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 김우중

1936년 12월 19일 경북 대구시 봉산동에서 태어남

195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0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61년 한성실업 입사

1967년 대우실업 창업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지사(호주 시드니) 설립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인수

1983년 국제기업인상 수상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9년 대우그룹 해체

2010년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YBM) 사업 시작

2019년 12월 9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별세, 충남 태안 선영에 안장됨

주산(宙山) 김우중(金宇中)은 만 30세 때 창업한 대우그룹을 불과 30년 만에 자산 규모 2위의 기업으로 일군 신화적인 인물이다. 대표적 1세대 기업인으로 꼽혀온 그는 1990년대 ‘세계경영’을 표방하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했다. 그 결과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키웠다. 당시 대우의 수출 규모는 한국 총수출액의 10%에 달했다. 그의 아호 ‘주산’은 원불교 대산종사가 법호로 지어준 것이나 그는 별세하기 1년 전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천주교에 귀의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김우중 분신’

대우그룹은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발해 30년 만에 세계 500대 기업에 진입하는 대기록을 세웠으나 환난의 소용돌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해체되고 말았다. 때문에 주산은 빨리 달린 만큼 크게 넘어진 ‘재계의 풍운아’란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는 만년에 국내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세계경영 교육’이란 여생의 꿈을 활기 있게 펼쳐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후진들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로 살아남아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lobal Young Business Manager·GYBM) 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김우중 분신’을 세계 곳곳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주산은 1936년 12월 19일 경북 대구시 봉산동에서 대구사범학교 교사인 부친 김용하와 모친 전인항 사이에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용하는 광복 후 경기공립사범학교장(현 서울교육대 총장), 서울대 상대 교수 등을 거쳐 제주도지사를 지낸 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모친도 이북 출신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빈곤했던 피란 시절이 가장 행복

주산의 가족은 6·25전쟁 때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부친이 납북된 데다 형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그는 소년가장으로 신문팔이에 나섰다. 신문을 받아들면 사람이 많은 방천시장까지 선두로 달려가 좋은 장소를 선점했다. 남보다 신문을 많이 팔기 위해 거스름돈을 미리 삼각형으로 접어서 주는 식으로 1등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었다. 그런 날 밤늦게 집에 오면 어머니와 동생이 어김없이 자고 있었다. 밥이 한 그릇밖에 없으니 굶고 자는 것이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내놓으며 어머니는 “우리는 먼저 먹었다. 시장하지? 어서 먹어라”라고 권했는데, 허기진 배를 안고 억지로 잠을 청한 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나는 밖에서 어묵이랑 사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어머니랑 동생들이나 드세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머니와 그는 서로 거짓말을 했지만 가장 빈곤했던 피란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것이 훗날 재산 사회환원 철학으로 다져진 셈이다.

주산은 1953년 경기중학, 1956년 경기고교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에 입학해 1960년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반 때 자칫 졸업을 못할 뻔했던 일을 악몽으로 떠올리곤 했다. 마지막 학기에 학교에 가는 대신 정부기관인 부흥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출석일수가 모자란 탓에 어느 까다로운 교수에게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의 딱한 처지에 공감한 학회 서클 친구들까지 교수님 댁을 찾아가 통사정을 한 후에야 특별 리포트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교훈이 되었다.

“나는 회사를 세운 이래 직원들의 적당주의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적당주의는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나 또 회사를 위해서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주인처럼 일거리 찾아다닌 월급쟁이

주산은 1961년 한성실업에 입사해 무역 관련 업무를 배우게 된다. 먼 친척 아저씨네 회사의 월급쟁이였으나 그는 마치 주인처럼 “내 일을 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며, 누군가 내게 명령하거나 시키기 전에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했다”고 자부하곤 했다. 한성실업 회장을 지냈던 김용순은 1986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부하직원이었던 주산을 이렇게 떠올렸다.

“우중이는 한성에 6년 정도 근무했는데 두뇌가 비상했어요.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업무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완벽하게 마무리 짓곤 했어요. 또 배짱이 얼마나 세고 통이 컸던지 큰 인물이 될 걸로 미리 알고 있었어요. 부하직원들 도와준답시고 봉급을 타면 집에 1원도 갖다 주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도 통이 크고 의협심이 강해 내가 우리 집사람에게 ‘큰일 났어. 우중이가 크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라고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월간조선 간)

1963년 주산은 한성실업에 근무하면서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킨다. 당시 한성실업은 원사와 파나마모자, 타이어, 설탕 등 온갖 상품들을 들여오는 수입상이었다.

