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를 판매하고 있는 한 금융사. ⓒphoto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ISA를 판매하고 있는 한 금융사. ⓒphoto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은행은 인간의 삶과 떨어져 생각하기 힘든 곳이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휴대전화 개통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했던 일이 바로 은행에 간 것이다.

전 세계 어디든 은행은 이제 저금을 하거나 대출만 하는 곳이 아니다. 보험이나 투자상품까지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난 3월 15일 은행에 들러야 할 일이 있었다. 이날은 ISA라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를 한국에서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 은행 일을 모두 처리하자, 은행원으로부터 ISA계좌를 만들라는 권유를 받았다. 소비자로서 한국의 금융상품이 궁금했고, 일을 처리해 준 은행원의 권유를 도저히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투자가 가능한 계좌라는 것을 고려할 때, 계좌를 만드는 시간이 언론에서 이야기한 것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ISA계좌를 만들면, 그 계좌를 이용해 가입해야 할 금융상품을 사야 한다. 이를 위해 ISA계좌를 만든 후 같은 은행영업점의 PB사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일단 가입부터 하고 보자?

PB 직원은 내게 간단한 질문 두 가지를 했다. 그 질문에 내가 알아서 해달라고 답하자, PB 직원은 한국의 한 보험사가 만든 보험상품 가입을 권유했다. 당시 은행 PB 직원이 권했던 상품을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매달 일정 금액을 5년간 적금처럼 통장에 넣고, 그 후 5년간 그냥 놔둔다. 그리고 10년 후에 돈을 찾을 수 있다. 만약 이 계약을 깨고 1년 후 돈을 찾아가면 보험상품임에도 원금의 20% 이상을 잃게 된다. 첫 4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험료로 냈던 원금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원금을 찾을 수 있다. 중간에 가입자가 죽으면 보험사가 가입자에게 작은 위로금 정도를 주는 보험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은행원은 이런 구조를 가진 보험상품의 연 수익률이 2.8%라고 했다. 그리곤 “연 수익률 2.8%가 상당히 높은 수익이기 때문에 보험사가 이 상품을 그만 팔려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필자에게 보험사가 더 낮은 이자율이 적용되는 새 보험상품을 며칠 안에 출시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권했던 보험상품이 없어지기 전에 빨리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은행 적금상품들의 연 이자율이 약 1.8%밖에 안 돼, 자신이 권한 보험상품이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까지 했다.

PB 직원의 보험 소개를 들으며 “정말로 이 상품이 좋은 상품이라고 생각을 하냐”고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PB 직원은 당황한 듯했지만, 자신이 권한 보험상품을 다시 적극 추천했다. 그리 좋은 상품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앞서 ISA계좌를 만들 때 친절하게 응했던 직원 생각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보험 가입을 위해 20여분 동안 여러 서류를 작성했다. 그런데 잠시 후 황당하게도 PB 직원이 은행 전산에 문제가 생겨 가입서류를 처리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결국 PB 직원이 권했던 보험상품 가입하기는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4월 1일 기준으로 한국의 10년짜리 국채 이자율은 약 1.8%다. 10년짜리 국채는 매년 2.25%의 쿠폰이자율을 지급한다. 팔고 싶을 때 아무 때나 팔 수 있다. 만약 경기부양을 더 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이자율을 좀 더 내린다면, 국채 이자율도 함께 내려갈 확률이 크다. 반면 채권 가격은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팔아서 시세차익을 올릴 수도 있다. 팔지 않는다 해도 10년을 보유해 매년 쿠폰이자를 받고 만기가 되었을 때 채권에 표시된 액면가를 돌려받을 수 있다.

특별히 계산하지 않아도, 은행 PB 직원이 권한 가입 후 4년이 지나야 해약 시 겨우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고 10년을 묵혀야만 2.8%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보험상품에 가입하는 것은 현명한 투자가 아니다.

이런 보험상품을 팔아 투자금을 모으는 보험회사는 보험을 판 돈으로 앞서 말한 국채 등 다른 투자 상품들을 사들인다. 이렇게 사들인 투자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재미있는 건 그 포트폴리오의 수익률 대부분이 국채보다 훨씬 높다. 이 수익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아마도 자산운용사와 보험사, 은행, 증권사 등 금융상품 판매사들의 수수료로 상당 부분 빠져 나갈 것이다.

미국 소비자 봉으로 만든 연금상품

한국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애초부터 고객보다는 운용사나 판매사의 수익을 위해 만들어 파는 금융상품의 문제를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융상품 기획 단계부터 투자자가 유리한 수익을 올릴 수 없도록 만들어졌음에도, 운용사와 판매사들이 각종 수수료를 가져가는 금융상품들이 팔리고 있는 예도 있다. 물론 이처럼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예는 일부다. 금융상품에서 가장 많은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대부분 매우 비싼 수수료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금상품이다.

미국에서 팔리고 있는 연금상품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의 연금상품들은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돼 있다. 물론 상당수 연금상품들이 고객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제공되는 혜택에 비해 상품을 만든 회사와 상품을 파는 사람에게 과도하게 많은 수수료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수수료 수익으로 인해 쉰 살이 넘은 미국인 중 상당수가 연금상품을 팔려는 친절하고 유쾌한 영업사원을 한번쯤은 만나게 된다.

사실 미국에서 이런 연금상품을 파는 이들이 가져가는 건 비싼 수수료 수익만이 아니다. 다른 혜택들까지 더 많이 가져가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주(州)의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상원의원이 주도한 조사에 따르면, 판매 수수료를 제한하는 법은 있지만 오히려 연금산업 자체가 이 법의 빈틈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사는 연금상품 때문에 미국인들이 매년 17억달러에 이르는 손해를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연금상품을 파는 사람들이 수익성이 좋지 못한 상품을 팔기도 하고, 매우 높게 책정된 수수료를 챙기는 것은 물론, 판매 실적에 따른 별도의 수수료까지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여기에 연금상품 판매자들이 인센티브 명목으로 비싼 관광이나 선물을 가져가는 것도 연금상품에 가입한 미국인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이유다.

미국의 예를 들었지만 한국에서도 평범한 일반인들이 매우 복잡한 금융상품에 직접 노출되고 있다.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대사회를 사는 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금융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영주 닐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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