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이 긴급 재건축 대상으로 지목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
오세훈 서울시장이 긴급 재건축 대상으로 지목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이 긴급 재건축 대상으로 지목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서울미래유산’이란 예기치 못한 걸림돌을 만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4월 21일, 4·7 보궐선거에서 함께 당선된 박형준 부산시장과 함께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재건축이 시급한 아파트로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콕 집어 언급했다. 오세훈 시장은 이날 청와대 오찬 직후 서울시청에서 연 브리핑에서 “대통령님께 재건축이 절박한 현장, 대표적으로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특정해서 꼭 한번 직접 방문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건의 드렸다”고 밝혔다.

오세훈 시장이 언급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여의도 개발 초기인 1971년 준공한 1584가구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다. 준공 당시만 해도 ‘고층’으로 불렸던 13층 아파트 24개 동으로 이뤄진 여의도 최대 아파트로, 국내 최초로 판상형 중층 복도식 대단지 아파트 시대를 개막한 아파트로 평가받는다.

당초 여의도 시범아파트 부지는 1968년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건축가 김수근에게 의뢰해 ‘여의도 계획’을 수립했을 때 대법원 및 시청 부지로 계획된 곳이다. 후임 양택식 전 시장은 서울시 재정난 타개를 위해 이 부지를 아파트 용도로 바꾸어 시범아파트를 지어올렸다. 홍익대 박병주 교수팀이 단지 설계를 맡은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 준공 당시만 해도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고, 단지 내 놀이터와 유치원 등을 갖춘 최고급 아파트였다. 준공 1년 전인 1970년 마포구의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를 의식해 각별한 신경을 기울여 튼튼히 지은 아파트란 평가를 받는다. 준공식 당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참석했을 정도였다. 이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필두로 서울 전역에 잠실주공 5단지, 은마아파트와 같은 판상형 중층 복도식 아파트 대단지가 대거 들어섰다.

하지만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준공된 지 50년이 된 현재 녹물이 나오고, 지하주차장이 없어 만성적 주차난을 호소하는 등 재건축이 시급한 아파트로 꼽힌다. 여의도 63빌딩 바로 맞은편에 있어 점심시간이면 외부 직장인들이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와 산책을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는 등 보안 및 주거환경도 열악하다.

그런데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가 박원순 전 시장 재임 중인 2014년 지정된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올라와 있어 재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된다. 해당 미래유산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 1층에 있는 한 부동산 중개업소로, 서울시는 2014년 이 중개업소를 미래유산에 등재하면서 “1970년에 개업하여 같은 지역에서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부동산”이라고 소개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는 별도 건물로 독립돼 있는 구조가 아니다. 63빌딩과 마주한 아파트 2개 동의 1층과 지하층에 걸쳐 식당과 부동산을 비롯한 각종 소형점포들이 회랑식으로 늘어서 있는 구조다. 자연히 재건축을 위해 아파트를 헐면 미래유산 훼손 역시 불가피해진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2016년부터 ‘신탁 방식’의 재건축을 추진해 왔으나, 박원순 전 시장 재임 때인 2018년 ‘여의도·용산 마스터플랜’이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반대로 보류되면서 재건축 일정이 크게 틀어졌다. 지지부진한 재건축 속도로 지난 4월 3일, 재건축 정비사업위원장도 현직 영등포구의회 부의장으로 전격 교체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유산’이란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또다시 등장한 셈이다.

해당 부동산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면 소규모 실내 수리 시 필요한 지원금을 신청하면 지원해 주는 정도다. 이마저 필요가 없어 신청하지 않았다”라며 “휴·폐업 시 미래유산을 반드시 보존할 의무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시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의 한 관계자는 “미래유산을 (건물 철거나 멸실 시) 절차적으로 반드시 보고를 해야 하는 법적 의무는 없지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연락을 해온다”며 “미래유산 철거 시에 서울시에 전화를 걸어 알리는 분도 있고 자발적인 제도이다 보니 연락을 안 주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미래유산 재건축 지연 트라우마