1967년 3월 주산은 500만원의 자본금과 5명의 직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다. 대우실업은 한 달 후 방콕의 시아후아트사로부터 첫 오더를 받았다. 2만야드의 트리코트 5676달러어치를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뚝섬에 있는 대도섬유공업사에서 제작하고 영등포에 있는 동아염직에서 가공해 통관을 위해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첫 수출의 성공에 이어 대우실업은 창업 원년에 트리코트 한 품목만으로 58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창업 원년 한 품목으로 58만달러 수출

그러나 매사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초창기 대우실업이 인도네시아의 ‘떼’라는 무역상과 거래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때 돈으로 한 마에 20센트 하던 원단이 인도네시아에서 갑자기 수입을 규제하는 바람에 원단 값이 반 이하로 뚝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떼’로서는 장기계약을 했으므로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건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무역상 ‘떼’는 당장 30만달러가 없으면 은행에서 차압이 들어온다고 울상을 지어, 주산은 30만달러를 직접 지원했다. 당시 회사 자본금이 1만달러였으니까 주산으로서는 큰돈이었고 대단한 용단이었다. 그런데 1년 후 인도네시아 시장이 완전히 풀리면서 원단 값이 한 마에 35센트로 뛰어 100만달러는 족히 벌었다. ‘떼’는 1년 전 30만달러의 도움을 그런 식으로 갚은 셈이다.

주산은 해외 현지 시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취합과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 지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1969년 8월 최초로 호주 시드니 지사를 설립했고, 이어 9월에는 싱가포르 지사가 문을 열었다. 1970년 9월에는 미국 뉴욕 지사가 설립됐다. 당시 미국의 의류 수입은 매년 30%씩 늘고 있었고 주요 수출국인 일본은 인건비 상승 압력을 받으면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 틈새를 엿본 주산은 미국의 의류 잠재 시장 수요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시장조사를 마친 주산은 미국인의 기호에 맞는 의류를 생산하기로 했다. 순발력을 발휘해 회사에 봉제과를 신설하고 스웨터과를 보강했다. 부산 공장에서는 소재를 다양화해 고급 의류에 적합한 트리코트 원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어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열면서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 창구가 됐다.

다음은 주산의 경기고 동창이자 창업 동지인 이우복 전 대우그룹 부회장의 증언이다. “대우가 문 열고부터 오늘날까지 한 번도 나는 (김우중이) 친구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김 회장은 위대한 내 상관이요, 지도자요, 또 이 거대한 군단의 총수로서 비쳤을 뿐입니다. 초창기엔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심지어는 일주일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일한 적도 있었어요. 거의 매일 11시45분 정도 되어서야 마지막 버스를 탔습니다. 통금시간이 임박해 뜀박질로 버스정류장까지 뛰어가곤 했는데, 달그락거리던 빈 도시락 속의 젓가락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막차에는 한두 명의 승객이 고작이었고 대부분 취객이었지요. 그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여유 있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술 한잔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그것이 부러웠던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자신감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주산은 수출시장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한다. 한국의 수출은 1965년 1억7500만달러에서 1968년 4억5500만달러로 근 3배나 늘어났다. 이 같은 추세에 걸맞게 창업 1년 만에 국내 수출 서열 141위이던 대우는 2년째에 36위로 점프했으며, 1972년에는 2위까지 경이적인 도약을 했다. 1978년에는 드디어 1위를 차지한다.

창업 후 수출만으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켜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떠오른 주산은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와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단기간 내에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이로써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까지 선도하게 된다. 김태구(79) 전 대우차 사장은 1970년 수출 제일주의 시대 대우실업 시절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전쟁을 벌였다. 대만산 헬멧을 구해 에티오피아에 수출하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티오피아를 소련이 지원했다. 그래서 미국이 에티오피아의 헬멧 수출을 막았다. 포기하려 했으나 김우중 회장은 달랐다. 헬멧을 우회 수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는지 뒤졌다. 결국 성공했다. 그 양반은 우리가 보면 도저히 안 되는 일을 해냈다. 동유럽 자동차 진출? 그게 쉬웠다면 왜 서구 업체들이 진작 안 갔겠나.”

‘창의’가 아닌 ‘창조’가 대우정신이 된 사연

김 전 사장은 ‘창조·도전·희생’이라는 대우정신(사훈)을 정하던 때의 일화도 털어놨다. “임원들은 ‘창조’가 아니라 ‘창의’로 하자고 했다. 김 회장은 완강히 ‘창조’를 고수했다. ‘창의는 아이디어일 뿐이다. 아이디어에서 그칠 게 아니라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사업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다시 백이 되는 오묘한 계산이 가능한 세계다. 1970년대 말 주산은 북아프리카 수단에 타이어 공장을 지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짓는 첫 번째 공장이었다. 대우는 국내에서 타이어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주산의 계산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수단에는 타이어 수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어 공장이 하나도 없었다. 수단은 국토의 80% 이상이 사막이고, 도시와 도시는 매우 떨어져 있어서 도시 간의 이동은 자동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산은 수단 남쪽에 대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미국 측의 관리로부터 입수한 바 있었다. 유전이 개발되면 경제 규모가 커질 것이니 자동자 보급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 결국 주산의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여러 차례 타이어 공장을 증설했지만 수단이 우리 타이어를 사러 미리 돈을 맡겨 놓아야 할 정도였다.

