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건

1926년 1월 30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태어남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졸업, 선경직물 수원공장 입사

1953년 선경직물 인수, SK그룹 창업

1972년 워커힐호텔 인수

1973년 11월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

최종현

1929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태어남

1959년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 졸업

1970년 선경직물 사장

1974년 선경그룹 회장

1987년 한국경제연구원장

19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8년 SK 대표이사 회장

1998년 8월 26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자택에서 별세

최종건(崔鍾建)·최종현(崔鍾賢) 형제는 선경(鮮京)직물을 창업하여 재계 랭킹 3위의 SK그룹으로 성장시킨 ‘경영 기적’의 주역들이다.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부농인 최학배와 이동대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조부의 뜻에 따라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입사하여 제직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에 일개 직원으로 입사하였으나 직물 생산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6·25전쟁을 겪으면서 폐허나 다름없이 파손된 공장의 직기를 일일이 매만지고 수리하여 공장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53년 4월 8일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했는데,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은 이날을 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해 오고 있다.

동생의 유학자금 보태 선경직물 인수

당시 최종건은 관재청으로부터 공장을 불하받을 자금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동생 최종현이 자신의 미국 유학자금을 선뜻 내놓아 선경직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경직물은 이후 최종건의 저돌적 추진력과 최종현의 치밀한 기획력이 조화를 이루며 성장해 간다.

최종현은 1929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차남에게 더 넓은 세상에 나가 공부하기를 권하였다. 최종현은 1950년 수원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해 3년간 수학하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초 자신의 유학자금을 보태 인수한 선경직물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후였다.

이후 선경직물의 경영을 혼자 떠맡은 최종건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업무량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곧 선경직물이 질적 변화를 이뤄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최종현이 선경직물 경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 유학 중이던 시절 ‘귀국하여 형의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당시 선경직물의 위기와 자금난은 그만큼 심각했다.

최종현은 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와 비슷한 세대의 경영인에게서는 찾기 힘든 사례로, 탄탄한 경제이론으로 무장한 손꼽히는 경제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실제 경제이론에 관한 한 그는 나중에 대학교수들의 연구사례가 될 만큼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모범적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 10월 부친이 급작스럽게 별세하자 최종현은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곧바로 선경직물의 부사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빠르게 선경직물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관리체계를 확립해 나간다. 특히 그는 원사에서 직물, 봉제로 이어지는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를 담은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발표했고, 최종건 사장은 이를 적극 지원했다.

최종현 부사장은 이어 선경화섬을 설립하고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의 병행 건설이라는 모험에 나서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준공하고 이듬해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완공한다. 이로써 선경은 한국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하는 국내 1위 메이커로 도약한다.

난제들 타개하며 경영이론 정립

1970년 선경직물 사장으로 취임한 최종현은 현장에서 부딪히는 난제들을 타개해 나가며 이를 자신의 경영이론으로 정립하기 시작한다.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에 매진하던 선경은 사업다각화에도 눈을 돌려 1972년 12월 최종건 회장이 워커힐호텔 인수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듬해 11월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해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선영에 안장된다.

형이 별세한 후 최종현은 선경직물에 이어 1973년 11월 24일 선경합섬과 선경화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선경의 경영권을 정식으로 승계한다. 이미 승계에 앞서 경영합리화를 통해 선경직물의 자금난을 빠르게 해소했고 관리체제 확립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회사를 안정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실적에 더해 최종건 사장의 남다른 우애가 원만한 기업 승계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을 이어받은 최종현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겠다는 다짐을 저버리지 않았다. 최태원 현 회장(최종현의 장남)도 사촌들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잘하고 있다고 친지들은 말하고 있다.

경영권을 정식으로 승계하면서 최종현 회장은 선경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한다. 자본, 기술, 인재가 부족했던 당시 섬유회사에 불과한 선경이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1973년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설립 허가서를 받아냈으나 그해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정유공장 설립이 무산되는 등 크고 작은 고비도 찾아왔다. 그러나 최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고위 석유네트워크를 구축해 안정적인 원유공급선을 확보하는 등 석유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최 회장은 유공(대한석유공사)의 합작선인 걸프사의 철수를 예상하고 비밀리에 인수팀을 만들어 직접 팀장을 맡아 지분 인수를 모색하다가 1980년 드디어 인수에 성공한다.

