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현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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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플라흐 박사는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복잡계이론물리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독일 드레스덴 출신으로 동독에서 성장했고, 1989년 드레스덴공대에서 이론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덕의 과학자 취재를 위해 IBS에 연구자 추천을 요청했을 때 IBS 측은 “외국인 과학자가 많다”며 그중 한 명을 만나보길 권했다. 나는 흥미롭겠다 싶어 응했다. 문제는 그가 ‘복잡계’ 연구자라는 점이다. 복잡계 물리학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플라흐 박사 연구 관련 자료를 받아 읽어 보니 외계어 같았다.

“플라흐 단장의 빅 퀘스천(Big Question)은 ‘빅 에르고딕 금속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이를 위해 어떤 대칭들이 있어, 이 물질이 어떻게 양자컴퓨팅 분야에 혁명을 가져올 것인가?’이다. 양자컴퓨팅 분야에 응용될 수 있는 신물질 후보를 예측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 걸 큰 목표로 삼고 있다.”

플라흐 단장을 만나기 전에 그의 연구에 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홍보실에 부탁해 플라흐 단장과 같이 일하는 한국인 연구자를 소개받았다.

4월 17일 플라흐 단장 인터뷰 한 시간 전 고아라 박사를 찾아갔다. 고 박사는 플라흐 단장의 연구 분야인 ‘빅 에르고딕 금속’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빅’도 알고 ‘에르고딕’도 알고 ‘금속’도 압니다만, 그것들을 붙여놓은 ‘빅 에르고딕 금속’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난감했다. 그래서 ‘그러면 에르고딕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런 설명이 돌아왔다. “에르고딕은 시스템의 성질 같은 것이다. 충분한 시간 오래 기다리면 어느 양자 상태에 있던 시스템이 모든 상태(state)를 거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걸 에르고딕하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말 듯하다. 플라흐 단장 취재 시간이 임박했다. 그래서 “플라흐 단장은 한마디로 무엇을 연구하는 학자인가” 묻자 고 박사는 “복잡계 연구자”라고 답했다. “복잡계는 범위가 넓고, 응용 분야도 넓다. 복잡계는 물리적 성질이 개별 성질을 이해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 즉 개인을 안다 해도 집단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영어로 ‘more is different’라는 말이 있다. P. W. 앤더슨(1977년 노벨물리학상)이 한 말이다. ‘많으면 다르다’라는 뜻이다. 숫자가 많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창발(emergence)이라고 한다. 창발현상이 나타나는 계가 복잡계다.”

복잡계 연구는 새로운 보편성 발견이 목적

고 박사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설명이 조금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복잡계 연구자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라고 묻자 고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현상이라도 핵심 사항이 같으면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복잡계 연구자가 하려는 일 중 하나는 새로운 보편성의 발견이다.”

세르게이 플라흐 단장은 키가 크고 호남(好男)형이었다. 50대 중반이다. 그는 복잡계물리학이 무엇인가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복잡계는 연구 대상이 아니라 개념을 설명하는 용어”라고 강조했다. “입자가 1023개 있는 게 아보가드로 수(6.02214076×1023)라고 한다. 100만 곱하기 100만 곱하기, 100만 곱하기, 100만 곱하기보다 큰 수다. 하지만 그 수는 작은 사물 안에 들어있는 원자 수보다 적다. 이 많은 수의 실체(entity)가 상호작용한다. 그런데 이들로 이뤄진 시스템이 특정 지점에서 기존과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 행동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의 새로운 상(phase)은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우주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복잡계물리학 연구자는 이걸 연구하고, 이런 걸 찾고 있다.”

그는 전자와 광자의 예를 들었다. 전자가 집단을 이루면 낱개일 때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행동, 즉 구리선을 타고 흐르는 전기가 된다는 것이다. 광자라는 빛 알갱이도 대거 상호작용하면 빛이라는 광자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난다.

플라흐 단장은 IBS연구단 리더로서 자기 역할을 더 말하고 싶어했다. 그는 3년 전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한국IBS로 옮겨 올 때 “주변에서 왜 가느냐. IBS가 뭐냐고 물었다”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IBS는 내겐 독특한 기회였다. 센터를 세울 수 있지 않았느냐. 과학계에 오래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고, 재정 지원도 좋았다.”

그는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18년간 일했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독일의 대표적인 기초과학연구기관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에 대해 “응용과학은 세계적 수준이나, 기초과학은 기름진 토양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한국이 빨리 효과적으로 세계 수준에 이르게 하기 위해 최고의 젊은 과학자를 IBS가 고용하는 게 한 방법”이라며 “영구 고용하지 않더라도 와서 배우게 하고, 그런 뒤 흩어지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좋은 플라흐 단장은 외국 연구자들을 IBS에 일정 기간 와서 연구하게 하고 토론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복잡계이론물리연구단은 현재 집중적인 방문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개인 방문자, 기관 방문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 연구자 방문 프로그램 주도

그에 따르면 현재 1년에 50명 정도의 방문 연구자를 받고 있고 국제워크숍 개최도 올해 5번 계획하고 있다. “워크숍 주제와 학자 참여 유도가 중요하다. 주제가 흥미로우면 외국의 좋은 학자가 관심을 보이고 한국에 온다. 그들과의 토론과 상호작용 속에서 자극받고 연구의 아이디어를 얻고 하는 게 국제 교류의 장점이다.”

사실 복잡계이론물리연구단 자체가 다국적군이다. 연구위원만 8개 국적을 갖고 있다. 독일 1명, 한국 7명, 인도 4명, 러시아 3명, 이탈리아 1명, 호주 1명, 폴란드 1명, 필리핀 1명, 중국 1명 등이다. 그는 “세계과학지도에 IBS 위치가 표시되고 있다”면서 “질적 향상이 빨리 이뤄지고 있어 2~3년 안에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비교했을 때 IBS는 정부기관이라서 불편한 점이 있다고 했다. 방문연구자 한 명을 초청하는 데도 IBS 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 “독일 정부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 돈을 주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소장이 방문연구자를 초청하고 싶으면 그에게 편지를 보내면 된다. IBS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불편하고 문제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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