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구조조정에 착수한 중국 하이난항공 소속 여객기. ⓒphoto 바이두
지난 3월 15일 구조조정에 착수한 중국 하이난항공 소속 여객기. ⓒphoto 바이두

중국 4대 항공사인 하이난(海南)항공의 파산과 함께 동북아 하늘길 구조조정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힐튼호텔, 도이체방크 등의 지분을 인수하며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오던 하이난항공의 모회사인 하이항(海航)그룹은 지난 1월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하이난성(省) 고급인민법원은 지난 3월 15일 하이난항공 및 321개 관계사에 대한 채권채무 조사 등 구조조정 절차 착수를 지시했다. 하이항그룹이 갚아야 할 채무는 2019년 6월 기준으로 약 7067억위안(약 122조원)이다. 이 중 951억위안(약 16조원)이 1년 내 갚아야 할 단기채무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이래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이다.

하이난항공은 하이난성 당국이 사실상 지배하는 최대 지방투자 기업으로, 지난해 기준 항공기만 230여대를 운용하고 있다. 자회사인 톈진항공을 비롯 서우두(首都)항공, 샹펑항공(럭키에어),홍콩항공 등 지분관계가 있는 포춘윙클럽 소속 12개 항공사가 거느린 항공기를 모두 포함하면 600여대가 넘는다.

지난 10여년간 항공사(홍콩항공·홍콩익스프레스항공), 호텔(래디슨호텔·힐튼호텔), 면세점(듀프리), 공항(프랑크푸르트한공항), 부동산(홍콩 카이탁공항 부지), 은행(도이체방크) 등 국적과 업종을 불문하고 먹어치우면서 ‘포식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이난항공의 거듭된 인수합병(M&A)의 뒷배경에 하이난성 서기를 지낸 중국 금융계의 대부(代父)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있다는 등의 각종 소문도 파다했다.

하지만 2018년 7월,하이난항공의 공동 창업자인 왕젠(王健) 전 회장이 해외출장을 떠났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한 관광지에서 ‘실족’이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는 등 위기설이 끊이지 않았다. 왕젠 전 회장의 실족사 직후, 미국에 망명해 중국 최고지도부의 추문을 거듭 폭로해온 궈원구이(郭文貴) 정취안(政泉)홀딩스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왕젠 전 회장은 하이난항공의 자금을 담당했고, 중국 지도부가 입막음용으로 살해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매년 거듭된 M&A로 인한 유동성 위기에 각종 정치적 의혹이 끊이지 않던 하이난항공은 지난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고 결국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하이난항공 측은 “하이난항공의 구조조정은 법치화, 시장화 원칙에 따라 채권, 채무를 해결할 것”이라며 “하이난항공의 일상적인 경영에 중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회장 의문의 실족사 후 위기설 계속

공중분해 위기에 처한 하이난항공을 어느 기업이 인수해 갈지도 주목된다. 사실 항공업계에서는 하이난항공의 무리한 M&A에 이은 왕젠 전 회장의 실족사로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한 2018년부터 “하이난항공이 중국 3대 국유항공사 중 한 곳에 피인수될 것”이란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하이난항공은 2019년 자회사인 홍콩(HK)익스프레스항공을 홍콩 캐세이퍼시픽항공에, 서우두항공의 지분 대부분을 베이징시 최대 여행 기업인 서우뤼(首旅)그룹에 매각하는 등 피인수에 대비해 몸집을 계속 줄여왔다.

가장 먼저 하이난항공 인수가 거명되는 곳은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는 중국국제항공(에어차이나)이다. 국제항공과 하이난항공 모두 국제선 허브로 베이징 서우두공항을 쓴다는 점과, 장거리 국제선이 강점인 국제항공과 국내선에 치중한 하이난항공이 결합할 경우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지역적으로 비슷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중국 최대 항공사인 중국남방항공이 하이난항공을 인수해갈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 같은 인수설에 국제항공과 남방항공은 측은 “관련 소식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부인해오던 터였다.

코로나19로 인해 항공 업황 자체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하이난항공의 새 주인 찾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지난해 중국 3대 국유항공사는 국제항공이 최대 155억위안(약 2조7000억원), 동방항공이 최대 125억위안(약 2조1700억원), 남방항공이 최대 108억위안(약 1조87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이난항공은 지난해 추정 손실 규모가 최대 650억위안(약 11조2900억원)대에 달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전 세계 하늘길이 막히고 항공사 파산이 잇따르면서, 총자산만 9806억위안(약 170조원)대에 달하는 하이난항공을 인수해갈 후보는 사실상 중국 정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3대 국유항공사를 제외하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2002년 중국 민항개혁으로 3대 국유항공사 체제가 만들어진 이래 최대 규모의 지각변동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7월 프랑스에서 실족사한 왕젠 전 하이난항공 회장. ⓒphoto 뉴시스
2018년 7월 프랑스에서 실족사한 왕젠 전 하이난항공 회장. ⓒphoto 뉴시스

하이난, 코로나19로 국내 여행수요 급증

중국 3대 국유항공사 중 한 곳이 하이난항공을 인수해 급속히 덩치를 불릴 경우 동북아 하늘길 재편 역시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역시 코로나19 사태 이후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에 피인수되면서 사실상 대한항공 1강(强) 체제로 재편된 상태다. 자연히 동아시아 하늘길을 놓고 각각 덩치를 불린 대한항공과 중국 국유항공사들과의 한판 경쟁이 불가피해진 셈이다.

하이난항공의 파산이 한·중 간 하늘길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하이난항공을 비롯 톈진항공, 서우두항공, 샹펑항공(럭키에어), 홍콩항공, 홍콩익스프레스항공 등은 인천공항을 비롯 제주공항, 김해공항 등지에도 취항해왔다.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은 코로나19의 영향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면서 국제선 역시 가장 먼저 재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하이난항공의 본사와 허브가 있는 하이난성은 중국 최대 관광지 중 한 곳으로 산둥성과 함께 2006년 한·중 간 항공자유화(오픈스카이)가 체결된 몇 안 되는 지역이다. 중국 최대 골프관광지로 한국 항공사가 마음만 먹으면 별도의 항공협정 없이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충분한 상용(商用)수요가 뒷받침되지 않아 국내 항공사들은 휴가철 성수기 때만 전세기를 띄우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하이난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안전한 관광지로 재부상하고 있다.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제주도로 국내 여행수요가 몰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하이난성을 홍콩을 대체할 자유무역항으로 육성하겠다”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침에 따라 지난해 6월부터는 하이난성 내국인 면세점의 1인당 면세한도를 기존 3만위안에서 10만위안(약 1730만원)으로 3배 이상 늘리고, 제품당 단가제한까지 풀면서 면세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지난해 하이난성의 면세점 매출은 274억8000만위안(약 4조76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3.7% 폭증했다.

역설적으로 중국 법원이 하이난항공 구조조정 착수를 지시한 직후인 지난 3월 19일 하이난항공 측은 “하루 여객수입이 2021년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하이난까지는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주로 쓰는 B737, A320 같은 중단거리 항공기로도 충분히 취항 가능하다”며 “하이난항공의 파산과 함께 노선 구조조정이 가속화하면 그 틈새를 한국 LCC들이 노려볼 만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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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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