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그룹 본사(왼쪽)와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 청사.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그룹 본사(왼쪽)와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 청사.

롯데그룹 오너일가가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던 불법 위장계열사 한 곳이 더 드러났다. 또 이를 박근혜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인해줬다는 취지의 발언이 담긴 롯데 오너가 중 한 명의 음성파일을 주간조선이 단독 입수했다.

주간조선이 확보한 음성파일에는 박근혜 정부 당시 공정위가 롯데 오너일가 중 누군가와 ‘협상’을 했다는 내용과 발언도 등장한다. 공정위가 재벌인 롯데그룹 오너가의 위법 행위를 묵인해준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혹도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다.

롯데그룹 차명 위장계열사를 소유·운영하며, 이를 두고 “공정위와 협상해놓았다”고 실토한 음성파일 속 인물은 양성욱(47)씨다. 양씨는 롯데장학재단과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75)씨의 둘째 사위다. 신씨는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총괄회장의 맏딸로 그동안 롯데면세점과 롯데백화점, 롯데호텔 경영과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현재 신씨는 롯데백화점·롯데면세점 입점 대가로 수십억원대 자금을 챙기고, 또 회삿돈 수십억원을 빼돌린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지난 1월, 1심 법원은 신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현재 신씨는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에게서 롯데 주식을 넘겨받고 이를 숨기는 방법으로 수백억원대 증여세 납부를 고의 회피하는 등 조세포탈 혐의도 드러나 추가 재판까지 받고 있다.

이 신영자씨의 차녀 장선윤 호텔롯데 전무의 남편이 바로 양성욱씨다. 양씨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외손녀 사위이며 한국과 일본, 양국 롯데그룹 경영권을 모두 장악한 신동빈 회장에게는 조카사위다.

신영자 사위가 숨겨둔 차명 위장계열사

양씨는 2011년 브이앤라이프(V&Life)라는 수입품 판매회사를 만들어 2012년 초까지 롯데그룹 최대 계열사인 롯데쇼핑이 운영하는 대형할인점 롯데마트와 내부거래를 하며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 2012년 주간조선 취재로 정체가 불분명했던 브이앤라이프가 ‘롯데 오너가의 특수관계인이 소유한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보도 후 양씨는 브이앤라이프 지분 전부를 다른 사람들의 명의로 바꿔 불법 차명 위장계열사로 더 은밀하게 소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최근 주간조선 취재로 새롭게 밝혀졌다.

양성욱씨가 “롯데그룹 차명 위장계열사의 존재를 박근혜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알고 있었고” 심지어 “공정위와 협상까지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2015년 2월이다. 양씨가 차명으로 소유한 브이앤라이프의 지분 일부를 팔기 위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한 영업점에서 만난 A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 같은 발언들이 나왔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음성파일에는 브이앤라이프 지분 매입자 A씨와 양씨가 나눈 두 시간 반가량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의 대화 중 차명 위장계열사와 공정위 관련 양씨의 발언들은 4분20여초가량 이어진다. 다음은 대화 내용 일부다.

양성욱: 우리나라의 공정위에서 정한 건데, 비상장회사는 재벌가 지분이 20% 이하여야…. 제가 하는 회사(브이앤라이프) 제 지분 20%부터는 롯데에 편입을 해야 된다. 롯데로 편입하면 불편한 점이 굉장히 많다.

A씨: 그렇지요.

양성욱: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지금 우리 회사(브이앤라이프) 경우는 차명으로 돌려놨다. 그것도(자신이 브이앤라이프를 차명으로 소유·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공정위랑은 이야기를 해놓았는데 차명으로….

A씨: 그렇죠.

양성욱: 어차피 (공정위에 위장계열사 차명 소유) 얘기는 하고 네고(negotiation·협상)는 해놓은 상태.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가…. ‘재벌가들이 사업을 확장하면 안 된다’는 그런 분위기. 그래서 공정위 쪽에서… 청와대도 그렇고, 저한테 명령을 내렸고….

이 대화 속 양성욱씨의 말대로라면 공정위는 양씨가 브이앤라이프라는 회사를 차명 보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양씨는 분명하게 “차명으로 돌려놨다”고 한 후 “그것도 공정위랑은 이야기를 해놓았는데”라고 말했다. 자신이 브이앤라이프를 차명으로 전환해 불법으로 소유·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정위에 “이야기를 해놓았다”는 의미다.

더욱이 “(롯데그룹 차명 위장계열사 소유를) 얘기는 하고 네고는 해놓은 상태”라고까지 말한다. 음성파일 속 양씨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2015년 2월 기준 최소 3년 이상 차명으로 불법 소유·운영해온 롯데그룹 차명 위장계열사를 두고 공정위와 모종의 ‘협상’까지 마쳤다는 뜻이 된다.

