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블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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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산휴가와 관련된 실증연구를 발표하는 경제학 교수들의 세미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세미나 자리에 참석한 교수 중 필자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출산휴가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여성이자 엄마이긴 하지만 출산휴가에 대한 질문에 필자는 “네? 아…” 정도 외에 즉시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필자는 월스트리트에 일하는 많은 여성이 그렇듯 출산휴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출산 3주 전까지 출장을 위해 비행기를 탔고, 출산 후에도 출산휴가를 쓰지 않고 일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이 8개월쯤 ‘배우자 출산휴가’를 이용했다. 물론 출산휴가가 고용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보너스 등 급여에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걱정 때문이 아니다. 엄청난 돈을 거래하고, 중요한 투자들을 놔두고 집에서 마음 편히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플로어는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男과 女’

금융, 특히 자본이 거래되는 트레이딩 플로어에 대해 월스트리트에서 ‘여성에게 힘든 곳’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여성들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월스트리트에서 술이나 골프처럼 사무실 밖에서 벌어지는 업무 이외 활동에서 여성이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희롱이다. 남성 동료나 상사에 의해 특정 여성이 성희롱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남성에게는 ‘그 정도는 장난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남성 중심 문화에서 벌어져온 관행이지만 이것이 많은 여성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플로어에서의 내 경험을 말하면 이렇다. 이직 후 첫 출근을 하면, 기존 직원 중 누군가가 “그동안 첫 출근한 사람들이 트레이딩 플로어에 있는 이들에게 점심으로 브리토(burrito)를 샀다”고 말한다. 물론 장난이다. 장난인 걸 알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트레이딩 플로어에 있는 이들에게 점심으로 브리토를 사게 된다. 또 수백 개의 책상들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날 때면 동료들이 스펀지 등을 던진다. 날아오는 스펀지를 받을 수 있으면 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그냥 날아든다.

필자의 경우 출산 후, 약 18개월 동안 유축기를 갖고 출근을 했다. 수유실에서 유축기로 모유를 짜야 했던 경험이 있다. 옆자리 동료 중 누군가가 이를 마시는 흉내를 냈던 기억도 있다. 물론 그것이 장난인 것을 알기에 적당히 받아넘겼을 정도로 나 역시 월스트리트의 남성적 문화에 동화돼 갔다.

그래서인지 내게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운 좋게도 늘 나를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동료들이 주변에 많았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들이 이 같은 일들을 소위 쿨하게, 혹은 장난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장난으로 보기에는 심한 상황도 충분히 벌어졌을 가능성 역시 없지 않다. 가령 하루 종일 거친 말을 하는 동료도 있다. 또 많은 여성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젊고 예쁜 여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경우도 있다.

남성적 문화가 강한 곳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쾌할 것 같은 월스트리트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때, 여성 직원들이 인사부와 같은 곳에 쉽게 불만을 접수할 수 있을까. 사실 쉬운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서,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월스트리트의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냐는 식으로 누군가와 비교당하기 싫어서라 한다. 그래서인지 트레이딩 플로어에는 중간관리자급 이상의 여성 임원이 거의 없다.

월스트리트에서 필자와 함께 일하던 모린 셰리(Maureen sherry)라는 여성 매니징 디렉터가 있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여성 트레이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오프닝 벨(Opening belle)’을 출간했다. 그런 모린 셰리는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첫 출근날 벌어졌던 일을 쓰기도 했다. 그가 첫 출근한 날, 동료들은 그에게 피자 박스를 줬다. 그런데 피자 박스를 열어 보니 페퍼로니피자에 페퍼로니 대신 민망한 물건이 얹어져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이직한 첫날, 또는 입사 첫날 벌어질 수 있는 해프닝 정도였을 것이다.

모린 셰리는 뉴욕 지역 신문인 뉴욕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월스트리트의 여성들이 불편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게 막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바로 Form U4라는 것이다. Form U4는 미국 금융산업규제기구(FINRA)의 문서다. 월스트리트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더들처럼, 미국에서 금융상품 거래와 관련 있는 직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직 또는 관련 회사 입사 시 반드시 작성하고 보고해야 하는 서류다. 이 Form U4를 확인하면 금융인의 경력, 그리고 상벌 사항, 법규 준수 여부 등 각종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금융사 등 회사와, 회사에 고용된 금융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 금융산업규제기구의 중재에 따라 해결하겠다는 데 동의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모린 셰리가 뉴욕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잘못 지적한 부분이 있다. 미국 금융산업규제기구의 규정이 2012년 개정되면서, 중재에 대한 것 중 성희롱과 관련된 것이 제외됐다. 더 이상 금융산업규제기구의 중재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월스트리트에서는 회사를 그만둘 때 ‘기밀 유지 서류(nondisclosure agreement)’에 동의하는 사례도 있다. 회사에 근무하며 접했던, 회사 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퇴직 후에도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거의 남성들과 많은 일을 해왔다. 필자의 경험상 무엇이 동료 등 누군가를 불쾌하게 할 만큼 잘못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을 언짢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또 그렇게 생각이 드는 언행이라면 동료에게 하려던 말이나 행동을 안 하는 게 훨씬 나은 결정이 될 것이다.

영주 닐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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