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건
1926년 1월 30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태어남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졸업, 선경직물 수원공장 입사
1953년 선경직물 인수, SK그룹 창업
1972년 워커힐호텔 인수
1973년 11월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
최종현
1929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태어남
1959년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 졸업
1970년 선경직물 사장
1974년 선경그룹 회장
1987년 한국경제연구원장
19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8년 SK 대표이사 회장
1998년 8월 26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자택에서 별세
최종건(崔鍾建)·최종현(崔鍾賢) 형제는 선경(鮮京)직물을 창업하여 재계 랭킹 3위의 SK그룹으로 성장시킨 ‘경영 기적’의 주역들이다.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부농인 최학배와 이동대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조부의 뜻에 따라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입사하여 제직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에 일개 직원으로 입사하였으나 직물 생산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6·25전쟁을 겪으면서 폐허나 다름없이 파손된 공장의 직기를 일일이 매만지고 수리하여 공장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53년 4월 8일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했는데,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은 이날을 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해 오고 있다.
동생의 유학자금 보태 선경직물 인수
당시 최종건은 관재청으로부터 공장을 불하받을 자금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동생 최종현이 자신의 미국 유학자금을 선뜻 내놓아 선경직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경직물은 이후 최종건의 저돌적 추진력과 최종현의 치밀한 기획력이 조화를 이루며 성장해 간다.
최종현은 1929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차남에게 더 넓은 세상에 나가 공부하기를 권하였다. 최종현은 1950년 수원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해 3년간 수학하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초 자신의 유학자금을 보태 인수한 선경직물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후였다.
이후 선경직물의 경영을 혼자 떠맡은 최종건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업무량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곧 선경직물이 질적 변화를 이뤄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최종현이 선경직물 경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 유학 중이던 시절 ‘귀국하여 형의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당시 선경직물의 위기와 자금난은 그만큼 심각했다.
최종현은 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와 비슷한 세대의 경영인에게서는 찾기 힘든 사례로, 탄탄한 경제이론으로 무장한 손꼽히는 경제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실제 경제이론에 관한 한 그는 나중에 대학교수들의 연구사례가 될 만큼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모범적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 10월 부친이 급작스럽게 별세하자 최종현은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곧바로 선경직물의 부사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빠르게 선경직물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관리체계를 확립해 나간다. 특히 그는 원사에서 직물, 봉제로 이어지는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를 담은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발표했고, 최종건 사장은 이를 적극 지원했다.
최종현 부사장은 이어 선경화섬을 설립하고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의 병행 건설이라는 모험에 나서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준공하고 이듬해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완공한다. 이로써 선경은 한국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하는 국내 1위 메이커로 도약한다.
난제들 타개하며 경영이론 정립
1970년 선경직물 사장으로 취임한 최종현은 현장에서 부딪히는 난제들을 타개해 나가며 이를 자신의 경영이론으로 정립하기 시작한다.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에 매진하던 선경은 사업다각화에도 눈을 돌려 1972년 12월 최종건 회장이 워커힐호텔 인수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듬해 11월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해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선영에 안장된다.
형이 별세한 후 최종현은 선경직물에 이어 1973년 11월 24일 선경합섬과 선경화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선경의 경영권을 정식으로 승계한다. 이미 승계에 앞서 경영합리화를 통해 선경직물의 자금난을 빠르게 해소했고 관리체제 확립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회사를 안정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실적에 더해 최종건 사장의 남다른 우애가 원만한 기업 승계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을 이어받은 최종현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겠다는 다짐을 저버리지 않았다. 최태원 현 회장(최종현의 장남)도 사촌들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잘하고 있다고 친지들은 말하고 있다.
경영권을 정식으로 승계하면서 최종현 회장은 선경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한다. 자본, 기술, 인재가 부족했던 당시 섬유회사에 불과한 선경이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1973년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설립 허가서를 받아냈으나 그해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정유공장 설립이 무산되는 등 크고 작은 고비도 찾아왔다. 그러나 최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고위 석유네트워크를 구축해 안정적인 원유공급선을 확보하는 등 석유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최 회장은 유공(대한석유공사)의 합작선인 걸프사의 철수를 예상하고 비밀리에 인수팀을 만들어 직접 팀장을 맡아 지분 인수를 모색하다가 1980년 드디어 인수에 성공한다.