“네고 해놓은 상태” 실토

재벌과 그 오너일가가 만들어 운영하는 위장계열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불법이다. 특히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동원한 ‘차명 위장계열사’는 공정거래법은 물론 금융실명제법까지 정면으로 위반한 심각한 범죄로 규정돼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과 그 오너일가의 위장계열사, 특히 차명 위장계열사의 존재를 인지하면 반드시 관련 사안을 조사해 시정 요구와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법 위반 여부에 따라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 공정위가 위장계열사나 차명 위장계열사의 소유자, 해당 재벌그룹이나 재벌 오너일가 등과 위장계열사를 두고 ‘협상’을 하거나 ‘거래’ 행위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정위 관계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한 답을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위장계열사나 차명 위장계열사를 두고 관련 재벌기업이나 그 오너일가와 ‘네고(협상)’를 하는 건 명확히 비위(非違)고 불법 행위”라며 “공정위의 업무 절차에 그런 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양성욱씨는 2015년 2월 “공정위랑은 이야기를 해놓았다” “얘기는 하고 네고(협상)는 해놓은 상태”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양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부 그릇된 재벌들의 탈법과 불공정 행위를 찾아내 조치를 취해야 하는 공정위가 롯데 오너일가인 양씨와 했다는 ‘네고(협상)’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양씨 발언의 진위 여부를 반드시 밝혀야 하는 까닭이다. 검찰 등 사법기관의 수사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2015년 2월 양씨가 쏟아낸 말들의 심각성과 맥락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이앤라이프가 만들어져 운영됐던 과정, 또 양씨가 이 회사를 차명으로 소유하게 되는 과정 등을 살펴봐야 한다. 양씨는 2011년 9월 브이앤라이프를 만들어 2012년까지 자신의 부인인 장선윤 롯데호텔 전무가 소유하고 있던 ‘블리스’라는 회사와 같은 사무실에서 사실상 함께 운영했다. 블리스는 프랑스 빵집 브랜드 ‘포숑(Fauchon)’을 운영하던 롯데그룹 편입 계열사였다. 브이앤라이프는 당시 독일제 물티슈를 수입해 롯데마트를 통해 팔았다. 롯데그룹과 내부거래를 벌여 매출을 올렸다는 의미다.

위장계열사에서 차명 위장계열사로

주간조선은 2012년 ‘롯데家 3세 사위의 회사는 위장계열사?’라는 기사를 통해, 양성욱씨가 2011년 9월 만든 ‘브이앤라이프’가 롯데그룹 위장계열사이며, 롯데그룹 최대 계열사인 롯데쇼핑이 롯데마트를 동원해 이 회사의 매출을 올려준 사실들을 고발했다. 이 보도 후 양성욱씨 측은 측근을 통해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브이앤라이프 지분을 넘겼다”며 “이 회사 지분을 더는 갖고 있는 게 없고, 이제 운영에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런데 앞서 음성파일의 대화에서 보듯 2012년 양씨 측이 기자에게 알려온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양씨는 당시 위장계열사이던 브이앤라이프 지분을 자신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 명의, 즉 차명으로 바꿔 소유하며 브이앤라이프를 계속 운영해온 것이다. 서류상 자신과는 관계없는 회사처럼 만들어 더 은밀하게 위장계열사를 소유한 셈이다.

2015년 2월 양씨가 차명 보유하던 브이앤라이프의 지분 중 일부를 팔겠다고 나서며 이 같은 사실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앞서 설명한 대로 양씨는 차명으로 보유한 지분 일부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지분 매입자 A씨에게 브이앤라이프의 소유 관계를 설명했다.

특히 “그것도 공정위랑은 이야기를 해놓았는데” 또 “(공정위에) 얘기는 하고 네고(협상)는 해놓은 상태”라는 말까지 거침없이 했다.

기자는 음성파일에 등장하는 “차명” “공정위” 발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양성욱씨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일단 양성욱씨에게 “브이앤라이프라는 회사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양씨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양씨에게 “(2015년 초 당시 A씨와의 대화에서) 왜 공정거래위원회와 청와대를 언급했느냐”고 묻자 아무런 답도 없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후 양씨는 기자에게 “6월 14일, 수요일에 연락을 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기자는 기사 마감까지 양성욱씨의 해명을 듣기 위해 20차례 이상 연락을 취했으나 약속과 달리 양씨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양씨가 ‘공정거래위원회’와 ‘청와대’를 왜 언급했느냐는 부분이다. 양씨가 입 밖으로 꺼낸 권력기관들이 당시 양씨의 차명 위장계열사 소유·운영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취지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가 확인되어야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 결정을 누가 내렸고, 왜 그랬는지 밝혀져야 한다. 또 불법 차명 위장계열사를 두고 협상까지 했다면 이 역시 누가 그런 결정을 했고, 그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져야 한다.

