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문양을 새긴 금 주화. ⓒphoto 셔터스톡
비트코인 문양을 새긴 금 주화. ⓒphoto 셔터스톡

디지털화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기존 화폐의 역사와 문제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화폐는 세상의 변화와 함께 변화해왔다. 원시시대에는 오랜 자급자족의 시대를 거쳐 물건과 물건을 서로 맞바꾸는 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동물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현상이 인간을 동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 그 뒤 교환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물물교환에도 무언가 교환의 매체가 되는 물품이 필요했다. 농경시대에는 곡식이나 가축이 교환의 매체가 되어 화폐 구실을 했다. 밀이나 소가 그런 경우이다. 이후 소금이나 옷감, 가죽 같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물 다음으로 발전한 화폐는 금속이다. 청동기시대는 청동검이, 철기시대는 철전이, 그 뒤에는 금·은이 사용되었다.

화폐가 갖는 대표적 기능은 ‘교환매개 기능, 가치척도 기능, 가치저장 기능’이다. 상업과 교역이 발달하고 상품의 종류가 많아지자 교환매개 기능 못지않게 가치척도 기능이 중요해졌다. 은이나 금으로 만든 ‘규격화된’ 금속화폐가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쓰였다.

이후 금속화폐 대신 금이나 은과 교환 가능한 지폐가 발명되어 통용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당시 중국에서 쓰였던 지폐가 소개되었을 때 서양 사람들은 어떻게 종이가 화폐 구실을 할 수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금속화폐가 지폐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용화폐 달러의 탄생

1971년 이른바 닉슨쇼크로 미국은 스스로 금과 지폐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 뒤 ‘신뢰’를 토대로 한 지금의 달러가 탄생했다. 이른바 신용화폐(Fiat money)다. 종이쪽지에 불과한 명목화폐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통용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게다가 이제는 지폐조차 갖고 다니지 않고 신용카드와 모바일페이 등을 사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역사에서 보면 신뢰를 기반으로 했던 화폐가 정부나 중앙은행에 의해 남발되면서 인플레이션을 불러와 국민들이 소유한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을 빼앗아가곤 했다. 공권력에 의한 인플레이션이라는 도적질이 버젓이 자행되곤 했다. 교환수단으로서의 편리성이 떨어지면 다른 종류의 화폐로 대체하면 되지만 신뢰가 붕괴되면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화폐가 지탱해주던 체제 자체마저 붕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로마제국, 스페인제국이 모두 인플레이션 통화 붕괴로 멸망했다. 화폐의 신뢰 문제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화폐의 역사에서 어쩌면 미래 화폐에 대한 힌트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힌트를 얻기 위해 먼저 화폐가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화폐는 특정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네안데르탈인은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피울 줄 알았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무리를 지어 매머드 같은 대형 포유류도 사냥했다. 사피엔스보다 크고 다부진 근육을 갖춘 데다, 한 차례 빙하기도 이겨냈던 강인한 네안데르탈인은 왜 전멸한 것일까?

비트코인의 모태인 비트골드 설계자인 ‘돈의 기원’ 저자 닉 재보. ⓒphoto news.bitcoin.com
비트코인의 모태인 비트골드 설계자인 ‘돈의 기원’ 저자 닉 재보. ⓒphoto news.bitcoin.com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긴 비결

비트코인의 모태라 불리는 비트골드를 설계하고 스마트계약 개념을 처음 제시한 닉 재보는 그의 책 ‘돈의 기원’에서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좋고 희귀한 물건을 가려내어 수집한 소장품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냥보다는 수집에 더 중점을 둔 이러한 문화가 소장품을 매개로 협력을 이끌어내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보다 10배는 빨리 인구가 늘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소장품, 곧 모피, 부싯돌, 동물 이빨 등이 부(富)로 간주되고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거나 교환되면서 가치저장의 수단이 되어 돈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구석기시대에는 쓸모 있는 돌들과 조개껍데기 등 현생인류들이 보기에 가치 있는 물건들이 소장품 겸 교환매체로 사용되었다. 화살촉이나 칼로 이용 가능한 흑요석이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구석기 유적에서도 백두산 흑요석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이다. 그 외에도 화석이나 광석 또는 돌도끼나 창촉, 화살촉으로 만들기 쉬운 돌들이 화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는 운반하기 힘든 큰 돌들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밀턴 프리드먼의 ‘화폐경제학’은 태평양 작은 섬의 돌 화폐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곳 사람들은 큰 돌과 운반 중 바닷속에 빠트린 돌도 화폐로 인정해 사용했다고 한다. 곧 화폐는 ‘신뢰’만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재질이든 어떤 상태에 있든 상관없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신석기시대에 주로 통용되었던 화폐는 조개껍데기였다.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배조개는 화려함과 견고성 때문에 기원전 3000년경부터 여러 문명에서 돈으로 쓰여왔다. 돈을 상징하는 한자 ‘貝(조개 패)’는 보배조개의 아랫면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다.

