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서성환

1924년 7월 14일(음력)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에서 태어남

1939년 개성 중경보통학교 졸업

1946년 일제 징병에서 제대 후 귀국해 모친이 세운 창성상회의 이름을 태평양상회로 바꿈

1947년 변금주와 결혼

1951년 국내 최초로 순식물성 ABC 포마드 출시

1959년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

1966년 세계 최초 인삼 화장품 ABC 인삼크림 출시

1989년 제1회 세계녹차심포지엄 개최

2001년 제주도 안덕면에 오설록 티뮤지엄 건립

2003년 1월 9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인 장원(粧源) 서성환(徐成煥)은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을 만들고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큰 뜻으로 국내 화장품 산업을 이끈 선구자이다. 그의 아호 자체가 “다시 태어나도 나는 화장품이다”라는 굳은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광복 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외제 화장품에 맞서 ‘아모레’라는 국산 화장품 브랜드를 창출하였다. 또한 쇠퇴해가는 우리의 차(茶) 문화를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일군 차 재배단지에서 설록차를 생산해 전통 녹차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장원은 1924년 7월 14일(음력)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에서 농사짓던 서대근과 윤독정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온후하고 욕심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살림살이에 마음을 두거나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장원의 17대조인 서보(徐補)는 고려 말에 전서(典書) 벼슬을 지내다 고려가 문을 닫고 조선이 새 하늘을 열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길을 택한 올곧은 선비였다. 반면 이웃 마을 생금리에서 출생한 장원의 모친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군살 없는 외모처럼 성품 또한 곧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가장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진 억척 어멈이자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심성을 지닌 여인이었다.

모친이 개성서 화장품 사업 시작

1930년 장원의 가족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했다. 이후 가족의 생계는 모친이 책임졌다. 개성에 정착해 서당에서 글을 익히던 장원은 1936년 중경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장원이 화장품에 눈을 뜬 계기는 가족이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작은 상점 덕분이었다. 이 상점은 처음에는 잡화를 취급하다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특히 장원의 모친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뛰어났다. 개성에는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소득수준이 높았고, 때문에 상류층의 머릿기름으로 동백기름이 잘 팔렸다. 그래서 장원의 모친은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고, 이를 기화로 사업을 확장했다.

“윤씨는 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했으며,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솥을 걸어 놓고 그 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만든 가내수공업 화장품은 품질이 우수하다는 입소문을 타 큰 인기를 끌었다. 윤씨는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창성상회(昌盛商會)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재계 파워그룹 58’ 서울신문)

모친의 사업을 돕던 장원은 1939년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화장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 해 남짓 자전거로 개성과 서울을 오가면서 머릿기름이나 화장품 원료 전반에 관한 식견을 쌓았다. 모친으로부터 화장품 제조법도 직접 배웠다. 1941년 개성 최초의 3층 양옥건물 ‘김재현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선망의 고급 제품이 가득하던 그곳에서 도매상을 통해 납품된 ‘창성당 제품’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장원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아예 백화점 화장품부에 매장을 개설한다.

하지만 장원은 1945년 1월 일제의 징병에 동원되어 고향을 떠나 북만주의 황량한 평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소속 부대를 따라 베이징으로 간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1945년 9월 5일 베이징에서 현지 제대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귀국할 형편이 될 때까지 장사를 해 귀국 비용을 마련했다. 제대할 때 받은 쌀을 팔아 산 염색약으로 군복을 염색했고, 이를 비싼 값에 팔아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장사를 하면서 베이징 시장에 진열된 각양각색의 진기한 물건들과 중국인들의 극성스러운 상혼에 자극받았는데 이는 훗날 기업가로서의 영감을 키운 밑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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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 유럽 시찰을 떠나는 장원(맨 앞).
2 1962년 산업박람회장에서.
3 1980년대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는 장원.
4 1980년대 제주 녹차밭을 돌보는 장원. ⓒphoto 아모레퍼시픽그룹

징병 갔다 중국서 키운 기업가의 영감

귀국한 장원은 모친이 세운 창성상회의 이름을 ‘태평양상회’로 바꿨다. 태평양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큰 바다이자, 모성을 닮은 생명의 근원이자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이기도 하다. 그는 원대한 뜻을 품은 상호를 택하면서 다시금 힘을 얻는다. 아울러 그는 개성을 떠나 서울에서 새로운 사업의 둥지를 틀기로 결정했다. 그는 남창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이어 1948년 1월 중구 회현동에 새로운 사업장을 열었다. 그러는 한편 김재현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근무하던 변금주와 1947년 결혼했다.