공정위에서 재벌기업과 그 오너일가의 숨겨둔 위장계열사 업무를 담당하는 곳은 경쟁정책국의 기업집단과다. 이곳은 재벌기업과 오너일가의 위장계열사가 드러나면 해당 재벌그룹과 실소유주, 재벌그룹 동일인(사실상 그룹 총수)에 대해 시정 요구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 차명 소유·운영 같은 명확한 불법 행위가 확인되면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

실제 공정위 경쟁정책국 기업집단과는 롯데그룹 오너일가 소유의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를 검찰에 고발한 전례가 있다. 노골적인 일감몰아주기 문제를 일으킨 유기개발과 유니플렉스 등 4곳을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로 규정해 2016년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위 기업집단과가 검찰에 고발한 롯데그룹 위장계열사 4곳은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 또 신 총괄회장과 서미경씨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이 실소유주다. 롯데그룹 계열사들과 내부거래로 돈을 번 것으로 드러난 곳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측도 기자에게 “공정위가 2015년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로 (규정해) 조치를 취한 게 있다”며 “유니플렉스와 유기개발 등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와 딸이) 소유·운영하는 위장계열사 4개를 검찰 고발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음성파일 속 양성욱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이 시기에 대한 의혹과 궁금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서미경·신유미씨의 지분 소유가 드러난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들은 검찰에 고발된 반면, 비슷한 시기 롯데그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영자씨의 사위인 양성욱씨가 차명으로 소유·운영하던 롯데그룹 차명 위장계열사 브이앤라이프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공정위 측에 “서미경씨 모자(母子) 소유 4개 롯데그룹 위장계열사 이외에 신영자·신동빈씨나 다른 롯데그룹 오너일가가 소유한 위장계열사 혹은 차명 위장계열사의 존재를 공정위가 파악했거나 조치를 취한 게 있는지” 물었다. 공정위 관계자는 “2015년 서미경씨 소유 4개 위장계열사 외에 공정위가 파악하거나 처리한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는 모른다”고 했다.

이후 기자는 확보한 녹음파일에 등장하는 양성욱씨 발언을 그대로 알려준 뒤 공정위 측에 해당 내용을 다시 물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당시 사안은 (양씨가 롯데그룹 위장계열사를 차명으로 불법 소유한 사실을 알면서도 공정위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거나 네고를 했다는)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이다”라며 “지금 상황에서 공정위가 확인해줄 수 있는 내용은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당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말을 들어 보니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고 했다”며 “만약 (양씨가 말한 내용이 맞고) 그렇다면 (공정위의) 비위이고, 문제가 있는 불법 행위다. (공정위의) 업무 처리가 그런 식으로 되기 어렵다는 게 지금 확인해줄 수 있는 전부”라고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양성욱씨 발언이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긴 어려울 것 같다”고도 했다.

법으로 본 위장계열사와 차명 위장계열사

공정거래법과 상법, 세법 등은 재벌그룹과 그 오너들의 위장계열사 운영, 불공정거래, 조세포탈, 사기 등을 막기 위해 반드시 신고하고 밝혀야 하는 특수관계인의 범위를 철저히 규정하고 있다. 법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통상 △8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등 친족 △배우자 △계열사의 이사·감사 등 임직원과 재벌 관련 비영리법인(학교, 병원, 공익재단) 등을 특수관계인으로 명시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양성욱씨가 법적으로 롯데그룹 오너일가의 특수관계인이 분명하다”고 확인해줬다. 그럼 ‘위장계열사’란 무엇일까. 위장계열사란 재벌기업과 오너 등 특수관계인이 외형상 재벌그룹의 계열사가 아닌 것처럼 몰래 숨겨 운영하는 불법 기업을 뜻한다. 차명 위장계열사는 재벌기업, 오너 등의 특수관계인이 위장계열사의 지분을 실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공식 문서상 자신의 명의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명의(차명 혹은 가명)로 바꿔놓은 것이다. 위장계열사도 불법이지만 차명 위장계열사는 금융실명제법 등 다른 법들까지 정면으로 무시한 것으로 더욱 심각한 기업 범죄로 규정돼 있다.

관련 법들은 통상 특수관계인이 △자신의 단독 지분은 물론 계열사가 보유한 지분까지 합쳐 3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 최다 출자자(최대주주)로 있는 기업 △지분율과 상관없이 경영(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반드시 특수관계인의 모(母)그룹 계열(사)로 편입시켜 공정위에 신고하고 알리게끔 하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은 기업은 모두 위장계열사이다.

조동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