1978년에는 역시 미수교국이자 좌경 회교국가였던 리비아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리비아 내 건설공사는 해마다 폭발적인 증가세로 뻗어나가 1981년에는 20억달러가 넘는 엄청난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최소한 1년에 절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밤 2시가 넘어 잠이 든 김 회장을 새벽 4시30분쯤에 눈에 안약을 넣어 깨우는 것이 저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바이어들과의 만남이 밤 10시쯤 끝나면 그때부터 내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비행기도 주로 밤 비행기를 이용했습니다. 한번은 왜 밤 비행기를 예약해야 하느냐고 여쭤봤더니 ‘무엇보다 시간을 아껴야 하고 호텔비도 절약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때부터 김 회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장사꾼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계신 분으로 믿게 됐지요. 그분과 오랫동안 있다 보면 삶을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눈이 부쩍 자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습니다.” 1977년부터 2년간 주산의 비서를 지냈으며 대우가전 사장도 지냈던 이재명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

<strong></div>1</strong> 2018년 3월 22일 대우 창립 5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우중 회장 내외. 김 회장이  공식적으로 참석한 마지막 행사였다.<br/><strong>2</strong>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김우중 전 회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김 전 회장도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대북사업을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br/><strong>3</strong> 김우중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접견. 트럼프는 1998년 사업파트너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br/><strong>4</strong> 수단 니메이리 대통령과 함께 현지 타이어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우중 회장.<br/><strong>5</strong> 1989년부터 1년6개월 동안 대우조선에 상주하며 노사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 김우중 회장. ⓒphoto 대우재단
1 2018년 3월 22일 대우 창립 5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우중 회장 내외. 김 회장이 공식적으로 참석한 마지막 행사였다.
2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김우중 전 회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김 전 회장도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대북사업을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3 김우중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접견. 트럼프는 1998년 사업파트너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
4 수단 니메이리 대통령과 함께 현지 타이어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우중 회장.
5 1989년부터 1년6개월 동안 대우조선에 상주하며 노사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 김우중 회장. ⓒphoto 대우재단

부실기업을 흑자로 만든 경영 마술사

주산은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어엿한 흑자 기업으로 살려내는 경영의 마술사이기도 했다. 그가 1976년에 인수한 한국기계는 일제 때 잠수함 건조를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였고, 한 번의 흑자도 내지 못한 채 부실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애초 대우보다 큰 삼성과 현대를 상대로 한국기계 인수 상담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사 결과 인수해 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주산은 똑같은 조사를 벌여 인수를 결정한 것이다. 한국기계는 대우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대우중공업(지금은 두산인프라코어)은 그 후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을 대표하는 간판기업이 되었다. 인수 당시 부채 총액은 대우 총자본의 3배에 달하는 797억원이었지만 주산은 인수 1년 만에 흑자로 바꿔 놓았다.

“인수된 부실기업은 부실 원인을 분석해 종합적인 검토보고서가 작성되고 경영 개선 방안을 수립한 뒤 부실 원인을 제거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상화 작업을 통해 대우는 경영 경험을 축적해 나갈 수 있었고, 우수한 경영자를 확보함으로써 다른 기업 인수에도 이 인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부실기업 인수는 대우에 시차의 이점을 갖게 함으로써 고도성장의 추진력을 제공했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

1982년 주산은 무역·건설 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하고 그룹화의 길에 들어선 후 자동차, 중공업, 조선, 전자, 통신, 정보시스템, 금융, 호텔, 서비스 등 전 산업의 내실을 갖춰 세계 진출을 본격화한다. 1990년대 말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 법인 및 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대우맨들은 1980년대, 1990년대를 역시 ‘도전’의 시기로 회고한다. “일찌감치 진출했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쿠데타가 수시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대우 현지 지사장이 잡혔다가 풀려났다. 그러더니 나중엔 정변이 일어나도 대우는 건드리지 않았다. 누구 편드는 게 아니라 일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박혀서였다. 대우는 수교가 없었던 동유럽, 아프리카에 먼저 들어갔다. 그게 발판이 돼 수교가 이뤄졌다고 자부한다.”(김종도 전 GM대우 전무)

남미에서 일본을 지워나간 대우

1990년대 초반 남미는 일본판이었다. 페루에서는 일본계 대통령이 집권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대우맨이 전자·자동차를 들고 들어갔다. 특히 AS에 신경 썼다. 일본 차는 수리 신청을 하고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했는데, 대우맨은 바로바로 해줬다. 시장을 확보하면서 한국 문화도 퍼졌다. 대우는 그렇게 남미에서 일본을 지워나갔다.

