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대만계 유안타증권과 그 뒤에 있는 중국계 중국건설은행 모습. ⓒphoto 조동진 기자
을지로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대만계 유안타증권과 그 뒤에 있는 중국계 중국건설은행 모습. ⓒphoto 조동진 기자

중국을 중심으로 대만과 홍콩 등 중화(中華)권 자본의 한국 자본시장 공습이 거세다. 거세게 진행되고 있는 중화권 자본들의 한국 자본시장 공략 전진 기지로 부상한 곳이 있다. 을지로와 명동, 무교동과 태평로 일대로 이어지는 ‘을지로-시청’ 라인이다.

을지로-시청 라인으로 중국과 대만, 홍콩, 동남아 화교 자본들이 세운 대형 금융사들이 몰려들고 있다. 특히 자본금을 기준으로 세계 최대 은행들로 급부상한 중국 국적의 주요 국영 상업은행들과 거대 보험사 역시 이곳에 대거 둥지를 틀었다. 또 대만계 증권사와 동남아 화교 소유의 은행들 역시 을지로-시청 라인에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등 중화권 자본의 한국 자본시장 진출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중화권 자본의 한국 진출은 당시 빠르게 진행되던 중국의 개혁개방 속에서, 중국 시장 진출을 꾀하던 한국 기업과 투자자들의 돈을 중국으로 옮겨 주기 위한 성격이 컸다. 한국에 대거 들어온 조선족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으로 송금해주기 위한 영업점을 낸 중국계 금융사도 있었다. 또 한국에 살고 있던 화교 자본가들의 돈을 대만, 홍콩, 동남아지역 화교 경제권으로 송금하거나 반대로 해외 화교 경제권에 있던 자금을 한국에 들여오기 위해 한국 시장에 들어온 중화권 금융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랬던 중화권 금융 자본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자본시장 진출 성격과 목적,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화교나 한국 중소사업자들을 위한 중국 송금 등 단순 금융 서비스 비중은 빠르게 줄었다. 대신 거대하게 성장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국 토종 금융사 인수에 나서는가 하면, 채권·주식·부동산 등 각종 자산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적극적 투자를 확대했다.

중화권 대형 금융 자본 9개 모여들어

그리고 2010년 이후 중국과 대만 등 중화권 자본의 본격적 한국 시장 공략이 시작됐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한국계 대형 금융사 인수에 성공한 중국과 대만 금융 자본이 등장했다. 또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빌딩들을 사들여, 웬만한 한국 토종 금융사의 본사보다 더 큰 서울 지점을 만든 중화권 금융사들까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 같은 중화권 금융 자본의 한국 금융시장 파상 공세의 중심지가 바로 ‘을지로-시청’ 라인이다.

현재 서울 중구 을지로 지역과 광화문에서 태평로로 이어지는 을지로-시청 일대에는 중국·대만은 물론 동남아 화교들 소유의 금융사들이 모여들고 있다. 중화권 금융 자본들엔 을지로-시청 일대가 사실상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인 셈이다. 이 지역에 모여든 중화권 금융 자본은 얼마나 될까. 기자의 확인 결과 중국·대만 등 중화 자본 금융사는 총 9개다.(홍콩에서 시작됐지만 실제 영국계 자본이 만들어 소유한 HSBC 제외)

