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명물거리. 골목 곳곳에서 ‘SALE’이라는 문구가 적힌 알록달록한 쇼핑백을 든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부터 40~50대로 보이는 중년까지 모두 같은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가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던 곳은 바로 ‘올리브영’ 신촌역점. 이곳은 ‘SALE’이라는 전단지로 매장 입구가 도배돼 있었다. 매장 입구에서 직원들은 큰 목소리로 “오늘이 세일 마지막 날”이라며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매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바구니를 옆에 끼고 물건을 한가득 담는 사람도 있었다. 매장에는 치약, 샴푸와 같은 생필품부터 향수, 립스틱 등 화장품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각종 다이어트식품부터 멀티비타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강보조식품들도 진열돼 있었다.

매장 안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과 물건을 계산하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물건을 계산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산대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아 평균 3~5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이곳에서 만난 직장인 장소현씨는 “혼자 자취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생필품들이 소량으로 구비돼 있어 좋다”면서 “세일기간에 매장을 방문하면 대형마트에서 팔지 않는 신상품들을 더욱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서 자주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에만 올리브영과 같은 H&B(헬스앤뷰티)스토어가 10개에 달한다. 소위 ‘드러그스토어(drugstore)’라고 불리는 H&B스토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된 가게 형태로 각종 의약품에 화장품 등을 함께 파는 잡화점을 말한다.

상권 ‘명당’ 차지하는 H&B스토어

올리브영 매장을 나서자 어디선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신촌역 3번출구 앞의 맥도날드가 있던 자리였다. 맥도날드 신촌점은 지난 20년간 신촌의 ‘약속의 장소’라 불렸을 만큼 상징적인 곳이었다. 지난 4월 맥도날드 신촌점은 임대료 상승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아 현재 이 매장은 텅 비어 있는 상황이다. 이 자리에 신세계의 ‘부츠(Boots)’라는 H&B스토어가 새로 입점을 앞두고 있다. 이 자리에 ‘부츠’가 문을 열면 신촌역 3번출구를 중심으로 H&B스토어 전쟁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서울 시내에는 각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로 불렸던 곳들이 이처럼 H&B스토어로 하나둘 바뀌고 있다. 올해 맥도날드 서울대입구점이 있던 곳은 CJ올리브네트웍스가 운영하는 올리브영이 들어섰다. 앞서 당산역 인근에 있다 2016년 폐점한 맥도날드 매장 자리에도 롯데쇼핑이 운영하는 ‘롭스’가 입점해 영업 중이다. 최근 지하철 4호선 미아사거리역 부근의 KFC 미아점도 롭스로 바뀌었다. H&B스토어는 주요 상권의 ‘명당’ 자리에 속속 들어서며 세를 확장하는 중이다. 이에 대해 한 H&B스토어 관계자는 “맥도날드 신촌점이 있던 곳처럼 20대 여성을 비롯해 젊은 유동인구 비중이 크고 매장 면적이 넓으며 접근성이 뛰어난 곳은 H&B 입지 조건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H&B스토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국내에 H&B스토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CJ가 ‘올리브영’이라는 H&B스토어를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처음 올리브영은 의약품과 생활용품을 함께 파는 ‘드러그스토어’를 지향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일반소매점에선 일부 비처방약을 빼곤 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장품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당시 고객들에게 올리브영 매장의 정체성은 모호했다. 편의점도, 그렇다고 약국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GS리테일이 선보인 ‘왓슨스’가 후발주자로 뛰어들 때까지도 H&B 시장의 성장세는 더뎠다. 전국의 H&B스토어 매장을 다 합쳐도 100여개에 불과했다. 참고로 업계 1위인 올리브영은 2008년까지만 해도 전국 매장 수가 57개에 불과했다.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H&B스토어는 2010년대에 들어서자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일단 화장품 브랜드의 다양화가 호재였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미샤, 더페이스샵 등과 같은 로드숍 매장들이 대세였다. 그러다 점점 화장품 브랜드 종류가 다양해지자 한곳에서 다양한 화장품을 비교하며 구매할 수 있는 원스톱 쇼핑 트렌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2011년 일부 일반의약품이 의약외품으로 전환되면서 일반소매점 판매가 허용된 것도 호재였다. H&B스토어의 판매 상품군은 점점 다양해져 의약외품은 물론이고 스낵류·음료·생활용품까지 매장 진열대에 올랐다. 올리브영은 자체 화장품 브랜드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루밍’ 시장 성장에 발맞춰 남성 전용 다리털 숱 제거기, 눈썹 정리칼 등 기존에 없던 다양한 아이템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해외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던 각국 대표 화장품들도 들여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때부터 2030세대 사이에서 올리브영이 생활 반경 안에 있다는 뜻의 ‘올세권(올리브영+역세권)’이란 말이 슬슬 생기기 시작했다.

