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제1차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제1차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10일 경북 포항시 남구 포항공과대학교 동문 앞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 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정면의 흰 벽면에 영어로 ‘바이오앱’이라고 쓰인 로고가 눈에 띄었다. 로고 앞 환하게 밝혀진 불빛 아래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플라스크에 스포이드로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직원이 보였다. 안쪽에 있는 사무실을 둘러보니 직원 대여섯 명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검은색 보드마카로 글자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바이오앱은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가 유망기업 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한 스타트업이다. 식물 단백질로 돼지열병 백신을 제조하는 것이 주 사업이다. 핵심기술을 개발한 손은주 포항공대 연구교수가 2011년 창업했다. 현재 직원 수는 20명. 그동안 6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내년 첫 매출을 기대하는 상태다. 10월 내로 포항의 테크노파크(TP) 부지에 공장을 설립하고 제품을 양산할 예정이다.

바이오앱이 현재까지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근혜 정부 당시 만들어진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의 도움이 컸다. 수익 없이 기술을 개발하던 초기 단계에 포항센터로부터 R&D 비용으로 8억7000만원을 투자받았다. 연구시설까지 제공받으면서 시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바이오앱 6층 휴게실에서 만난 손은주(48) 바이오앱 대표이사의 말이다. “운이 좋았어요. 제가 포항공대에서 개발했던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을 했고, 마침 포항센터에서 적시에 투자를 해주시면서 여러 단계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었죠. 저희가 연구실에서 만든 데이터를 믿어주시고, 실증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를 제공해주신 게 컸죠. 그걸 기반으로 해서 구상하는 것이 실제로 나올 수 있었고 추가 투자도 받을 수 있었어요.”

혁신성장 어디로 향할까

기자가 포항센터를 찾은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경제 전략으로 들고나온 ‘혁신성장’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11일 서울 마포구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1차 회의에서 “혁신성장은 소득주도 성장과 함께 새로운 경제성장을 위한 새 정부의 핵심 전략”이라며 “혁신적인 창업과 신산업 창출이 이어지는 활력 넘치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정부는 10월 중 ‘혁신창업 생태계 조성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꺼내들면서 새삼 주목받는 대상이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창조경제혁신센터다. 혁신성장이나 창조경제 모두 ‘창업’과 ‘스타트업 지원’을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기업이 지원하는 스타트업의 요람이라는 구도로 출범한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해 10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유탄을 맞은 것이 사실. 창조경제혁신센터 지역 선정과 건립 과정에 ‘국정농단 세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자체의 재정적 지원이 줄었고 대기업의 지원 규모도 급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혁신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당시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들이 출자해 전국 19곳(포스코와 한전이 운영하는 민간자율운영센터 2곳 포함)에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설립됐는데 민간자율운영센터 2개를 제외한 전국 17개 센터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정부가 투여한 자금은 543억4700만원에 이른다. 올해는 더 늘어 590억4400만원이 배정된 상태다.

반면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은 중소벤처기업부와 민간위원회인 4차산업혁명위가 쌍두마차 역할을 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중소기업청을 중기부로 격상시켰고, 장병규 블루홀 이사회 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앞으로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중심 혁신을 장려하되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달리 중소기업 위주로 정책을 풀어간다는 계획이다.

기자가 방문한 포항센터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성장의 방향을 엿보기에도 적합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대표적 산업체인 포스코와 공학교육의 메카인 포항공대가 협력을 해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혁신성장의 ‘전도사’로 통하는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지난 9월 22일 방문했던 미국 뉴욕의 코넬테크도 뉴욕시와 코넬대가 협력해 만든 창업 중심 공과대학원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김 부총리는 코넬테크를 방문한 후 “혁신 성장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업·대학에서의 창업 활성화, 현장에서의 기업 간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필수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산·학 합동 연구가 활발한 곳으로는 포항센터와 함께 대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안에 있는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도 꼽히지만 포항센터는 근처에 산업단지가 있어 테스트베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전센터와 차별화된다. 장영균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 사무국장은 “포항센터 주변에는 산업단지가 13곳 있다”며 “포항센터와 마찬가지로 우수 대학에 입지해 대학발 창업에 유리한 대전센터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테스트베드는 상용화 전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기술 기반 스타트업의 창업에 중요한 요소다.

현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을 좌우하는 수뇌부 중 포항공대 출신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포항공대 1기 졸업생 출신인 문미옥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은 초대 중기부 장관 후보자였다 낙마한 박성진 포항공대 교수와 학부 동기다. 1987년 첫 신입생을 받은 포항공대 출신 중 아직까지 장관급 자리에 오른 인사는 없다.

그렇다면 스타트업 관련 정책을 현장에서 접하는 포항센터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과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10월 11일 포스텍기술지주의 서울창업보육센터에 모인 스타트업 대표들. 센터에 입주해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0월 11일 포스텍기술지주의 서울창업보육센터에 모인 스타트업 대표들. 센터에 입주해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살리나

“창조경제냐 혁신성장이냐 문구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젠다를 만드는 사람도 실행방안은 별반 다르지 않을 거고요. 구호보다는 벤처기업을 살리는 경험을 누적시키는 게 중요하겠죠. 실리콘밸리도 실제 일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돼서 잘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 정권에서 잘못한 게 있으면 고쳐야겠지만. 잘한 게 있으면 더 활성화해야겠죠. 창조경제 전부터도 벤처기업 창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잖아요.”