재계 판도를 바꾼 유공 인수

당시 선경의 유공 인수는 재계의 판도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이 덕분에 재계 10위 안팎을 맴돌던 선경이 일약 재계 5위로 도약했다. 유공 인수 후 최 회장은 국가 전체가 흔들렸던 오일쇼크를 교훈 삼아 해외 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선다. 진정한 수직계열화 완성은 석유 개발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자원이 곧 무기이고 국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하지만 유전 개발은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사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석유 개발은 한두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면서 담당자들을 격려했다. 연이은 실패를 딛고 SK는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을 어엿한 산유국 대열에 올려놨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평균 5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구며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낸다.

최 회장이 집요하게 추구하던 수직계열화 경영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기도 했다. “1973년 친형 종건씨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직후 최 회장이 착수한 ‘단순한 사업다각화’도 철저히 현재의 이익을 보다 늘릴 수 있는 ‘시너지 효과’에 근거했다. 직물 제조에 필요한 섬유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원사공장을 차렸고, 원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원료가 공급자의 농단으로 값이 올라가자 석유화학에 손을 댔다. 이어 석유화학에 필요한 원유 확보를 위해 석유회사, 나아가 원유정제회사를 차리는 식이었다.”

최종현의 수직계열화 경영의 꿈은1991년 6월 유공 울산 콤플렉스에서 새로 지은 9개 공장의 합동준공식이 열리면서 가시화됐다. 제4 정유시설, 신규 휘발유 제조시설, 파라자일렌 제조시설 등의 준공으로 유공은 휘발유와 기초 유분에서부터 합성고무, 합성섬유의 원료에 이르기까지 석유화학의 필수제품을 위한 생산시설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당시 서울대 조동성 교수는 “원유 개발부터 석유화학제품 생산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라면서 수직계열화의 경영전략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계 기업 사상 최초의 완전 수직계열화

“원유에서 최종 상품에 이르는 완전 수직계열화는 세계 기업 사상 최초의 일이지만 이와 함께 선경이 비관련 계열기업을 정리하여 그룹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연관산업 콩글로메리트(복합기업)로 통합시켰다는 데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 조치로 선경은 우리나라 그룹기업의 고질적 병폐인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고 경영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SK그룹 사보)

조동성 교수가 최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가을이었다. 당시 조 교수는 미국 보스턴 컨설팅그룹의 컨설턴트로서 걸프오일회사의 국제전략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 중에 신규 석유화학공장을 한국에 세우는 방안이 있었다. 당시 투자 파트너 후보 중에는 선경을 비롯해 여러 대기업이 포함돼 있었지만 조 교수가 만났던 최 회장은 여타 그룹 회장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최 회장은 조 교수가 제시한 걸프오일과의 석유화학공장 합작투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걸프오일이 한국의 유공 경영에서 언제 손을 떼려는가를 물어봤다. 그는 전혀 그만둘 계획이 없는 듯하다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걸프오일은 언젠가 한국을 떠나게 될 테니 두고 보라”면서 “선경은 이미 걸프오일의 유공 지분을 인수하는 것을 포함해서 석유사업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유공 인수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정보통신 사업 진출이다. SK그룹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함으로써 에너지화학 부문과 더불어 그룹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정보통신 부문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최 회장은 유공 인수 때와 마찬가지로 치밀한 정지작업을 다져간다. 최 회장은 1984년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우고, 여기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한다. 정보통신산업 선진국인 미국이 보유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미국과 한국에 유크로닉스, 선경정보시스템, 대한텔레콤 등을 잇따라 설립하여 정보통신 사업 진출에 대비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최 회장은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공식 천명하고 그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존 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 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또한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 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이런 분야들 중 나는 정보통신산업을 다음 사업 영역으로 선정하여 그룹의 중점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선경은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냈지만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는 시련을 겪는다.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라는 이유로 특혜 시비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최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선경의 사업권 획득이 정당한 노력의 결실임을 밝혔다.

