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스타트 세계 1위 김보름. ⓒphoto 연합
매스스타트 세계 1위 김보름. ⓒphoto 연합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선수는 단연 이상화(29)와 이승훈(30)이다. 이상화는 2010 밴쿠버올림픽과 2014 소치올림픽 500m에서 2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빙속 여제’ 칭호를 얻었다. 이승훈은 밴쿠버에서 1만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소치에선 팀 추월로 은메달을 땄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2월 9~25일)에서도 이상화와 이승훈이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는 가운데 이들의 계보를 잇는 차세대 스타 김보름(25)이 메달 사냥에 도전한다.

매스스타트가 주 종목인 김보름은 2016~2017시즌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월드컵 종합 랭킹에서 1위에 오르며 평창 금메달 기대주로 부상했다. 지난해 2월 평창올림픽 테스트이벤트 격으로 열린 2017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여자 매스스타트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이승훈이 남자 매스스타트 세계 최강자인 만큼 둘 다 제 기량만 뽐내면 평창에서 남녀 매스스타트 동반 금메달을 이룰 수도 있다.

매스스타트는 최대 24명이 지정된 레인 없이 집단 출발(mass start)해 트랙 16바퀴를 돌아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우승하는 종목이다. 평창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두 선수가 각자 지정된 레인(인코스·아웃코스)을 달린 기록으로 순위를 가리는 스피드스케이팅(트랙 길이 400m)에, 여러 선수가 동시에 뛰어 결승선에 들어온 순서로 메달을 다투는 쇼트트랙(트랙 길이 111.12m)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인 이승훈과 김보름이 매스스타트에서 유달리 강점을 보이는 것도 정해진 레인 없이 자리싸움을 하며 승부를 겨루는 쇼트트랙의 기술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보름은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며 “쇼트트랙 때 배운 자리다툼 기술이 매스스타트에서 유용하다”고 했다.

정월대보름에 태어나 보름이라는 이름을 얻은 김보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스케이트 타는 친구가 멋있어 보여 쇼트트랙에 입문했지만 만족스러운 성적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뭘 하든 1등을 하는 게 꿈’이었던 대구 소녀는 정화여고 2학년인 2010년 종목 전향이라는 모험을 결심했다. 그가 새롭게 진로를 택하는 데는 이승훈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보름은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이승훈이 2010 밴쿠버올림픽 1만m에서 금메달을 따는 걸 TV 중계로 본 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김보름은 “이승훈 오빠는 스케이트 선수로는 교과서이자 나의 둘도 없는 멘토”라고 했다.

전향한 뒤 스케이트 인생이 순탄하게 풀린 건 아니었다. 김보름이 스피드스케이팅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처음 스케이팅화를 신었을 때 맨 먼저 든 생각은 ‘어? 이 종목도 나랑 안 맞겠는데?’라는 것이었다. 스케이트 날의 모양과 높이, 걸을 때 느낌 등 모든 게 쇼트트랙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돌아가긴 싫었다. 종목 전향을 결정할 때 “쇼트트랙도 못하는데 스피드스케이팅이라고 잘할 것 같으냐”던 주변 동료와 코치들의 냉담한 반응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포기하고 돌아가긴 싫어서 ‘이 악물고 이걸로 끝장을 보자’는 결심을 했다”고 했다.

김보름은 전향 후 1년 만에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스케이팅 3000m에서 은메달을 따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였다. 2014년 처음 출전한 소치올림픽에선 여자 3000m 13위(4분12초08)로 메달권엔 들지 못했다. 쇼트트랙 경험이 있는 선수가 유리한 매스스타트가 평창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서 그는 올림픽 금메달 꿈에 바짝 다가섰다. 2014~2015시즌 ISU 월드컵 시리즈에 처음 선을 보인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쇼트트랙에서 곡선주로 주파, 추월 기술을 연마했던 그는 단숨에 세계 최정상에 올라섰다.

간파당한 ‘막판 스퍼트’ 전략

지난 시즌까지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평창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경쟁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는다. 지난해 11~12월 출전한 올 시즌 3차례 월드컵(1·3·4차)에선 동메달 하나에 그쳤다. 월드컵 종합 랭킹도 지난 시즌 1위에서 올 시즌 10위로 떨어졌다. 국가대표 출신 나윤수(56) 관동대 교수는 “매스스타트는 지구력 경기가 아니라 전략이 더 중요한 두뇌게임인데 김보름의 작전이 간파당했다”며 “북미·유럽 선수들이 ‘반(反)김보름 전선’을 만들어 그의 독주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김보름은 경기 중·후반까지 중위권 그룹에서 체력을 아끼다 막판 스퍼트로 역전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가 초반부터 앞서 달리지 않는 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다. 앞 선수에 바짝 붙어 바람막이로 활용하면 힘의 30% 정도를 절감할 수 있다. 레이스 막바지에 역전을 벌이는 것도 중위권에서 에너지를 아낀 덕이다. 쇼트트랙선수 출신이라 코너링과 자리다툼 기술이 뛰어나 마지막 남은 한 바퀴에서 순식간에 3~5명을 제친다.

이 방식이 최근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막힌 건 북미·유럽 선수들이 번갈아 앞에 서서 서로 바람막이 역할을 하며 마치 한 팀처럼 레이스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경기 초반 선두권을 형성한 다음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김보름이 있는 중위권 그룹과 격차를 서서히 벌린다. 김보름은 중위권에서 에너지를 비축해도 경기 후반 이들과 격차가 너무 크게 나 있는 탓에 역전에 실패하고 만다. 김보름은 “같이 출전하는 박지우(20)와 치밀하게 작전을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평창 전까지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체중 관리에도 중점을 둔다. 지난해 10월 스피드를 유지하는 지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7㎏을 감량했다. 하지만 너무 체중을 줄이다 보니 체력관리에 지장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 다시 3㎏을 불렸다. 지난해 11월 1차 월드컵에서 넘어져 허리를 살짝 다쳤던 그는 “현재 몸 상태는 60% 수준인데 올림픽까진 시간이 있으니 여유롭게 생각하려 한다”고 했다.

김보름은 작은 얼굴에 큰 눈,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로 실력뿐 아니라 외모로도 많은 팬을 몰고 다닌다. 김보름은 “슬럼프 때 기분 전환을 위해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는데 그 뒤로 성적이 잘 나와 계속 노란 머리를 유지한다”고 했다. 오른팔에는 ‘주저앉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함이다’라는 뜻의 라틴어 문신도 있다. 그는 “힘든 시기에 이 문신을 보면서 힘을 내고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었다”며 “2018년 김보름이 금(金)보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승재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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