프로세스 마이닝 기반 데이터분석 솔루션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인 ㈜퍼즐데이터 김영일(49) 대표는 창조경제냐, 혁신성장이냐는 구호보다는 “장기적 안목을 갖고 정부가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로세스 마이닝은 업무 과정을 기록한 데이터에서 원하는 정보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김 대표는 2015년 6월 퍼즐데이터를 창업했고 2년간 솔루션을 개발해 현재 판매를 앞두고 있다.

포항센터에서 만난 창업자들 중에는 문재인 정부에서 ‘혁신’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탈리아 수제구두를 직거래하는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인 ‘제누이오’의 성율덕(34) 대표는 “창조경제와 비교했을 때 혁신성장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창조경제는 너무 모호해 무슨 말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며 “혁신성장이라는 구호에는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창업한 성 대표는 “정부로부터 아직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2015년 초 포항센터에 입주한 이욱(59) HRMR 실장은 창업 초기 단계에 포항센터에서 받은 도움이 컸다고 회고했다. “창업하기 3개월 전에 센터에 입주했는데 센터가 소개해준 컨설팅 전문가의 조언을 받고 사업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 광산을 확보하고 탄탈륨을 어떻게 생산할지는 알았는데 이걸 어떻게 사업화하고 매출로 연결할지, 시장성을 갖출지가 문제였죠. 센터에서 연결해준 멘토들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또 행사나 전시회 등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받은 것도 도움이 됐고요. 저희 소재는 전기 전자나 국방 무기류에 많이 쓰이는데 관련 행사들에 센터의 지원을 받아서 참석했습니다.” HRMR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탄탈륨을 국산화하는 스타트업이다. 탄탈륨은 스마트폰, 전자제품, 군사장비, 항공, 자동차 등 첨단 제품에 들어가는 자원이다.

바이오앱 직원들이 백신 원료가 되는 식물을 관리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바이오앱 직원들이 백신 원료가 되는 식물을 관리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혁신성장이 담아야 할 것들

스타트업 대표들은 무엇보다 ‘중소기업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혁신성장의 의도를 긍정적으로 봤다. 안과 의료기기와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스타트업인 아이피아 이지형(35) 대표는 “개발하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테스트할 수 있도록 초기 규제를 약하게 한다는 것은 좋은 취지라고 생각한다”며 “의료 분야의 경우 의료정보보호법이 강화돼 테스트 환경을 찾고 구축하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혁신성장 정책이 중소·중견 기업의 눈높이에 맞춰 지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것 같다”고 했다. 이 대표는 관련 기술로 2건의 특허를 가지고 있고, 2건을 추가로 출원했다. 지난 3월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벤처기업확인서를 받았다.

현재까지 총론만 공개된 혁신성장의 각론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야 할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스타트업 대표들은 첫째로 자금지원 문제를 꼽았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초기에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호소가 여럿 있었다.

“창업하고 나서 2년간 기술을 개발하면서 특허를 2건 냈어요. 3년 차에 들어서면서 일본 업체와 큰 계약 건이 생겼는데, 5억원 정도의 계약금이 없어서 도장을 못 찍은 일이 있었어요. 국가 지원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절차가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정부가 스타트업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가는 건지 의아했죠. 결국 해당 업체와 계약은 포기해야만 했어요.”

이욱 HRMR 실장의 말이다. 제누이오의 성율덕 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다.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그는 패션과 IT를 접목해 패션을 혁신한다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지만 기술개발 스타트업에 밀려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는 “창업할 때 현금이 아니더라도 마케팅 공간 정도만 지원받으려 했는데 혁신센터가 기술개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스타트업을 우선으로 지원해서 밀렸다”고 했다.

김영일 퍼즐데이터 대표는 민간 투자사와는 달라야 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민간 투자사는 원천기술의 가능성을 보는 것보다는 시장성, 실제 돈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초기제품이 가진 기술력은 시장성보다는 기술력 자체를 의미해요. 우선 기초기술이 어느 정도 활성화돼야 하고, 시장성으로 전환되는 것은 다음 단계죠. 이 측면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부에서 혁신센터에 자금을 지원하는 만큼 공적 자금이 지원되는 건데, 민간과 달리 공공은 기술 자체의 장래성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기술 기반 스타트업의 경우 수익을 내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이 기간 자금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기술개발을 위해 인재를 모으고 기술을 기획해야 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손은주 바이오앱 대표는 “연구소 수준에서 실제 기업의 형태를 갖춰가는 중간단계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 단계가 저희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시기인데, 창조센터나 기업지원센터 대부분 자기들이 주고 싶은 걸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업에서 필요한 걸 필요할 때 줘야 하는데 말이죠. 당장 이번달 혹은 늦어도 다음 달에 지원이 꼭 필요한데 예산 등의 이유로 ‘내년 이맘때 다시 오십시오’ 하는 식이죠. 정치권에서 늘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아요. 저희끼리 많이 하는 얘기지만 ‘행정 편의적’으로 지원이 이뤄진다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중기부 장관 청문회에서 낙마한 박성진 포항공대 교수를 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청와대가 초대 중기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박성진 교수는 벤처기업을 직접 설립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다. 또 포항공대 출신 창업자들이 만든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포항공대가 출자한 회사인 포스텍기술지주를 설립하고 운영해온 대표이기도 하다. 포스텍기술지주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박 교수는 직접 창업과 투자를 경험해 현장에서 어떤 점이 어렵고 절실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라며 “청문회 당시 방송만 보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편집당했는데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와대도 박 교수를 후보로 지명할 당시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텍기술지주 관계자는 “(박 교수는) 현재 포스텍기술지주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학내 보직을 그만둔 상태”라고 했다.

배용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