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당시 그리스 정부와 채권단의 구제 금융 협상은 결렬 직전까지 몰렸다.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은 같은 해 6월 2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회의를 가진 뒤 “지난 2월 20일 이후 그리스 정부와 구제금융 협상을 해왔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리스 정부는 채권단의 제안을 거부했고 6월 26일 일방적으로 협상을 중단했다”고 발표했다.

유로그룹의 발표가 있기 전부터 암울한 결말로 치달을 걸 우려한 그리스 국민들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리스 전역의 현금인출기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하루에만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이 14억유로에 이르렀다. 우리 돈으로 1조8000억원에 이르는 거금이 하루에 은행에서 빠져나갈 정도로 금융 시스템은 패닉에 빠졌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리스 정부는 자본 규제에 나섰다. 6월 29일 은행의 창구 업무를 먼저 중단시켰고, 출금액에 상한선을 뒀다. 현금인출기 출금은 하루 60유로, 일주일 420유로를 넘지 못하게 했고 해외 송금도 막았다.

당시 그리스의 금융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암호화폐의 거래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 유럽에 본사를 둔 암호화폐 거래소 일부에서는 대표적 암호화폐였던 비트코인 거래량이 증가했다. 예컨대 영국 런던에 위치한 ‘Vaultoro.com’의 경우 거래량이 124%나 증가했는데, 트래픽 소스를 분석해보니 대부분 그리스 IP였다. 온라인커뮤니티 ‘레딧’에 등장한 ‘How to buy Bitcoin in Greece(그리스에서 비트코인을 사는 법)’라는 스레드에는 순식간에 100개 이상의 댓글이 붙으며 관심이 폭발했다. 그리스 금융위기와 맞물려 비트코인의 시세도 움직여 2주 동안 가격이 약 10% 정도 상승했다. 비트코인이 1BTC에 250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3년 전 이야기를 지금 끄집어낸 건 금융시장의 혼란과 암호화폐의 상승이라는 인과관계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유로존의 세 번째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에서 최근 금융위기 조짐이 나타나자 암호화폐 시장에서 3년 전 그리스 사태 당시와 비슷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 금융위기 때도 비트코인 상승세

지난 5월 29일 이탈리아의 국채 가격이 한때 급락하며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세계 각국의 증시도 동반 하락했다. 이번 이탈리아발(發) 쇼크는 정국 혼란이 초래한 면이 컸다. 지난 3월 총선을 치른 이탈리아에서는 반체제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정당인 ‘동맹’의 연합정부가 출범을 앞두며 두 달여의 무정부 상태를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양당에서 추천한 파올로 사보나 재무장관 후보자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사보나 후보자가 대표적인 반(反)유로존 인사라는 이유를 들어 지명을 거부했다. 오성운동과 동맹은 이런 결정을 반대하며 대통령 탄핵을 언급했고 재선거를 주장했다.

재선거가 치러진다면, 최악의 경우 유럽연합(EU)과 유로존을 반대하는 이탈리아 정부가 들어설 수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처럼 이탈리아가 ‘이탈렉시트(Italexit·이탈리아의 EU 탈퇴)’를 단행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비극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이번 금융쇼크를 가져왔다. 이탈렉시트 가능성을 걱정한 투자자들은 이탈리아 국채와 유로화를 매도하고, 대신 미국 국채와 일본 엔화 등 안전 자산을 사들였다.

그런데 기존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지자 이번에도 암호화폐 시장이 상승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전 세계 암호화폐 시장의 시가 총액은 지난 5월 29일 3031억달러의 저가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쇼크가 영향을 끼친 오후에는 3273억달러까지 치솟았다. 특히 시가총액 상위 10위 내에 자리한 암호화폐들은 24시간 동안 5~20% 상승했다. 한국 시각으로 5월 29일 오전 7시께 비트코인은 7100달러를 기록하며 7000달러 선 붕괴를 걱정했지만 하루 뒤인 5월 30일 오전 7시께는 7500달러대에 도달했다.

이탈리아 국채 출렁이자 암호화폐 상승

3년 전 그리스 사태에 이어 이번에도 기존 금융시장의 위기와 암호화폐의 상승이 맞물려 돌아가자 둘 사이의 연관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 채무 문제가 비트코인 가격을 끌어올린 것처럼 이탈리아의 정치 혼란과 금융쇼크가 또다시 암호화폐 상승장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2년 전인 2016년 6월 브렉시트가 발생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었다고 지적한다. 암호화폐 전문매체 코인데스크에 따르면, 당시 EU 잔류파의 승리가 점쳐지던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 당일, 비트코인은 553달러에 거래됐지만 막상 탈퇴가 결정된 24일 오후에는 756달러에 거래되면서 20% 이상 폭등했다. 파운드화와 유로화의 가치 하락을 우려한 자금 중 달러화나 엔화로 미처 도피하지 못한 매수자금이 비트코인으로 몰렸거나 몰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영국의 EU 탈퇴 우려 및 중국 경제에 대한 불안 등으로 위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국경이 없는 암호화폐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며 비트코인이 일종의 헤징(hedging)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시장분석기업 펀드스트랫(Fundstrat)의 설립자 톰 리는 “이탈리아 위기를 둘러싼 이런 움직임은 암호화폐가 안전자산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걸 뜻한다”며 이탈리아발 암호화폐 시장의 상승세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투자자문사인 에쿼티아머인베스트먼트의 브라이언 스터트랜드 CEO도 지난 5월 29일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VIX지수와 최근 30거래일의 비트코인 가격에는 큰 상관성이 보인다. 시장의 신용 위험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VIX지수는 일명 ‘공포지수’로, 투자자들의 투자심리를 나타낸다.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 상장된 S&P500 지수옵션의 향후 30일간의 변동성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보여주는데 VIX지수가 높아지면 투자자들의 불안이 커진다는 뜻이고 주식시장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탈렉시트 우려가 커지던 5월 29일 VIX지수는 최근 한 달 새 가장 높았다.

물론 이들의 말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가상화폐 시장의 움직임이 기존 금융시장의 불안을 상쇄하기 위한 일시적 헤징일 수도 있고, 가상화폐의 상승장이 우연히 이탈리아 쇼크와 맞물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발 잠재적 위협이 부상할 때마다 암호화폐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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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코인와이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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