재계 판도를 바꾼 유공 인수
당시 선경의 유공 인수는 재계의 판도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이 덕분에 재계 10위 안팎을 맴돌던 선경이 일약 재계 5위로 도약했다. 유공 인수 후 최 회장은 국가 전체가 흔들렸던 오일쇼크를 교훈 삼아 해외 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선다. 진정한 수직계열화 완성은 석유 개발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자원이 곧 무기이고 국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하지만 유전 개발은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사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석유 개발은 한두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면서 담당자들을 격려했다. 연이은 실패를 딛고 SK는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을 어엿한 산유국 대열에 올려놨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평균 5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구며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낸다.
최 회장이 집요하게 추구하던 수직계열화 경영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기도 했다. “1973년 친형 종건씨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직후 최 회장이 착수한 ‘단순한 사업다각화’도 철저히 현재의 이익을 보다 늘릴 수 있는 ‘시너지 효과’에 근거했다. 직물 제조에 필요한 섬유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원사공장을 차렸고, 원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원료가 공급자의 농단으로 값이 올라가자 석유화학에 손을 댔다. 이어 석유화학에 필요한 원유 확보를 위해 석유회사, 나아가 원유정제회사를 차리는 식이었다.”
최종현의 수직계열화 경영의 꿈은1991년 6월 유공 울산 콤플렉스에서 새로 지은 9개 공장의 합동준공식이 열리면서 가시화됐다. 제4 정유시설, 신규 휘발유 제조시설, 파라자일렌 제조시설 등의 준공으로 유공은 휘발유와 기초 유분에서부터 합성고무, 합성섬유의 원료에 이르기까지 석유화학의 필수제품을 위한 생산시설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당시 서울대 조동성 교수는 “원유 개발부터 석유화학제품 생산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라면서 수직계열화의 경영전략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계 기업 사상 최초의 완전 수직계열화
“원유에서 최종 상품에 이르는 완전 수직계열화는 세계 기업 사상 최초의 일이지만 이와 함께 선경이 비관련 계열기업을 정리하여 그룹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연관산업 콩글로메리트(복합기업)로 통합시켰다는 데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 조치로 선경은 우리나라 그룹기업의 고질적 병폐인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고 경영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SK그룹 사보)
조동성 교수가 최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가을이었다. 당시 조 교수는 미국 보스턴 컨설팅그룹의 컨설턴트로서 걸프오일회사의 국제전략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 중에 신규 석유화학공장을 한국에 세우는 방안이 있었다. 당시 투자 파트너 후보 중에는 선경을 비롯해 여러 대기업이 포함돼 있었지만 조 교수가 만났던 최 회장은 여타 그룹 회장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최 회장은 조 교수가 제시한 걸프오일과의 석유화학공장 합작투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걸프오일이 한국의 유공 경영에서 언제 손을 떼려는가를 물어봤다. 그는 전혀 그만둘 계획이 없는 듯하다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걸프오일은 언젠가 한국을 떠나게 될 테니 두고 보라”면서 “선경은 이미 걸프오일의 유공 지분을 인수하는 것을 포함해서 석유사업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공 인수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정보통신 사업 진출이다. SK그룹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함으로써 에너지화학 부문과 더불어 그룹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정보통신 부문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최 회장은 유공 인수 때와 마찬가지로 치밀한 정지작업을 다져간다. 최 회장은 1984년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우고, 여기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한다. 정보통신산업 선진국인 미국이 보유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미국과 한국에 유크로닉스, 선경정보시스템, 대한텔레콤 등을 잇따라 설립하여 정보통신 사업 진출에 대비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최 회장은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공식 천명하고 그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존 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 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또한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 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이런 분야들 중 나는 정보통신산업을 다음 사업 영역으로 선정하여 그룹의 중점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선경은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냈지만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는 시련을 겪는다.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라는 이유로 특혜 시비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최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선경의 사업권 획득이 정당한 노력의 결실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