금처럼 임시로 설치한 기존 저장공간이 포화 상태가 되기 전에 새로운 영구처리시설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1971년 고리원전이 첫 삽을 뜨기 시작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여기서 핵심은 ‘임시’와 ‘상시’다. 부·울·경에서 폐기물이 여론의 이슈가 된 건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사용후핵연료 포화 상태를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이 안은 ‘처리 시설을 마련하기 전까지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에 저장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했는데 지난해 12월 27일 정부에서 의결했다.

이 계획을 두고 “이번 2차 계획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24명이 공동 발의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고준위 특별법)’과 마찬가지로 핵발전소 지역을 핵폐기장으로 만드는 계획”(정수희 탈핵부산시민연대 활동가)이라는 의심을 지역에서는 갖고 있다. 반세기 동안 해결 못 한 처리장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지지부진할 경우 앞선 조항 때문에 기존 원전이 고준위 폐기장을 그대로 떠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임시’가 아닌 ‘상시’ 체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정부 의결이 나오자마자 지역 언론에서는 핵폐기물 문제를 집중적으로 두드리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주요 의제로 끌어올릴 기세다. 원전과 거리가 있는 경남은 좀 자유롭지만 부산과 울산은 당사자 모드다. 부산 지역지 중견 기자는 “모든 사안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이재명 후보가 핵폐기물 문제를 물으니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겠나’라고 하더라. 다른 지역 의제만큼 고민했는지 의문이다. 자존심 문제도 얽혀 있다. 전기는 수도권에서 많이 쓰고 위험은 지방 사람들이 지지만 이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도 엿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역 정치권 모두 “우리가 불리하다”

민주당은 좀 더 난처하다. 일단 현 정부에서 계획을 의결해 빚어진 문제다. 그 이전에 같은 내용을 법안으로 제출했던 ‘고준위 특별법’은 민주당 의원들이 공동발의했다. 이들 의원의 지역구에는 원전이 없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는 “왜 선거를 앞둔 시기에 이런 게 터졌을까 싶다. 상대당 후보는 오히려 원전을 장려하는데 폐기물 문제만 나오면 우리 책임이 된다”며 곤란해했다. 반대로 국민의힘 쪽에서도 유리한 게 아니라는 분석이 있다. 원전 가동을 지지하는 윤석열 후보가 이 문제에 해답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대선후보들에게 질문은 들어갔다. 부산·울산을 비롯한 전국 69개 시민단체가 뭉친 ‘2022 탈핵대선연대’는 이미 대선후보에게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에 관한 정책을 묻는 질의서를 보내기로 했다. 부산·울산을 방문하는 후보들을 향해 지역 언론들도 대책을 묻는 질의를 꺼낼 공산이 크다. 난제를 푸는 답안지에 따라 부·울·경 표가 움직일 수도 있다.

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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