새 사업장을 열 때부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바로 화장품의 품질이었다. 그는 광복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때에도 모친에게 물려받은 품질 경영을 강조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쏟아 태평양상회의 제1호 제품으로 ‘메로디 크림’을 내놓았다. 인쇄소와 일본 브로커를 찾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포장 재료로 완벽한 ‘옷’을 입힌 제품이다. 화장품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고집스러우리만치 남다른 품질을 다진 제품이기도 했다.

메로디 크림과 이어 출시한 메로디 포마드의 선풍적 인기로 사업이 번성해 나갈 즈음 6·25전쟁이 터졌다. 장원은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로 화장품 사업에 집념을 보였다. 피란지에서도 제품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남성용 포마드는 만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미군의 영향으로 긴 머리를 포마드로 정돈해 좌우로 갈라 붙이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 무렵 그는 국내 최초로 번들거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윤기를 내는 식물성 포마드를 선보였다.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장식한 이 제품이 ‘ABC 포마드’였는데, 출시 반 년 만에 확대생산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선풍적 인기를 누린 ABC 포마드

1956년 장원은 부산에서 서울 후암동으로 복귀한 지 불과 2년 만에 지금의 본사 사옥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로 본사 공장을 옮겼다. 이후 장원의 태평양은 외형 성장에 비례하여 빠른 속도로 내실을 갖춰갔다. 장작불을 때 크림을 제조하던 가마솥을 대신해 스테인리스 용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냉각을 위해 사다 쓰던 한강의 얼음 대신 냉동기를 도입했다. 또 크림을 배합하는 기계도 새로 설치했다. 생산 라인은 반자동화를 거쳐 빠르게 자동화 단계로 발전해갔다.

장원은 아울러 미용재료상인 화성사를 설립했다. 화성사는 미용기술학교이자 이·미용업소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미용 재료와 미용 기구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여기에 겸하여 태평양이 생산하는 ABC 시리즈를 취급하는 재료 공급상이자 대리점 역할도 했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물품의 소비처인 미용학교나 이발소, 미용실은 입소문의 진원지였다. 당시 포마드를 애용하던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발소에서 이발사의 손을 빌려 포마드를 바르곤 했기 때문에, 이발사들의 말에 따라 얼마든지 소비 형태가 달라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미용기술학교와 이발소의 운영자나 종사자들은 화장품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론주도층이었다. 화성사 설립은 적극적인 시장 침투 전략의 선구적 사례로 지금도 거론된다. 이후 태평양이나 화장품 업계에서 전개한 현대식 마케팅의 시발점이었다. 마케팅의 귀재로서 장원의 능력은 이처럼 여러 형태로 발현되고 있었다.

장원은 전문가들에게도 늘 마음이 열려 있었다. 한 예로 그는 애써 영입한 기술자 구용섭씨에게 염색약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한 적이 있었다. 구씨는 염색약을 만들면 “집 한 채는 사주셔야 합니다”라는 말로 자신감을 표현했다. 실제 구씨가 염색약을 만들어내자 장원은 그에게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줬다. 장원은 그를 독일로 유학도 보냈다. 구씨가 독일에서 보낸 성실한 정보와 냉철한 제안에 따라 장원은 사업에 필요한 사출기계, 플라스틱병 제조기, 유화기기 등 유럽의 최신 설비를 수입했다.