이런 말들을 감안하면 서울시 미래유산이 재건축 추진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앞서 재건축을 진행 중인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대단지 아파트 가운데는 ‘미래유산 예비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건축 사업 일정이 지연되는 사례가 많다. 또 일부 동을 원형대로 보존하라는 서울시 요구에 따라 재건축이 기형적으로 진행 중인 곳도 한두 곳이 아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개포주공 1단지(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와 4단지(개포 프레지던스 자이)가 대표적이다. 1980년대 지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신축 아파트를 올리고 있는 개포주공 1단지와 4단지 재건축 부지 내에는 다 벗겨지고 곰팡이가 스며든 페인트 외벽을 고스란히 드러낸 옛 아파트 1~2개 동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 1단지(1·2·4주구)와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역시 서울시가 단지 내 아파트 한 동과 굴뚝을 남기라고 권고하는 통에 재건축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남3구 아파트 재건축의 걸림돌이 된 아파트 한 동과 굴뚝 등은 정식 미래유산도 아닌 ‘미래유산 예비후보’ 리스트에 올라 있던 것들이다. 서울시 미래유산팀의 한 관계자는 “아파트 중 현재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없다”며 “이들 아파트는 도시계획위원회 등에서 과거 현장 남기기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남기기를 권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해당 부동산은 미래유산 정식 목록에 등재돼 있다. 박원순 전 시장 재임 중인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시가 지정한 ‘미래유산’ 488개 가운데는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의 부동산 중개업소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사례가 한두 개가 아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상가 1층에 있는 부동산과 단지 서측으로 나 있는 원효대교가 모두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정작 단지 동쪽에 있는 여의도 63빌딩은 미래유산 목록에서 빠져 있다. 1985년 준공된 여의도 63빌딩은 한때 동양 최고층 빌딩으로 2003년까지 약 18년간 국내 최고층 빌딩 지위를 유지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반면 1970~1980년대, 심지어 1990년대에 지어진 일부 집합상가는 광범위하게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일대 의류도매상가는 무더기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평화시장, 광희시장, 신평화시장, 에리어식스(현 동대문벨포스트), 신평화시장, 청평화시장 등 6개 의류도매시장이다. 이들 상가가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실향민들에 의해 형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 전문 도매시장’이란 것이다. ‘동대문 패션타운’이란 이름으로 주소지가 ‘미래유산’에 등재된 ‘밀리오레’와,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동대문 신발종합상가 A·B·C동까지 합치면 어지간한 동대문 일대 의류·신발 도매시장 대부분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셈이다.

1987년에 개장한 용산전자상가 역시 한두 개 건물이 아니라 나진상가, 선인상가, 원효전자상가 등 무려 3개 집합상가 9개 동이 한꺼번에 미래유산 목록에 등재돼 있다. 심지어 1998년 개장해 전자상가 후발주자라고 할 수 있는 광진구 구의동 테크노마트까지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국내 최초 벤처기업 집적시설’이란 것이 미래유산 지정 이유다.

이들 상가는 모두 건물 노후가 심하고 편의시설이 부족한 데다, 쇼핑 패턴이 온라인으로 급속히 옮겨가며 공실(空室)이 속출하고 있다. 하지만 보존에만 초점을 맞춘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탓에 재개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데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등포 쪽방촌’도 서울미래유산

노후불량주택 정비 등 재개발에 걸림돌이 되는 미래유산도 한두 개가 아니다. 6·25전쟁 직후 전재민들이 한꺼번에 몰려 형성되면서 주거환경이 열악한 용산구 해방촌이나 노원구 백사마을, 영등포 쪽방촌도 ‘미래유산’ 목록에 올라와 있다.

영등포 쪽방촌은 유동인구가 많은 영등포역 바로 옆에 있음에도 24시간 청소년들의 통행이 금지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다. 반면 서울시는 “광복 이후 형성된 집창촌이 1970년대 재개발의 영향으로 쪽방촌으로 변모한 곳이다. 재개발과 같은 지역 환경의 변화로 인해 변화되고 있는 도시 역사의 실체를 보여주는 장소”라고 미래유산 지정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 가운데는 시민단체 출신이었던 박원순 전 시장의 정치적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곳들도 한두 곳이 아니다. 마포구의 ‘성미산마을’, 강북구의 ‘삼각산재미난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이들 마을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로 서울시가 밝히고 있는 것은 “공동육아 및 대안학교 등 자녀양육의 문제를 주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 다양한 문화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주민의 삶의 질을 주체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는 마을”이란 점이다. 텃밭가꾸기 등을 하는 은평구 ‘산새마을’도 미래유산 목록에 올라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이 재임 중 치적으로 내세웠던 ‘서울역 고가도로’ 역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서울시는 “1970년 서울시내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하였던 서울역 주변 교통을 완화하기 위해 완공된 고가차도로 지금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보행길 ‘서울로7017’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을 지정 이유로 밝히고 있다. ‘서울로7017’은 불과 4년 전인 2017년, 기존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 개장한 공원인데 역사적 평가도 끝나기 전에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셈이다. 정작 박원순 전 시장은 재임 중인 2014년, 1968년 국내 최초 고가도로로 지어진 아현고가도로를 교통흐름에 방해가 된다며 철거한 바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이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로 임명했던 승효상 건축가의 스승 김수근 건축가가 남긴 서울시내 건축물 대부분도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덕성여대 도서관, 덕성여대 예술관, 덕성여대 자연관, 불광동 성당, 서울법원종합청사 본관동, 아르코 미술관, 아르코 예술극장,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잠실종합운동장,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본관, 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쌍용빌딩, 세이장(洗耳莊), 공공일호(구 샘터사옥) 등 무려 14개에 달한다.

건축계의 한 관계자는 “김수근과 동시대 쌍벽을 이뤘던 김중업의 건축물 중에는 미래유산이 몇 개 안 되는데 김수근의 작품은 지나치게 많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것 같다”고 했다. 건축가 김중업의 유작 중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서강대 본관, 세실극장, 삼일빌딩 등 3개에 그친다. 서울시 미래유산팀의 한 관계자는 “아파트는 특성상 100년간 보존하기도 어렵고 재건축 시 유산 등 재산권에도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다른 곳들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키워드

#뉴스 인 뉴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