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인 장원(粧源) 서성환(徐成煥)은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을 만들고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큰 뜻으로 국내 화장품 산업을 이끈 선구자이다. 그의 아호 자체가 “다시 태어나도 나는 화장품이다”라는 굳은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광복 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외제 화장품에 맞서 ‘아모레’라는 국산 화장품 브랜드를 창출하였다. 또한 쇠퇴해가는 우리의 차(茶) 문화를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일군 차 재배단지에서 설록차를 생산해 전통 녹차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장원은 1924년 7월 14일(음력)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에서 농사짓던 서대근과 윤독정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온후하고 욕심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살림살이에 마음을 두거나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장원의 17대조인 서보(徐補)는 고려 말에 전서(典書) 벼슬을 지내다 고려가 문을 닫고 조선이 새 하늘을 열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길을 택한 올곧은 선비였다. 반면 이웃 마을 생금리에서 출생한 장원의 모친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군살 없는 외모처럼 성품 또한 곧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가장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진 억척 어멈이자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심성을 지닌 여인이었다.
모친이 개성서 화장품 사업 시작
1930년 장원의 가족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했다. 이후 가족의 생계는 모친이 책임졌다. 개성에 정착해 서당에서 글을 익히던 장원은 1936년 중경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장원이 화장품에 눈을 뜬 계기는 가족이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작은 상점 덕분이었다. 이 상점은 처음에는 잡화를 취급하다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특히 장원의 모친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뛰어났다. 개성에는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소득수준이 높았고, 때문에 상류층의 머릿기름으로 동백기름이 잘 팔렸다. 그래서 장원의 모친은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고, 이를 기화로 사업을 확장했다.
“윤씨는 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했으며,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솥을 걸어 놓고 그 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만든 가내수공업 화장품은 품질이 우수하다는 입소문을 타 큰 인기를 끌었다. 윤씨는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창성상회(昌盛商會)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재계 파워그룹 58’ 서울신문)
모친의 사업을 돕던 장원은 1939년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화장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 해 남짓 자전거로 개성과 서울을 오가면서 머릿기름이나 화장품 원료 전반에 관한 식견을 쌓았다. 모친으로부터 화장품 제조법도 직접 배웠다. 1941년 개성 최초의 3층 양옥건물 ‘김재현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선망의 고급 제품이 가득하던 그곳에서 도매상을 통해 납품된 ‘창성당 제품’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장원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아예 백화점 화장품부에 매장을 개설한다.
하지만 장원은 1945년 1월 일제의 징병에 동원되어 고향을 떠나 북만주의 황량한 평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소속 부대를 따라 베이징으로 간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1945년 9월 5일 베이징에서 현지 제대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귀국할 형편이 될 때까지 장사를 해 귀국 비용을 마련했다. 제대할 때 받은 쌀을 팔아 산 염색약으로 군복을 염색했고, 이를 비싼 값에 팔아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장사를 하면서 베이징 시장에 진열된 각양각색의 진기한 물건들과 중국인들의 극성스러운 상혼에 자극받았는데 이는 훗날 기업가로서의 영감을 키운 밑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