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쇼트게임의 달인으로 꼽히는 고우순 프로. ⓒphoto 민학수
지금도 쇼트게임의 달인으로 꼽히는 고우순 프로. ⓒphoto 민학수

무언가 조건 없이 좋아하고 사랑하다 보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는 사실을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초창기를 개척한 이들 중 한 명이었던 고우순(54) 프로를 통해 알게 됐다.

한국에서 17승(정규투어 15승, 이벤트대회 2승), 일본에서 10승(정규투어 8승, 시니어투어 2승)을 거둔 고우순 프로의 일본프로골프협회(JLPGA) 회원 프로필 취미란에 ‘골프’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나이 서른에 일본 무대에 진출할 때 만든 프로필인데 지금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한다. 직업이 골프선수인데 취미도 골프라고?

경주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태어난 고우순이 다섯 살 때 어머니는 “너는 크면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거라”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나가사키에 사신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어디 있어요?”라고 묻자 “바다 건너에 있단다”라고 했다. ‘그럼 헤엄쳐서 가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 고우순은 시간만 나면 헤엄을 쳤다. 혼자 익힌 거지만 한 번에 몇 ㎞는 가볍게 갈 수 있는 실력과 체력을 갖게 됐고 이후 골프인생에 엄청난 자산이 됐다. 그는 169㎝, 69㎏의 다부진 체격이다.

열네 살 때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삼촌댁에 놀러 갔다 미군 파일럿들이 골프 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파란 하늘, 푸른 잔디, 하얀 공…. 넋을 잃고 보는 그에게 그들 중 한 명이 공 세 개를 선물했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풍경이 그를 평생 직업이자 취미인 골프로 이끌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삼촌에게 얻어온 3개의 클럽과 3개의 공으로 틈만 나면 공을 쳤다. 고우순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제가 골프를 시작한 후 밤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셔서 골프를 가르쳐주셨어요. ‘긴 샷도 짧은 어프로치도 퍼팅도 홀컵을 보면 공이 화가 나서 들어가지 않는단다’ 같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프로생활 하면서 퍼팅과 쇼트게임 부문은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1, 2등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훈장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손녀를 통해서 세상에 하고 싶으신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게 어머니의 해석이다.

서른여덟이던 2002년 일본여자오픈에서 그가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스물두 살의 로레나 오초아를 4타 차로 꺾고 당시 최저타 기록(14언더파)으로 우승한 것은 지금도 일본에서 전설로 남아 있다.

여전히 골프를 사랑하는 고우순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일본의 대표적인 명문클럽인 호도가야CC 회원들에게 레슨을 하는 것이다. 회원들의 요청으로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름만 대면 일본에선 누구나 알 만한 분들이지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배움을 청해요. 제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제 할아버지가 꿈에서 해주신 말씀이에요. 거리가 짧고 쉬워 보일수록 절대 머리를 들지 말고 공이 들어가는 소리를 귀로 들어야 해요. 그래야 짧은 어프로치부터 제대로 스핀이 걸려서 확실한 거리감을 갖게 됩니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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