<strong></div>1</strong> SK를 창업한 최종건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동생 최종현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1969년 수원 폴리에스테르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br/><strong>2</strong> 1975년 최종현 회장(오른쪽)이 ‘선경연수원’ 현판식 중 직접 간판을 걸고 있다. ‘선경연수원’은 국내 최초의 기업 연수원으로 기록됐다.<br/><strong>3</strong> 1994년 최종현 회장(오른쪽)이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br/><strong>4</strong> 최태원 SK그룹 회장 photo SK그룹
1 SK를 창업한 최종건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동생 최종현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1969년 수원 폴리에스테르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2 1975년 최종현 회장(오른쪽)이 ‘선경연수원’ 현판식 중 직접 간판을 걸고 있다. ‘선경연수원’은 국내 최초의 기업 연수원으로 기록됐다.
3 1994년 최종현 회장(오른쪽)이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4 최태원 SK그룹 회장 photo SK그룹

이동통신 인수전 때 보인 결단

“6년 동안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위해 착실히 준비해온 실력으로 선정됐다. 사돈인 노태우 대통령에게 선정 과정에서 신세 진 적이 없다. 1980년대까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체제를 완성하고 새로운 주력사업을 모색해 왔다. 당초 자동차·가전·중공업 등도 검토했으나 중복투자가 우려돼 1986년 9월부터 정보통신산업을 새로운 유망업종으로 결정하여 추진해 왔다.”

특히 최 회장은 “선정 과정이 정치적으로 문제시되고 부당성이 증명된다면 정부의 어떤 결정도 받아들이겠다”면서 “사업자 선정이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더라도 선경이 사업권을 획득할 것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단 한쪽으로 쏠려버린 여론을 돌리기는 벅찬 일이었다. 특히 대선을 의식한 집권당 대표의 반발이 매우 거셌다. 체신부의 발표가 있던 다음 날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여론을 이용하여 ‘제2통신 사업권의 선경 불가 주장’을 집요하게 펼쳤다. 김 대표와의 독대까지 거친 최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선경의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백지화하고 다음 정권에서 재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선경의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과 반납은 1992년의 10대 뉴스가 될 만큼 국내외의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고 이듬해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문제도 문민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

그후 김영삼 정부에서 한국이동통신 민영화가 추진될 때 선경은 최고 인수가를 제시하며 당당하게 인수에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시련은 있었다. 최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난처한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 이때도 최 회장은 과감한 결정을 내려 컨소시엄에서 빠지기로 결심한다. 선경의 단독 인수 소식으로 주당 8만원대이던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30만원대로 올랐지만 고가의 인수비용에도 최 회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시 최 회장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다. 우리는 기업을 산 것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산 것이다. 기회를 돈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 이렇게 해야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회사 가치는 더욱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나중에 최 회장은 “자칫 재계의 화목이 깨질 것이 걱정되어 또 한 번 물러섰지만 결국 재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회고도 남겼다.

최 회장은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며 경제 5단체 공동으로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를 발족해 ‘미스터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인하, 규제철폐, 쌀 시장 개방 같은 민감한 문제에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 IMF의 긴급지원을 받기 직전인 1997년 가을에는 폐암 투병 중이던 몸으로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청와대를 찾아가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해 “한국 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충언했다. 임종 직전까지 일등 국가의 비전을 지녔던 최 회장의 충정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1998년 8월 26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자택에서 별세했다. 화장이 드물었던 시절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이 이를 실천해 사후에 큰 울림을 남기기도 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중앙일보(1998년 8월 28일 자)에 추도문을 기고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지금 우리 경제는 회장님께서 수차례 예고하시고 경계해 오셨던 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위기상황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회장님의 혜안과 선견력을 되새기는 저희들의 우둔함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홀연히 눈을 감으신 회장님의 큰 자리를 이제 어떻게 채우고 남이 따르지 못할 경륜과 지도력을 무엇으로 배워 나가야만 합니까. 회장님께서 비록 몸은 떠나시더라도 영령은 우리 경제와 재계의 수호신으로 영원히 계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장학사업으로 사회공헌 밑거름을 닦다