상업이 발전해서 ‘상(商)나라’라고도 불리던 은나라는 자연화폐인 패폐(貝幣)가 조달이 어려워 점점 유통의 한계를 드러내자 돌, 뼈, 도자기 등으로 패폐의 형태를 본뜬 석패, 골패, 도패 등을 만들어 썼다. 은나라 후기에는 청동으로 패폐를 만든 ‘동패(銅貝)’가 중국 최초의 금속화폐였다.

신석기시대에 수렵채취 생활이 농경과 목축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종종 교환의 매개로 가축들을 사용했다. 오늘날 자본을 뜻하는 ‘캐피털(capital)’도 소의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caput’에서 유래되었다. 옛날에는 소가 부의 상징으로 중요한 가치 저장수단이자 교환수단이었다.

인류 최초의 화폐단위 ‘세겔’

이후 농업의 발달로 사람들은 밀 다발을 화폐로 사용했다. 이때 밀(She) 다발(kel)을 ‘세겔(Shekel)’이라 불렀다. 그 뒤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동전 역시 세겔이라 불렸다. 세겔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화폐단위이다. 인류 최초의 화폐단위이자 최장의 화폐단위이다.

고고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최초의 주조화폐는 서양보다 동양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칼 모양의 도전(刀錢)과 쟁기 모양의 포전(布錢)이 그것이다. 도전에 ‘명(明)’ 자가 새겨진 명도전(明刀錢)은 연나라 화폐로 추정되는데 이는 화폐를 제조하였던 거푸집(금형)이나 공방들이 대부분 연나라 지역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주조화폐라 함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화폐를 뜻한다. 고대 중국과 조선은 이미 청동과 철광석을 녹여 만든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제품을 만드는 ‘주조’ 방식이 성행했다. 이러한 주조 방식은 서구에 비해 1000년 이상 앞선 기술로, 당시 서구는 청동이나 철을 두드려서 만드는 ‘단조’ 방식만 사용했다. 주조 기술은 1000도 이상으로 불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송풍이 가능한 터널식 가마와 숯이 있어야 가능했다.

청동기시대에 청동검은 누구나 선호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런 귀중품이라야 화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도전과 포전은 우리 고조선 유적지에서도 많이 발굴되는 유물이다. 고조선 영역에 속했던 한 유적에서 당시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무려 4000~5000점이나 항아리에 담겨 출토되어 고조선이 교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의 활발한 모피 교역 등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화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금 가치가 은보다 낮았다. 금은 생산량이 많았지만 은은 채취하는 데 상당한 기술이 필요해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국가경영’이라는 인식이 최초로 출현한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이 시기부터 중국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로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곧 경제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화폐 발행은 중요한 통치수단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중국 연나라 화폐였던 명도전(위)과 최초의 주화인 ‘일렉트럼 코인’(아래). ⓒphoto 위키피디아
중국 연나라 화폐였던 명도전(위)과 최초의 주화인 ‘일렉트럼 코인’(아래). ⓒphoto 위키피디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힘

