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15일 ISU(국제빙상연맹) 세계 주니어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는 차준환. ⓒphoto 연합
지난해 3월 15일 ISU(국제빙상연맹) 세계 주니어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는 차준환. ⓒphoto 연합

‘피겨 여왕’ 김연아(28)가 빙판을 떠난 후 많은 이들은 한국 피겨스케이팅이 예전처럼 다시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은 피겨 전 종목(개인 4종목, 단체전) 출전의 쾌거를 이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다. 특히 남자 싱글에선 2002 솔트레이크대회 이후 16년 만에 올림픽 무대 도전자가 나왔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된 고교생 차준환(휘문고)이다. 새하얀 피부에 여드름이 돋아난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 앳된 얼굴의 차준환은 이미 한국 남자 피겨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차준환은 극적인 드라마를 쓰며 ‘평창행’을 확정했다. 그는 지난 1월 7일 올림픽 피겨 국가대표 최종(3차) 선발전에서 라이벌 이준형(22·단국대)을 뿌리치고 한 장뿐인 남자 싱글 티켓을 거머쥐었다.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을 합해 얻은 252.65점은 역대 국내 남자 싱글 최고점이었다.

앞서 1~2차 선발전에선 차준환이 이준형에 총점 27.54 차로 크게 뒤졌다. 피겨계에선 마지막 3차 선발전에서 30점 가까운 차이를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차준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결과를 예측하기보단 오직 연습에만 몰두했다”고 털어놨다. 이준형이 마지막 무대에서 점프 착지 실수를 하며 흔들린 반면, 차준환은 결점 없는 클린 연기로 대역전을 만들었다.

차준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호기심에 집 근처 빙상장에서 열린 ‘방학 피겨 특강’에 등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천재’ 유형은 아니었다. 또래들이 몇 달이면 완성하는 동작을 차준환은 1년은 족히 걸렸다. 그는 부족한 부분을 끈기로 채웠다. 경쟁자들보다 앞선 강점도 있었다. 어린 시절 차준환은 아역배우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TV 광고에 출연했다. 풍부한 끼를 타고나 표현력 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다. 키에 비해 긴 팔다리를 가진 차준환은 똑같은 동작을 해도 더 우아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더 기대

차준환이 본격적으로 피겨 팬의 관심을 받은 건 열다섯 살이던 2016년이다. 그해 3월 ISU(국제빙상연맹)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7위를 차지한 그는 2016~2017시즌 두 차례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특히 2016년 9월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선 당시 주니어 세계 최고 기록(239.47점)을 썼다. 12월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의 이 대회 메달은 2005년 김연아(당시 15세) 이후 11년 만이고, 남자 선수론 처음이었다. 피겨 팬들이 차준환을 ‘남자 김연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차준환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끈 건 브라이언 오서(캐나다) 코치다. 오서는 2010 밴쿠버올림픽에서 김연아의 금메달 조력자로 잘 알려진 지도자다. 차준환은 2015년 3월부터 오서가 있는 캐나다 토론토 크리켓 스케이팅 앤드 컬링 클럽에서 훈련하고 있다. 2014 소치올림픽 우승자 하뉴 유즈루(24·일본), 세계선수권 2회(2015~2016) 우승자 하비에르 페르난데스(27·스페인)도 차준환과 함께 오서의 지도를 받는다. 세계 정상급 선수와 같은 공간에서 배우는 건 어린 차준환에게 큰 자극이 됐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영어 공부를 했던 차준환은 이제 큰 어려움 없이 오서와 소통하고 일상생활을 한다고 한다.

지난해 1월 전국 피겨 종합선수권에서 ‘형들’을 누르고 압도적 우승을 차지한 차준환의 평창행은 무난해 보였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차준환은 작년 7월 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206.92점을 받아 3위에 그쳤다.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연습하며 고관절·발목 부상이 악화됐고 결국 실전에선 수차례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준환은 같은 해 12월 2차 선발전에서도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여러 번 실수했다.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 부츠도 골칫거리였다. 차준환은 2016년 말부터 부츠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격렬한 스케이팅과 점프 동작을 소화하려면 부츠가 발을 단단히 잡아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발목에 피로가 누적됐다. 발을 고정하기 위해 부츠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대회에 나선 적도 있었다. 차준환은 올림픽을 앞둔 이번 시즌에만 12번 부츠를 바꿨다. 매주 부츠를 갈아신은 적도 있다고 한다. 피겨 선수에게 한 몸처럼 편해야 할 부츠가 맞지 않는 건 그만큼 큰 스트레스였다.

마지막 선발전을 앞두고 차준환은 일단 부상 재활에 집중했다. 그리곤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잘 맞는 13번째 부츠를 신고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매일 꾸준한 체력 운동으로 몸을 만든 그는 역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차준환은 기존 프리스케이팅 음악인 ‘더 플래닛’ 대신 지난 시즌 좋은 성적을 안겨준 ‘일 포스티노’를 다시 쓰기로 했다. 원래 쇼트·프리에서 모두 3차례 4회전 점프를 시도했지만, 3차 선발전에선 안정적 연기로 높은 점수를 따내기 위해 한 번만 쿼드러플을 뛰었다. 올림픽 티켓을 거머쥔 차준환은 몸 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려 평창에선 본래 계획했던 세 번의 4회전 점프를 소화할 계획이다. 평창 정상을 노리는 ‘점프 기계’ 네이선 첸(19·미국)이 7차례(쇼트+프리) 쿼드러플 도전을 예고한 만큼 차준환도 경쟁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소년의 무대는 평창이 끝이 아니다. 오서 코치는 최근 “차준환이 평창올림픽에서 10위 안에 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올해 17세, 고등학교 2학년 차준환은 아직 성장 중이다. ‘피겨킹’으로 불리는 일본 하뉴 유즈루의 성장 속도와 견줘봐도 뒤지지 않는다. 하뉴는 지금의 차준환과 같은 나이였던 2011년 4대륙 선수권에서 2위에 올랐다. 하뉴는 당시 자신의 최고점(228.01)을 받았는데, 이는 현재 차준환의 ISU 공인 최고 기록(242.45)보다 낮다. 2014 소치올림픽에서 정상에 올랐을 때, 하뉴는 딱 20세였다. 차준환이 지금보다 4년 뒤인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란 기대가 큰 이유다.

차준환은 평소 자신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편이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도 ‘평창에서의 목표’를 묻는 말에 “다른 선수들이 모두 나보다 잘하는 것 같다. 목표를 높게 잡는 것도 좋지만, 실수 없이 연기한다면 좋은 결과가 따를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인터뷰마다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있다. 바로 ‘연습’이다. 안 되는 동작이 있으면 될 때까지 도전하는 연습벌레 차준환의 첫 번째 올림픽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열일곱 소년은 그 땀의 힘을 믿고, 평창에서 기적을 꿈꿀지도 모른다.

이순흥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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