자산을 기준으로 세계 1위부터 4위인 중국 4대 국영 상업은행 4곳 모두 을지로-시청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자산 기준(이하 동일) 세계 1위 ‘중국공상은행(中國工商銀行)’은 지하철 서울시청역 8번 출구 앞 태평로빌딩에 둥지를 틀고 있다. 태평로빌딩은 삼성그룹이 각 계열사들을 태평로 일대로 끌어모아 소위 삼성타운을 이뤘던 핵심 건물 중 하나다. 1993년 서울사무소를 낸 후 1997년 서울지점으로 확장하며 한국 공략을 본격화했다. 이곳을 거점으로 2002년 부산과 2005년 서울 대림동, 2012년 건국대 근처에 영업점을 여는 등 조선족 중국인과 화교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사세를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세계 2위 ‘중국건설은행(中國建設銀行)’은 한국 자본시장의 핵인 명동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또 세계 3위 ‘중국농업은행(中國農業銀行)’은 청계천 시작점 바로 옆에 서 있는 서울파이낸스센터 14층에 있다. 중국 최초의 현대식 은행으로 중국 금융의 상징으로 불리는 세계 4위 중국은행(BOC) 역시 을지로-시청 라인에 자리 잡은 대표적 중화권 금융 자본이다. 중국은행은 대형서점 영풍문고가 있고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연결된 종로의 랜드마크 영풍빌딩에 서울지점을 꾸렸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 종로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영풍빌딩의 주인은 영풍그룹이다. 하지만 이 빌딩 1~3층을 사용하는 중국은행의 기세가 건물주 영풍그룹보다 훨씬 강하다. 종각역과 청계천 사이 한자로 ‘中國銀行(중국은행)’이라고 써서 세워 놓은 거대한 입간판이 이곳이 한국 속 중화 금융자본의 중심임을 잘 보여준다.

중국 내 5위 ‘교통은행(交通銀行)’도 서울의 중심인 을지로1가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 국적의 다른 주요 국영 상업은행들보다 조금 늦은 2005년 한국에 진출해, 서울시청 근처 삼성화재본사 빌딩 6층에 서울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2016년 4월 한국에 진출해, 한국 금융시장에 얼굴을 내민 지 1년도 안 된 ‘중국광대은행(中國光大銀行)’도 있다. 광대은행 역시 서울파이낸스센터에 한국 공략 기지를 꾸렸다. 현재 금융권에서는 “후발주자로 다른 중국 상업은행들보다 규모는 작지만 한국 영업에 가장 적극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까지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고수익고위험 전략으로 한국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명동·을지로 랜드마크 먹은 중국건설은행

이 외에 중국의 대형 보험그룹 안방보험 역시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곳으로 유명하다. 과거 보고펀드 소유로, 한국 생명보험시장 8위였던 동양생명을 2015년 2월 인수했다. 지분 63%를 사는 데 무려 1조1319억원을 투자했다. 2015년 6월 한국금융위원회, 또 8월에는 중국 보험감독관리위원회가 안방보험의 동양생명 인수를 승인하며 ‘중국 국적 금융사의 첫 번째 한국 토종 금융사 인수’라는 기록을 썼다. 이 인수는 한국 금융시장에 상당한 충격을 남겼다. 어느날 갑자기 M&A를 통해 등장한 중국 보험사가 한국 생명보험시장의 약 6~7%를 차지하며 한국 금융사들을 긴장시킨 것이다. 안방보험 한국 공략은 동양생명 인수에서 끝나지 않았다. 동양생명을 사들이자마자 명동에 있던 기존 본사를 종로 청진동의 그랑서울빌딩으로 옮겼다.

안방보험의 한국 공략은 동양생명 인수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는 한국의 알리안츠생명까지 인수했다. 적자이던 알리안츠생명을 불과 35억원 정도에 손에 넣은 것으로 알려지며 헐값 인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논란에도 안방보험은 한국에서 두 번째 생명보험사를 인수한 것이다. 특히 대형 금융사를 선호하는 중국 자본답게 동양생명과 알리안츠생명을 합병해 종로나 을지로에 중국계 거대 보험사를 차리겠다는 의지가 크다는 설까지 떠돌고 있다. 이 두 보험사가 합병되면, 중국 안방보험의 한국 시장 총자산은 39조원을 넘어서 단숨에 한국 생명보험 시장 4위 사업자가 된다.