기원전 7세기 제나라 관중이 쓴 ‘관자’ 제76편에 이런 말이 있다. “무릇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물가는 떨어지고,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높아지며, 양식 가격이 올라가면 황금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군주께서는 양식·화폐·황금을 저울질하는 권력을 통제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곧 화폐가 부족하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고 화폐가 과도하게 유통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적정 화폐량을 관리하여 안정적인 백성의 삶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이미 화폐가치에 대해 현대 경제학과 동일한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힘은 크게 5가지이다. 군사적으로는 당시 최첨단 무기인 기계식 활, 곧 쇠뇌의 대량생산으로 적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리고 지역 주둔군에 소금 전매권을 주어 주둔 경비와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케 하자 별도의 보급부대가 따라다닐 필요가 없어 속전속결이 가능했다. 재정적으로 소금과 철의 전매로 국고가 튼실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자라는 문자의 통일도 이뤘다. 그러나 무엇보다 통일 사업을 가속화한 힘은 바로 화폐의 통일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여러 지역에서 제멋대로 주화들을 만들어 모양과 무게가 제각각이어서 사용하기 불편했다. 이에 진나라는 무게가 반량짜리인 동전 ‘반량전’으로 화폐를 통일한 후 다른 나라 화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통일화폐를 만든 것은 7개국 중 진나라뿐이었다. 화폐가 통일되면서 유통이 촉진되어 시장이 발전하고 나라가 부흥했다.

‘한서지리지’에 고조선 ‘8조 금법’에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노비로 삼는데, 이를 면하려면 50만전(錢)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또 ‘삼국지 동이전’에 ‘고구려와 동옥저에서는 남자가 장가갈 때에 신부 집에 돈을 지불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돈들이 어떤 형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동옥저와 신라가 무문전(無文錢), 곧 ‘문양이 없는 금은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조선의 ‘해동역사’ 식화지(食貨志)에 있는 것으로 볼 때 고대한국도 이미 금속화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최초의 주화 ‘일렉트럼 코인’

서구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7세기경 지금의 터키 지역 리디아에서 쓰인 금·은이 천연적으로 혼합된 호박금(琥珀金·electrum)으로 만든 ‘일렉트럼 코인’이다. 이 금화는 앞뒤에 양각과 음각으로 사자가 새겨져 있다. 리디아의 왕 기게스는 그 가치를 보증하는 각인을 찍어 사용했다. 일렉트럼 코인 한 개는 소 5마리 가치였다. 하지만 이 최초의 주화는 등장하자마자 국가가 그 가치를 조작하여 본래의 화폐가치를 상실했다. 리디아에서는 그 뒤 소금을 이용해 금과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는데, 기게스의 후계자인 크로이소스는 기원전 550년경에 최초의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리디아왕국을 정복했으나 화폐 사용은 그대로 답습했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경화를 만들었다. 금화는 다리우스 이름을 따서 ‘다레이코스’라 불렸다. 당시 금과 은의 거래 비율은 1 대 13으로 태양과 달의 관계였다. 이후 아테네 집정관 솔론은 페르시아와 교역을 늘리기 위해 아테네의 드라크마 은화의 중량을 페르시아 은화와 맞추어 지중해 교역의 중심 통화가 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기축통화 시대를 열었다.

지폐는 동양에서 먼저 나왔다. 종이 자체가 먼저 발명됐을 뿐 아니라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9세기 당나라 때 이미 어음을 발행하는 ‘편전무(便錢務)’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비단길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들이 크게 성장했다. 또한 화폐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먼거리 교역에는 비전이라는 어음이 사용되었고 행(行)이라는 상인조합도 생겼다. 종이로 만들어 날아다닐 정도로 가벼운 돈이란 의미로 ‘비전(飛錢)’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후 송나라에서도 비전이 사용되었다. 송나라 지폐 ‘교자(交子)’는 이러한 어음에서 발전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

10세기 말 남송 사천 상인들이 사용한 ‘교자’가 세계 최초의 지폐다. 당시는 철전을 사용했는데 가치가 낮아 무겁고 불편했다. 비단 한 필을 사는 데 130근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16개 대형 점포가 연합해 철전을 함께 저장하고 등가의 지폐 ‘교자’를 발행했다. 일종의 예탁증서로 철본위제가 시행된 것이다. 훗날 북송은 교자의 발행권을 거두어 정부에서 직접 지폐를 발행했다. 그 뒤 금나라 시대에도 이를 사용하며 교자 혹은 교초(交鈔)라 불렀다.

중국에서 지폐를 발명한 지 700년이 지나서야 서양에서도 지폐를 만들었다. 1661년 스웨덴에서 구리 동전이 20㎏에 달해 너무 크고 무거워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자 동본위제 지폐가 처음 발행되었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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