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靜石) 조중훈(趙重勳)은 25살 때 트럭 한 대로 시작해 재계 8위의 육·해·공 종합 수송회사를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1945년 11월 1일 인천시 해안동에서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담아 해방둥이 기업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이후 “수송사업은 인체의 혈맥과 같다”는 지론으로 수송사업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정석은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신념을 앞세워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 한진중공업, 동양화재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한진그룹을 키워냈다.
정석은 1920년 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부친 조명희와 모친 태천즙 사이의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형편이 넉넉했다. 그는 1935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 휘문고보 2년을 수료했다. 그보다 20년 먼저 태어난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미동학교와 휘문고보 선배인데, ‘항공맨’으로 입지한 그의 생애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사실이다.
여덟 살이던 어느날 조중훈은 집에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재봉틀을 뜯어보겠다고 졸라댔다. 어머니는 귀한 재봉틀을 못 쓰게 될까 봐 보채는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종일 졸라댔다. 결국 어머니가 허락하자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드라이버를 움켜쥐더니 부속품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해체된 부속품들이 마룻바닥에 놓여졌다. 어머니가 재봉틀을 버리게 되었다며 체념하고 “다시는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야단치려는 순간, 아이는 기름 묻은 손으로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훔치더니 부품을 하나씩 집어들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는 가족들을 불렀고, 아이는 신통하게도 분해한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내 역순으로 조립했다.(‘정석 조중훈 이야기’·이임광)
아버지 사업 실패가 ‘낚싯대론’ 교훈으로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학문에 열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장남과 달리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차남이 탐탁지 않았다. 뜯고 고치며 집안 곳곳을 어질러놓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부친은 ‘지나치게 동(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靜)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휘문고보 시절 부족함이 없던 그의 집안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때 정석은 준비 없이 모르는 사업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통감한다. 훗날 정석은 이런 철칙으로 무리한 사업 확장을 경계한다. 모르면서 남들이 한다고 따라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며 ‘수송의 길’만을 고집했다.
훗날 조중훈은 이런 사업철학을 유명한 ‘낚싯대론’으로 정립했다.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운다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포인트를 잡아 하나의 낚싯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우리 기업들을 각성시킨 ‘선택과 집중’과 일맥상통한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위험요인을 최소화하는 위기관리 전략을 일찍이 터득하고 실천했던 셈이다. 낚싯대론은 오늘날 한진이 세계적 수송그룹으로 우뚝 서게 한 안전장치가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정석은 고심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진해 해원양성소로 갔다. 오늘날 해양대학의 모태였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라기보다는 선원이나 선박정비사를 키우는 기술학원 수준이었다. 숙식을 하면서 기술도 배울 수 있는 데다 월 8원이 넘는 봉급까지 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 찾아간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15원이던 시절이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술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정석은 일본 고베에 있는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할 수습생으로 발탁되었다. 일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은 그는 고베뿐 아니라 오사카와 히로시마 등지의 공업지대로 스카우트되며 귀한 경험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