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가 3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 전경. ⓒphoto SK
SK가 3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 전경. ⓒphoto SK

“산업계 전체가 요동치는 시기에 어떤 기업도 기득권을 주장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LG화학도 파괴적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먹잇감이 될 수 있다.”

LG화학 주가가 고공비행하던 지난 1월 필자가 ‘주간조선’ 칼럼난에 쓴 내용이다. 이 우려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현실화하고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자중지란으로 인해, 최근 두 회사 모두 위기에 휩싸이고 있다. 전기차 시대가 막 열리려는 때에 국내 2차전지 사업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 1위 자동차업체인 독일 폭스바겐은 지난 3월 15일 ‘파워데이(Power Day)’ 행사에서 LG화학(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생산하는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각형 배터리를 주력으로 쓰겠다고 선언했다. 폭스바겐은 지분 20%를 인수한 스웨덴 배터리회사인 노스볼트나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생산업체인 중국 CATL에서 각형 배터리를 공급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바겐을 주 고객사로 두고 있는 LG와 SK는 매출 하락 등 큰 충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이날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주가는 각각 7.76%, 5.69% 급락했다. 두 회사와 함께 ‘배터리 빅3’를 이루는 삼성SDI는 다음 날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 에코프로비엠, 포스코케미칼 등 2차전지 소재부품 업체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배터리가 한국을 먹여살릴 ‘제2의 반도체’가 된다”라는 말은 이제 쑥 들어갔다.

‘폭스바겐 쇼크’ 자초

업계에선 “LG-SK의 볼썽사나운 소송전이 ‘폭스바겐 쇼크’를 자초했다”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점’을 보면 이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 회사 간 소송에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면서 SK이노베이션에 10년간 미국 내 배터리 수입금지 결정을 내렸다. 다만 SK이노베이션과 배터리 공급 계약을 이미 맺은 자동차회사 포드에는 4년의 유예기간을 줬지만, 폭스바겐엔 2년밖에 주지 않았다. 이런 점이 폭스바겐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폭스바겐은 2023년부터 각형 배터리의 도입을 개시하겠다고 밝혔는데, 2023년은 SK이노베이션과의 2년 유예기간이 끝나는 시점이다.

폭스바겐은 “한국의 두 배터리 공급업체 분쟁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봤다”라고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ITC 소송 중에 폭스바겐은 원만한 합의를 요구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라고 전한다.

폭스바겐의 발표 직전까지도 LG와 SK는 이 싸움의 확전에 주력했다. SK 측은 3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짓는 배터리 공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친환경정책에 공헌하고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지아주 지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SK 배터리 10년 수입금지 조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거부권 행사의 근거를 무력화하는 차원에서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시장 5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조지아주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만약 외부 투자자가 SK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을 인수한다면 이를 운영하는 데 LG가 파트너로 참여할 수도 있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SK는 “무책임하고 도를 넘어섰다”라며 분노를 폭발했다. SK이노베이션은 입장문에서 “투자 결정 공시도 없이 5조원 규모를 신규로 투자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상원의원에게 서한을 보내 SK의 배터리 공장 인수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언론 보도가 있다”라며 “이번 소송의 목적이 SK를 미국 시장에서 축출하고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는 데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LG에너지솔루션은 “경쟁사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을 계획이 있는 고객들과 조지아주가 어떠한 불이익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재차 밝혔다. 그러면서 “경쟁사가 영업비밀을 침해한 가해 기업으로서 피해 기업인 LG에 합당한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안의 핵심”이라고 했다.

필자는 두 기업 중 어느 한 편을 지지해주고 싶지 않지만, SK의 분노에 이해가 가기는 한다. LG는 아마 자기 쪽으로 기울어진 승부에 쐐기를 박고 거부권 행사를 원천봉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SK이노베이션 조지아주 공장’에까지 손을 뻗은 것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이것은 ‘SK의 미국 내 배터리 사업 전면 철수’를 전제로 깔고 있다.

이 분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SK에 의해 침해된 LG의 영업비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가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침해된 영업비밀의 중대성 및 매출·수익 기여도에 따라 SK가 LG에 지급해야 하는 보상액이 결정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기초정보인 이 침해된 영업비밀은 영 공개가 안 되고 3조원, 5000억원 하는 액수만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대기업의 문제해결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SK이노베이션 이사회는 회사 측이 글로벌 분쟁 경험 부족으로 미국 사법 절차에 미흡하게 대처한 점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가 보기에, 그런 법률 기술 차원의 반성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기업윤리 문제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 소송과 관련해, 불리한 자료의 조직적 은폐 정황이 확인됐고, 이 점은 재판부에 부정적 인상을 줬다. 미국인들은 이런 증거 조작 시도를 정말 싫어한다. 회사 이름에도 붙은 이노베이션(혁신)은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비도덕적 행위와 함께 갈 수 없다. 이 회사는 윤리의 토대 위에서 혁신의 가치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구광모와 최태원으로 향하는 시선

정세균 국무총리가 나서서 화해를 요청했지만 두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은 실질적 최종 의사결정권자로 알려진 구광모 LG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이 소송전이 두 회사를 넘어 업계와 사회 전반에 해악을 끼치는 점은 이제 거의 명확해졌다. 이 추잡한 싸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2차전지 산업은 점점 힘이 분산되고, 무기력해지고 있으며, 평판을 잃어가고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우리나라는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한 적이 있다. 우리 정치는 상대편을 ‘빨갱이’나 ‘수구보수적폐’로 몰아 완전히 제거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분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수준이 낮다. ‘4류 정치’를 닮아가는 LG와 SK를 향한 냉소는 점점 커지고 있다.

허만섭 국민대 교양대학 부교수·전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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