주산은 1983년 국제상업회의소에서 수여하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받는다. 1989년에는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냈는데 이 책은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려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세계경제포럼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주산은 외환위기 와중에 전경련 회장을 맡아 경상수지 연 500만달러 흑자 달성에 기여했고, 금 모으기 아이디어를 통해 경제 회생에 힘썼다.

그러나 주산은 끝내 외환위기의 험난한 현실을 넘지 못하고 대우 해체란 엄청난 비운을 맞는다. 주산과 함께 대우신화를 남긴 대우맨들은 그룹 해체에 대해 진한 아쉬움을 아직도 숨기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때 주산이 전경련 회장으로 신흥관료들에 맞섰기 때문에 ‘괘씸죄’를 샀다는 것이다. 백기승 전 대우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경련 회장을 괜히 한 것 같다”

“외환위기 때 전경련 회의를 마치고서였다. 회장님께서 나 보고 차에 같이 타라고 하고선 이렇게 말했다. ‘전경련 회장 괜히 한 것 같아. 회사가 압박을 받는다.’ 결국 그룹이 해체됐다. 대우가 갖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의 300만평(1000만㎡) 공장, 체코 프라하의 100만평(330만㎡)도 날아갔다. 지금은 아무리 돈을 많이 싸들고 가도 살 수 없는 땅이다.”

주산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도전정신의 표상이었으나 법원은 그에게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징역 8년6개월에 추징금 18조원을 선고했다.

주산은 2010년부터 마지막 봉사라 여기며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YBM) 사업에 몰두하여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4개국에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일찍이 그가 사재를 털어 세운 대우재단은 아주대학병원을 중심으로 도서·오지 병원 진료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기초과학 위주의 우수 학술총서 등 값진 도서 780권을 발행해 학계 연구 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주산은 2019년 12월 9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별세하여 충남 태안 선영에 안장됐다.

주산 김우중의 가계

주산은 정희자(80·한양대 건축학과 졸업·전 힐튼호텔 회장)와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장남 선재(1967년생)씨는 1990년 미국 보스턴 부근 국도에서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차남 선협(51·미 보스턴대 산업공학과 석사)씨는 아도니스 부회장으로 금호그룹 박정구 회장의 장녀 박은형(50·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다. 3남 선용(45·미 MIT대 경제학과 석사)씨는 베티지홀딩스 대표이사로 가곡 ‘얼굴’ 작사자인 심봉석씨의 3녀 심현하(45·이화여대 영어교육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3형제를 두었다. 주산의 맏딸 선정(55·미 크랜브룩대 서양학과 석사)씨는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로 이수그룹 회장인 김상범(59·미 미시간대 경영학 석사·사법학 박사·고 김준성 경제부총리의 3남)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다.

주산의 맏형은 태중(99)씨이며, 둘째 형 관중(89)씨는 대창기업 회장이다. 셋째 형 덕중(86)씨는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아랫동생 성중(79)씨는 델코전자 회장이며, 누이동생 영숙(77)씨는 윤석철 교수와 결혼했다.

내가 본 주산 김우중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원 회장·전 ㈜대우 사장

김우중 회장은 앞을 보는 시각이 탁월한 기업인이었다. 동시에 용기와 배짱을 가진 분이었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은 직원이 망설이고 주저할 때도 직접 나서서 일을 만들어갔다. 마치 정육점의 능숙한 칼잡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부실기업을 만지면서 꼭 살려야 할 힘줄과 버려야 할 지방을 기가 막히게 선별하고 판단해냈다.

일이 취미라고 할 정도로 일에 미쳐 한국의 영역을 넘어 세계경영의 큰 길로 진군해갔다. 국가가 있어야 장사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서 뚜렷한 소명의식으로 바른 국가관을 심어준 애국자였다. 일찍이 사재를 털어 대우재단을 설립했고, 아주대학과 병원을 개설해 재산 환원을 한 탁월한 선견지명에 새삼 감복할 따름이다. 우리 후진들은 그분의 분신으로 살아남아 세계경영 선양이란 큰 뜻을 펼쳐가는 데에 온 힘을 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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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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