사실 중화권 자본의 한국 공략 첨병 역할을 해온 것은 중국계보다는 대만계 금융 자본이다. 유안타금융그룹이 대표적이다. 2014년 3월 과거 동양그룹의 계열사였던 동양증권을 3000억원 가까이 들여 인수했다. 이를 통해 유안타증권은 을지로2가에 지하 5층 지상 15층, 연면적 2만8024.47㎡(약 8774평)짜리 대형 본사 빌딩까지 함께 손에 넣었다. 중화권 금융사 최초로 대형 단독 본사 빌딩을 확보해 한국 공략 본부를 차린 것이다. 이 빌딩은 맞은편에 IBK기업은행, 좌측에는 전국은행연합회 빌딩과 한국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 본사, 하나금융그룹 본사가 있고, 우측에는 대신증권 본사 등을 두고 있다. 주요 금융기업 본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한가운데 있다. 한국 자본 시장의 핵심 중에서도 핵인 명동 한복판에 중화권 금융 자본의 존재를 알리는 깃발을 처음으로 꽂은 게 유안타증권이다.

싱가포르 2위 은행이자 화교 자본이 주인인 오버시차이니스은행(OCBC)도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중국과 대만, 싱가포르 국적의 9개 대형 금융 자본이 모여들며 을지로-시청 일대가 사실상 중화 금융의 한국 공략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을지로-시청 라인 중화권 자본들의 한국 공략 백미는 중국건설은행이다. 을지로와 명동 한가운데 지상 15층짜리 단독 본사를 확보한 유안타증권보다 중국건설은행의 한국 공략이 더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유안타증권은 동양증권 M&A 덕분에 명동 본사를 덤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건설은행의 을지로-명동 진출은 이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들은 명동 한복판에 대규모 땅과 건물을 직접 점찍었고, 51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땅과 본사로 쓸 대형 빌딩을 직접 사들인 것이다.

옛 중국인 활동 중심지 찾아

중국건설은행의 한국 본부는 을지로2가 185-10번지다. 원래 1991년 동양생명이 지하 5층 지상 12층, 연면적 1만1135.5㎡(약 3368평) 규모로 지어 2014년까지 본사로 썼다. 지상 12층으로 그리 높지 않은 듯하지만, 푸른색 유선형의 독특한 외관과 언덕 위에 지어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을지로2가와 명동 일대 랜드마크로 불렸다. 중국건설은행이 이곳을 전격 인수해 중국 국적의 은행 자본들 중 최초로 한국에 단독 본사 사옥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 꼭대기에 ‘中國建設銀行’이라는 한자 간판을 세웠다. 이곳이 한국에 진출한 중국 금융 자본의 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대만 등 중화권 금융 자본은 왜 명동과 태평로로 이어지는 을지로-시청 라인으로 모여들었을까. 우선 중화권 자본의 한국 영업 전략이 중요한 이유다. 중국계 은행들의 거래 상대는 한국 진출 초기만 해도 한국에 사는 화교와 중국인 노동자, 조선족 중국인 등 개인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10년 중반 이후 중국 사업 규모를 키운 기업들로 고객층이 확대됐다. 이렇게 되자 중국 시장 확대와 진출을 위한 금융 수요가 큰 주요 기업이 몰려 있는 을지로와 종로, 태평로 지역으로 중화권 금융 자본들의 영업과 투자가 확대·강화됐다. 2000년대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국과 대만계 금융 자본이 자연스럽게 영업·투자·합작 사업에 유리한 환경이 형성돼 있는 을지로-시청 라인으로 몰려든 것이다.

과거 명동 일대가 서울의 화교 자본 중심지였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지금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한국은행 맞은편 명동 일대에 일찍부터 화교 상점들이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는 중화민국(대만)대사관이 있었고 지금은 중국대사관이, 그리고 화교 교육의 중심이던 한성화교소학교까지 자리 잡고 있는 등 명동 일대는 중국인들의 한국 내 활동 중심지로 이어져왔다. 차이나타운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에서 ‘을지로-시청’ 부근이 그만큼 중국인과 중국 자본에 익숙한 지역이라는 점 역시 중화권 금융자본이 이곳으로 집중된 이유 중 하나다. 한 중화권 금융사 관계자는 “중국인들에게 낯선 한국에서 명동은 익숙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며 “더구나 한국 기업들과 금융사들 역시 이 지역을 핵심 거점으로 삼고 있는 만큼, 중국 금융 자본들 역시 자연스럽게 이 일대로 모여드는 것 같다”고 했다.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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