1인가구 증가와 함께 급성장해

1인가구 증가도 H&B스토어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H&B스토어는 대형마트와 달리 치약, 샴푸 등 생필품들의 종류가 다양하고 소량패키지로 구비된 것이 많다. 이는 소량패키지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길 원하는 1인가구의 소비취향을 충족시키기 충분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가구는 2000년 222만4000가구(15.5%)에서 2010년 414만2000가구(23.9%)로 2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후 2015년 520만3000가구(27.2%), 2016년 539만8000가구(27.9%)로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다. 1인가구의 증가폭만큼 H&B스토어 시장 규모도 커져갔다. 2009년 1500억원에 불과했던 H&B스토어 시장 규모는 2016년 1조2000억원, 지난해에는 1조7000억원까지 폭증했다. 성장률로만 보면 연평균 15%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편의점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H&B스토어 시장이 올해 2조원을 돌파해 5년 내 3조원 시장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형 유통기업들이 H&B스토어 확장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H&B스토어 시장은 연간 3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며 무섭게 성장 중이다.

현재 H&B스토어는 ‘1강(CJ) 2중(GS·롯데)’ 체제에 후발주자로 신세계가 따라붙은 형국이다. H&B스토어 시장 점유율은 올리브영(CJ) 64%, 랄라블라(GS) 15%, 롭스(롯데) 8% 순이다. 매출로 보나 매장 수로 보나 H&B스토어 시장의 1인자는 CJ올리브네트웍스의 올리브영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CJ올리브네트웍스의 지난해 매출은 1조438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 성장했다. 업계 2위인 GS리테일의 ‘랄라블라(lalavla)’ 매출은 1600억원대, 3위 롯데쇼핑의 롭스는 1000억원대다. 매장 수는 올리브영의 경우 2015년 552개, 2016년 800개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7년 1010개를 돌파했다. 현재 랄라블라와 롭스의 매장 수는 각각 190개와 108개다. 신세계 이마트는 지난해 처음 ‘부츠’를 선보이며 현재까지 13개 매장으로, 가장 늦게 경쟁에 합류했다. 신세계가 국내에 들여온 부츠는 글로벌 H&B 업계 1위인 영국의 월그린부츠얼라이언스(WBA)의 H&B 브랜드다. 국내 전체 H&B스토어 매장 수는 1350여개로 2년 전 700곳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상황이다.

현재 올리브영이 H&B스토어 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업계 2위인 GS리테일은 올해 2월 ‘왓슨스’를 랄라블라로 간판을 바꿔 다는 등 이미지 변화를 통해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GS리테일은 지난해 2월 왓슨스코리아 지분 50%를 약 118억9000만원에 추가 취득해 단독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후 바로 왓슨스를 랄라블라로 상호를 변경해 매장 확대에 나섰다. 간판뿐만 아니라 인테리어도 새 상호 분위기에 맞춰 새롭게 고쳤다. 랄라블라는 H&B 업계 최초로 택배 서비스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즉시 환급 서비스를 도입했다. GS리테일 김시재 과장은 “시장 상황을 지켜보며 새 매장을 계속해서 오픈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롯데쇼핑의 롭스도 올해 50개 점포 출점으로 매출을 50%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롭스는 지난 3월 이태원에 출범 6년 만에 100호점 매장을 열었다. 이태원 100호점 매장 면적은 860㎡(260평)로 롭스 매장 중 가장 크다. 선보이는 상품 품목 수 역시 1만여개로 가장 많다. 롭스는 올해 50여개 매장을 추가로 연다는 계획이다. 롯데쇼핑 롭스 정채윤 대리는 “상품 차별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에 따라 가격과 품질 면에서 모두 만족스러운 상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후발주자인 신세계의 부츠는 핵심 상권에 대규모 매장을 열면서 인지도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부츠는 올해 들어서만 자양점, 마리오아울렛점, 타임스퀘어점 등을 차례로 열었고, 6월 중 신촌점 오픈을 앞두고 있다. 부츠는 슈에무라, 맥, 베네피트 등 백화점에서 구매가 가능한 고급 화장품 브랜드를 대거 입점시켜 화제를 불러모았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부츠는 기존 H&B 매장과 다르게 갈 생각이며 점포 숫자 경쟁보다는 각 지역 대표 H&B 매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프리미엄 H&B스토어로 자리 잡겠다는 게 부츠의 목표다.

