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출국장 면세점 모습. ⓒphoto 뉴시스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출국장 면세점 모습. ⓒphoto 뉴시스

면세점 시장을 두고 재벌 대기업들의 경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기존 면세점 업계 1·2위인 롯데그룹과 삼성그룹(호텔신라)이 면세점 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후발 주자인 신세계그룹은 돈을 쏟아붓듯 면세점 시장 점유율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범현대가(家)인 현대산업개발이 삼성과 합작해 면세점 시장에 먼저 발을 들여 놓자 또 다른 범현대 기업인 현대백화점그룹도 면세점 시장에 신규 사업자로 뛰어들겠다며 준비 중이다.

대기업들만이 아니다. 정부도 규제 완화를 이유로 대기업들에 면세점 시장의 장벽을 치워주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30일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세제발전심의위원회를 통해 대기업들의 면세점 시장 진출 장애물로 여겨졌던 내용 상당수를 풀어줬다. 면세점 시장을 두고 대기업과 정부보다 더 나간 곳도 있다. 입법기관인 국회도 입국장 면세점 도입 논의를 재개하는 등 면세점 시장에 불을 붙이고 있다.

2015년 발생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와 2017년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으로 주춤했던 대기업들의 면세점 전쟁이 2018년 여름 다시 불을 뿜는 상황이다.

사실 한국의 면세점 시장은 2000년대 초만 해도 유통 대기업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호텔롯데·롯데백화점과 연계한 롯데그룹이 시장을 주도했고, 호텔신라를 앞세운 삼성그룹이 뒤를 따르는 정도였다. 지금은 사업권을 빼앗겼지만 워커힐호텔 면세점을 운영한 SK그룹이 당시만 해도 롯데·삼성 다음인 3위 사업자였다. 2006년만 해도 국내 면세점 시장규모는 약 2조2496억원으로 올해 시장규모(18.4조원 예측)의 9분의 1에 불과한 시장이었다.

불법으로 얼룩진 면세점 사업권 전쟁

면세점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동남아시아와 중국, 일본 등에 분 한류 붐이 큰 역할을 했다. 유커(遊客)로 불리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면세점 싹쓸이 쇼핑에, 동남아와 일본인 관광객들까지 면세점 쇼핑에 나서면서 시장이 빠르게 성장했다. 동남아와 중국에서 한류 붐이 본격화된 2010년 면세점 시장은 4조5000억원대로 성장했다. 불과 4년 만에 시장규모가 두 배나 커진 것이다.

2012년 시장규모가 5조9398억원에 이르렀고 2014년에는 7조7915억원으로 8년 만에 무려 3.5배나 성장했다. 이렇게 되자 기존 롯데와 삼성그룹 외에 신세계, 현대산업개발, 현대백화점그룹, 두산, 한화 등 재벌 대기업들이 서울시내를 중심으로 너도나도 면세점 사업권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과 2016년 정부가 내건 서울시내 신규 면세점 특허권(사업권) 입찰을 두고 재벌들 사이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입찰전이 벌어졌다. 당시 격렬한 입찰전을 두고 ‘재벌 2~3세들의 돈 싸움’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었다.

당시 면세점 확보 전쟁은 대기업과 재벌 오너들이 박근혜 정권·관세청 등과 얽히며 편법과 불법을 넘나들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면세점 사업권 확보를 위해 박근혜 정권에 거액의 뇌물을 줬다’는 혐의로 현재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실이 당시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뇌물죄로 재판 중인 롯데 신동빈 회장 외에도 당시 서울시내 면세점 신규 사업권을 챙겨간 다른 재벌 그룹 오너들과 경영자들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도 아직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20년 이상 워커힐에서 면세점을 운영하던 SK그룹의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권을 2015년 뜬금없이 사업 경험이 전혀 없던 신세계그룹이 챙겨간 것이 무성한 뒷말을 남긴 대표적 사례다.

실제 2017년 감사원이 관세청을 상대로 벌인 ‘면세점 사업자 선정 추진실태’ 감사 결과 대기업들과 인허가권을 틀어쥔 정부 해당 부처, 심지어 대통령과 청와대를 비롯한 최고권력층이 얽혀 벌인 불법과 편법 실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2015년 7월과 11월 두 차례 진행된 ‘서울시내 면세점 재허가 및 신규사업자 선정’에 대한 감사에서는 관세청의 점수 조작과 특정 기업 특혜 등이 드러난 것이다.