최종현이 한국 기업사에 남긴 족적은 상당하지만 그중에서도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공헌에 선구자적인 자취를 남긴 일은 무엇보다 되새길 만하다. 21세기 일등 국가를 꿈꿨던 최 회장은 인재가 한국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봤다. 그는 1974년 세계적 학자 양성이라는 목표를 갖고 사재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일등 국가, 일류 국민 도약과 고도의 지식산업사회 건설’이라는 100년의 목표로 출발한 세계적 석학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44년이 지난 지금, 740여명의 해외 명문대 박사를 비롯해 3700여명의 인재가 이 프로그램으로 길러졌다. 이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최 회장은 “선진국 학생들은 강의계획서와 도서목록을 미리 입수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왔다”면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이 많지 않으니 재단이 이 부분을 챙겨 달라”는 당부도 남겼다. 이 덕분에 높이 5m에 이르는 한국고등교육재단 서고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인 전문 원서 1만5000여권이 빼곡히 꽂혀 있고, 지하정보실에도 1만9000여권의 장서가 더 보관돼 있다.

최 회장이 조림에 관심을 둔 것도 장학사업을 위해서였다. 1972년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세운 뒤 충남 천안 광덕산(500㏊)을 시작으로 충북 충주 인등산(1200㏊), 영동 시향산(2340㏊), 경기도 오산(60㏊) 등 4100㏊ 규모의 황무지와 임야를 사들여 꾸준히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키워냈다.

최 회장이 남긴 경영 DNA는 장남 최태원 회장에게 이어졌다. 2011년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한 최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 “하이닉스가 SK 식구가 된 것은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친의 못다 이룬 꿈을 언급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이미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다.

최태원 회장도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기업의 사회공헌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2006년 수원에 해비타트 SK행복마을 3개 동을, 2009년에는 SK청송노인복지관을 건립해 기부하는 등 해마다 사회공헌의 족적을 남겨 왔다. 특히 “SK그룹이 최고의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들여 충남 세종시 은하수 공원에 화장시설을 조성하여 2010년 1월에 기부했다.

최종건·최종현의 가계

최종건 회장은 노순애 여사(작고)와 사이에 3남4녀를 두었다. 장남 윤원(작고·SK케미칼 회장 역임)씨에 이어 SK네트웍스 회장인 차남 신원(70)씨와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인 3남 창원(57)씨, 장녀 정원(67), 차녀 혜원(65), 3녀 지원(63), 4녀 예정(60)씨가 있다.

최종현 회장은 박계희 여사(작고)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태원(61·SK그룹 회장)씨에 이어 차남 재원(59)씨는 SK그룹 수석부회장, 장녀 기원(58)씨는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내가 본 최종건·최종현 형제

“남다른 형제 경영은 경영학의 연구 소재”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수원의 군소 직물기업의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6·25전쟁으로 파손된 직기를 꿰맞춰 공장을 인수한 최종건과, 미국 유학 중에 경영위기의 도우미로 선뜻 응해 한국 재계 3위의 그룹으로 성장시킨 최종현 형제는 경영학의 특출한 연구 소재로 꼽을 만하다. 더구나 부자간 기업 승계가 아닌 드문 형제간 승계는 이들의 우애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형제의 우애가 아랫대에까지 이어져 별세한 최종현 회장의 남다른 조카 사랑과 그 뒤를 이은 최태원 회장의 사촌 배려는 주위 친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최종현 회장이 건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으로 합격하여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됐다. 시험에 합격한 다음 우리는 재단 장학생으로서 유학에 앞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사회과학도인 우리들에게 영어뿐 아니라 동양철학과 물리학 수업을 받게 한 것이다. 세계 지식인들과 경쟁하려면 사회과학도도 자연과학의 논리를 알아야 하고, 세계적 학자가 되려면 동양철학과 같은 아시아의 가치를 몸에 익혀야 한다고 하셨다.

한번은 사모님과 함께 스탠퍼드에 와서 중국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고는 대학원생 숙소인 우리 집까지 오셨다. 좁은 숙소에 빼곡히 둘러앉은 우리들에게 세계인이 되라고 강조하셨지만 말 속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넘쳤다. 엄청난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세계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머리 좋은 너희들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힘든 공부’를 ‘의미 있는 공부’로 바꾸게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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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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