H&B스토어 ‘랄라블라’에서 한 여성 고객이 점원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을 고르고 있다. ⓒphoto GS리테일
H&B스토어 ‘랄라블라’에서 한 여성 고객이 점원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을 고르고 있다. ⓒphoto GS리테일

새로운 소비 세력으로 떠오른 ‘영포티’

H&B스토어가 성장함에 따라 화장품 업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H&B스토어의 치솟는 인기 탓에 미샤, 네이처리퍼블릭 등 로드숍(중저가 화장품 판매점)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로드숍 신화’를 썼던 미샤(에이블씨엔씨)의 서영필 창업자는 지난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7년 만에 사모펀드에 회사 지분을 매각했다. 네이처리퍼블릭·토니모리 등 유명 로드숍 브랜드들도 매장 수를 줄이고 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최근 3년간 적자 매장를 재정비하면서 2015년 778개였던 매장 수가 지난해 714개까지 줄어든 상황이다. 백화점도 성장이 정체된 상황이다. 10년 전만 해도 ‘빅3’ 백화점 영업이익률이 8~10%였지만 지금은 3~5%로 반토막 났다. 최근 3년 동안 백화점업계 3사의 출점은 전무한 실정이다.

반대로 화장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은 H&B스토어의 성장에 뜻밖의 호재를 맞고 있다. H&B스토어가 국내 화장품 브랜드들의 성장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올리브영에 입점한 한 중소 화장품 업체 대표는 “마스크팩이나 핸드크림 등의 제품을 만드는 소규모 화장품 업체는 백화점이나 홈쇼핑에 진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중소 화장품 업체가 올리브영에 입점하는 것은 소비자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마케팅 수단이자 기회”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H&B스토어는 중소 화장품 브랜드의 등용문이다.

실제 H&B스토어를 통해 회사 규모를 키운 대표적인 신생기업이 있다. 바로 마스크팩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메디힐’을 운영하는 ‘엘앤피코스메틱’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지만 H&B스토어에 입점한 마스크팩이 히트를 치며 현재는 국내 마스크팩 1위 브랜드로 부상했다. 메디힐의 국내 매출 중 약 80% 이상이 H&B스토어를 통해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메디힐을 운영하는 엘앤피코스메틱은 급성장하며 올해 국내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에 꼽히기도 했다.

H&B스토어와 동반 성장한 건 중소 화장품뿐만이 아니다. 화장품 주문자상표부착(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도 H&B스토어 성장세에 힘입어 덩치가 커지고 있다. CJ올리브네트웍스 안창현 과장은 “우수한 중소기업 브랜드를 발굴해 육성한 것이 가장 핵심적인 성장동력이라 보고 있다”고 말했다.

H&B스토어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2030 놀이터’로 불리던 H&B스토어를 방문하는 연령대가 점점 확대되고 있어서다. 주 고객층으로 알려진 2030세대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40대도 H&B스토어의 큰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소위 ‘영포티(Young Forty)’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1990년대 초반 ‘X세대’ 유행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 트렌드에 민감한 것은 물론 건강·미용 제품에 지출을 아끼지 않는 세대다. 영포티 고객은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H&B스토어 업계는 영포티 고객의 매출 비중이 갈수록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CJ올리브네트웍스에 따르면 40대 고객 비중은 2012년 6.8%에서 2017년 16%로 크게 확대됐다. 40대 여성은 작은 사치인 ‘소확행’ 소비로 꼽히는 마스크팩과 네일스티커 구매에 높은 선호도를 나타냈다. 이어 비타민류의 건강기능식품도 많이 찾았다. 스킨케어 구매 아이템도 2030세대와 차이가 났다. 2030세대 여성들은 기초화장품 구매율이 높은 반면 40대 여성들은 기능성 크림 상품을 가장 많이 찾았다. 지난 6월 4일 올리브영은 올해 열린 첫 대규모 세일 기간(5월 30일~6월 1일) 동안 매출을 분석한 결과, 40대 이상 여성 소비자 비중이 전년 동기 대비 64% 증가했다고 밝혔다.

CJ올리브네트웍스 안창현 과장은 “외모를 가꾸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40대 여성의 구매 비중이 매년 높아지고 있는 데 주목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건강’과 ‘소확행’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매장을 찾아 제품을 고르고 구매한다”고 분석했다. 앞으로도 2조원대의 H&B스토어 시장의 승기를 잡기 위한 기업들의 총성 없는 전쟁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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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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