어쨌든 2016년 이후 기존 롯데와 삼성 외에 신세계, 두산, 한화, 현대산업개발 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인 하나투어까지 서울시내 면세점 시장에 가세했다. 2015년 11월까지 6개에 불과했던 서울 시내 면세점이 2016년 하반기 무려 13개로 급증했고, 면세점 시장규모도 외형적으로 급팽창했다. 2015년 9조1984억원에 불과하던 시장규모가 2년 만인 2017년 14조4684억원까지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면세점 시장규모가 짧은 시간 급작스럽게 커졌지만 2015~2016년을 기점으로 면세점 기업들의 수익성은 오히려 추락했다. ‘황금알을 낳는 사업’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장사’로 불려온 사업이 급하게 기울었다. 서울시내 면세점 운영 기업 상당수가 적자에 빠졌고, 흑자를 낸 극소수 기업 역시 당기순이익과 영업이익(률)이 추락해 역성장 상태에 빠져버렸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서울시내 면세점 수와 메르스 사태, 특히 중국의 사드 경제보복이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싹쓸이 쇼핑에 의존하던 면세점 기업들의 수익성을 추락시킨 것이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 다른 형태의 소매·유통업과 달리 시장 전략과 기획·마케팅 능력 없이 오로지 정부의 사업권 보호 정책에 기대어 수익을 내온 면세점 기업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셈이다.

면세점 기업들이 전혀 계산하지 못했던 수익성 추락과 정권과 얽힌 뇌물 스캔들 등 비리 의혹들이 대기업들의 면세점 시장 경쟁을 잠시 주춤하게 만든 것이다.

(왼쪽부터)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신세계백화점 정유경 사장,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 ⓒphoto 뉴시스
(왼쪽부터)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신세계백화점 정유경 사장,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 ⓒphoto 뉴시스

주춤했던 시장, 정부·국회가 불붙여

지난 2년여 동안 주춤했던 재벌 대기업들의 면세점 전쟁이 최근 다시 격화되고 있다. 일단 중국의 단체관광객 한국 여행 금지조치가 조금씩 풀릴 기미가 보이고, 과거 유커만큼은 아니지만 다이궁(代工·중국인 대리구매 보따리상)으로 불리는 중국인들의 싹쓸이 쇼핑 행태 역시 면세점 기업들에 ‘돈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 최근 기획재정부 등 정부의 움직임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 5년인 대기업들의 면세점 특허권(사업권)을 10년으로 연장하고 △대기업 면세점이 중소·중견기업 제품을 판 매출에 대해서는 특허 수수료를 낮춰주는 등 면세점 대기업들의 수익 확보에 유리한 ‘친(親)면세점 정책’들을 쏟아냈다.

입법부도 마찬가지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조세형평성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최근 ‘공항 입국장 면세점을 허용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지자 대기업들, 특히 재벌들이 면세점 시장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기존 시장 1위 롯데와 2위 삼성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가장 적극적으로 면세점 시장에 뛰어든 곳은 신세계그룹이다. 시장에서 “면세점 사업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고 할 정도다. 대표적인 사례가 8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의 ‘공항 출국장 면세점’ 두 곳(DF1, DF5)의 사업권을 수천억원을 들여 인수한 것. 원래 이곳의 주인은 롯데그룹이었다. 롯데는 지난 2월 이 면세점 두 곳의 임대료가 지나치게 높다는 이유로 사업권을 반납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면세점 사업자 입찰이 진행됐고, 최종적으로 업계 후발 주자인 신세계그룹이 사업권을 가져갔다. 이 과정에서 신세계그룹이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이를 두고 시장과 업계에서는 ‘신세계의 이해하기 힘든 행태’라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인천공항 면세점 DF1, DF5 사업권을 두고는 최종적으로 사촌지간인 신세계그룹과 삼성그룹(호텔신라)이 경쟁했다. 이를 두고 삼성 오너 3세 이부진(48) 호텔신라 대표와 신세계 오너 2세 정유경(46) 신세계백화점 사장 간 ‘재벌 사촌의 싸움’이라는 말도 나왔다.

애초 인천공항 DF1, DF5 두 곳의 면세점 입찰은 총액 2000억원 후반대쯤에서 결정될 것으로 예측됐다. 입찰전에서 호텔신라는 DF1와 DF5 입찰금으로 각각 2202억원과 496억원 등 총 2698억원을 제시했다. 반면 신세계그룹은 총액 기준으로 이보다 672억원이나 많은 2762억원(DF1)과 608억원(DF5) 등 총 3370억원을 제시한 것이다.

신세계, 돈으로 밀어붙여

기자가 DF1과 DF5 두 곳의 입찰 평가 내용을 확인해봤다. 관세청은 결국 인천공항 두 곳의 면세점 사업자로 신세계를 선정했다. 3300억원이 훨씬 넘을 만큼 거액의 돈을 쏟아부은 신세계가 결국 돈의 힘으로 면세점 사업권을 챙긴 것이다.

신세계디에프 안주연 팀장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입찰가격이라는 시장 평가에 대해 “합당한 (입찰) 가격이라 생각한다”며 “기업이 (면세점을) 운영했을 때 수익이 날 수 있는 정도 아니겠느냐”고 했다. 안 팀장은 “(3370억원에 인천공항 면세점 두 곳 모두) 운 좋게 (사업권을) 확보한 것”이라며 “장사하는 데 승산이 있으니 그만큼 (돈을) 쓴 것”이라고 했다.

신세계가 인천공항 면세점 두 곳의 사업권을 따자 시장 분위기는 단숨에 격한 상황으로 돌변했다. 삼성그룹의 호텔신라는 면세점 후발기업이자 삼성의 방계인 신세계그룹과의 경쟁에서 졌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두 그룹이 면세점 사업 얼굴 마담으로 앞세우고 있는 이부진 대표와 정유경 대표, 사촌 간 돈 경쟁에서 ‘이 대표가 졌다’는 점에 시선이 쏠리기도 했다. ‘사업능력이 부족하고 경영능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정유경씨 측에게 ‘돈 싸움에서 밀렸다’는 것이 업계 2위 호텔신라에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 입찰 경쟁은 그동안 덩치 키우기에 집중해오던 호텔신라는 물론, 면세점 시장 1위를 지켜오던 롯데그룹도 다시 시장경쟁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인천공항 면세점 입찰전이 시장점유율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 면세점 시장은 롯데그룹이 점유율 50%를 훨씬 넘기며 독보적 1위였고, 호텔신라가 그 절반 정도로 양강구도였다. 2017년 말 통계를 보면, 박근혜 정권 당시 면세점을 둘러싼 스캔들을 거치며 롯데그룹의 면세점 시장 점유율이 폭락했지만 그럼에도 41.9%로 멀찌감치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어 삼성그룹 호텔신라가 29.7%로 2위였다. 둘을 합쳐 점유율이 70%가 넘으며 여전히 시장을 양분했다. 신세계그룹은 2017년 말까지만 해도 12.7%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천공항 면세점 DF1와 DF5를 신세계가 챙기며 점유율이 변하기 시작했다.

DF1와 DF5의 시장점유율 가치는 약 6% 내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신세계가 챙길 경우 올해부터 점유율을 18% 정도까지 끌어올릴 것으로 예측된다. 반면 롯데의 점유율은 사상 처음으로 30% 중반으로 주저앉게 될 상황이다. 특히 지난 7월 18일 신세계면세점 강남점 영업을 시작한 신세계는 대형 할인행사까지 벌이고 있다. 신세계가 돈을 쏟아붓는 방식으로 상위 면세점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공격적으로 뺏겠다고 나선 상태다.

신세계 공세 달갑지 않은 롯데·삼성

불과 몇 년 만에 경쟁 기업과 후발기업들에 시장점유율 20% 가까이를 빼앗기며 점유율이 30% 중반대로 쪼그라들게 될 롯데그룹과, 그동안 면세점 사업 키우기에 골몰해왔던 호텔신라는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다. 일단 시장에서는 인천공항 면세점 두 곳에 지출해야 할 임대료 등 연간 최소 수백억원의 고정자금을 지출하지 않게 된 롯데가 자금 여력을 바탕으로 영업 강화에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롯데가 대규모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데려오는 ‘알선 브로커’에게 다른 면세점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주겠다는 방식으로 영업 강화에 나설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삼성그룹 역시 호텔신라를 앞세워 면세점 덩치 키우기를 계속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롯데는 최근 대규모 가격 할인에 이어 해외 호텔 숙박권 등을 내걸었고, 호텔신라 역시 대규모 할인에다 신라면세점에서 사용가능한 거액의 적립금 혜택까지 내걸고 영업 강화에 나선 상태다.

롯데와 호텔신라는 면세점 사업권 추가 확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김포공항 내 면세점인 DF2 구역 입찰에서 이들은 경쟁자였던 신세계와 두산을 떨어뜨리며 최종 경쟁자가 된 상태. 이들은 연간 약 600억원 정도 매출이 발생하는 김포공항 내 면세점 DF2 구역을 차지해 조금이나마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계산이다.

잠시 주춤했던 면세점 시장이 다시 격화되며 정부가 세금을 앞세워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있는 ‘특혜사업’에 대기업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물론 일부 국회의원들과 몇몇 언론들까지 나서 특혜사업 규제를 풀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 분위기에 다시 특혜사업 시장 경쟁의 판을 키우겠다며 ‘그들만의 전쟁’에 다시 뛰어들고 있다. 대기업들의 면세점 시장 경쟁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내수시장과 유통업의 질적 성장, 또 면세가 아닌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훨씬 많은 소비자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대기업들의 진지한 경쟁이 더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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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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