프랑스 코티와 기술제휴를 맺다

장원은 1959년 봄 화장품 사업의 큰 스승이었던 모친을 여의었다. 그 무렵 ABC 분백분을 출시했는데 이것도 도발적인 광고와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시장에 선을 보이자마자 히트 상품이 됐다. 하지만 당시 명성을 떨치던 프랑스제 코티분의 아성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장원은 ABC 분백분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결국 프랑스 화장품 회사 코티와 기술제휴를 맺는다. 코티와의 기술제휴는 태평양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었고, 국내 화장품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형 사건이었다. 태평양의 사명에 걸맞은 큰 세상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장원은 1960년 7월 6일부터 8월 17일까지 40일간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기술제휴사의 초청을 받은 여행이어서 더욱 감회가 깊었는데 초청을 받아 방문한 기술제휴사 코티는 그에게 멋진 신세계였다. 당시 센 강변에 위치한 코티사는 3층 건물로 3만3000㎡(1만평)가 훨씬 넘는 넓은 땅 위에 우뚝 서 있었다. 100년 가까운 역사의 공간 속에서, 세계적인 품질과 우수성을 뽐내는 갖가지 화장품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는 생산 현장은 그에게 경이로웠다. 그곳은 장원의 눈에 공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유서 깊은 대학 캠퍼스처럼 보였다. 모든 생산 공정을 자동화한 최신 시설과 수십 개의 원료 저장탱크를 보며 장원은 부러운 마음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별에 와 있는 듯한 이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이처럼 근대화된 공장을 갖게 되고, 어떻게 기계화된 설비를 갖출 수 있을까? 놀라움과 부러움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길은 있을 것이었다.… 놀라움과 부러움, 그리고 커다란 숙제를 받아 쥔 것마냥 가볍지 않은 심정을 아울러 간직하면서 장원은 사흘에 걸친 코티사 공장 견학을 마무리했다.”(‘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이야기)

파리 일정을 끝낸 장원은 남프랑스에 위치한 작은 도시 그라스를 방문했다. 그라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의 고장이다. 안내자는 이곳이 세계 최대의 방향제와 향수 비누, 향료 제품의 생산지이자 교역 거점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라스가 성장한 것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라벤더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꽃이 끝없이 펼쳐진 농장을 돌아보며 사람과 자연이 이렇게 만날 수만 있다면 축복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유럽 방문은 국내 화장품 업계의 발전을 위해 그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장원의 차남인 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과 서울 한강로의 사옥.
장원의 차남인 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과 서울 한강로의 사옥.

인삼 화장품을 향한 집념 어린 연구

장원은 연구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연구실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자 집념이었다. 개성이 고향이었던 장원은 1964년 연구원들에게 개성에서 유명한 인삼으로 화장품을 만들어보자는 과제를 제시했다. 특히 그는 그라스를 여행하며 얻게 된 ‘식물 재배로 경제와 문화를 함께 키울 수 있다’는 구상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인삼의 약효와 관련해서 사포닌 성분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인삼 화장품에 대한 그의 의지가 펼쳐지면서 백지상태에서 인삼의 미용 효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원들은 인삼의 추출물을 모두 뽑아 효능을 샅샅이 연구했다. 그 결과 2년 뒤 드디어 ABC 인삼크림을 제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인삼 특유의 냄새나 피부에 발랐을 때의 자극을 제거해내는 단계까지는 못 갔던 것이다. 연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인삼 화장품이 제대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연구를 시작한 지 10년째인 1973년. 드디어 세계 최초로 사포닌을 원료로 한 ‘진생삼미’가 탄생했다. 이 제품은 일본과 영국, 캐나다 등으로 수출되기 시작했고, 1975년에는 고려청자를 응용한 디자인으로 용기를 바꿔 ‘삼미’라는 이름으로 세계시장에서 선보이게 됐다. 특히 이 제품에 대해서는 서양인들의 관심이 컸다.

문화 산업의 꿈 녹차로 영글다

이렇게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장원은 인삼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한방 식물로 관심의 폭을 넓혔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뒤따랐지만 1987년에는 피부에 아름다운 눈꽃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설화’가 개발되어 식물과 화장품의 조화라는 그의 소망을 실현했다. ‘설화’는 율무, 당귀, 치자, 감초산 등의 여러 한방 약초들에서 효능 물질을 추출하여 만든 제품으로, 본격적인 내용과 모양을 갖춘 한방 화장품이었다.

장원은 화장품 업계의 전근대적인 유통구조 개선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위해 방문판매 제도를 도입했는데 방문판매의 핵심은 제품, 조직, 인력이었다. 아울러 전 사원을 대상으로 상금을 내걸고 새로운 브랜드도 공모했는데 100여편의 응모작 중에 아모레(Amore·이탈리아어로 사랑)가 채택됐다. 아모레는 1959년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주제가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영원히 젊게 만드는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화장품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브랜드를 정한 다음에는 판매망 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바둑판처럼 나누고 특약점을 설치했고, 그 밑에 구역을 세분해 거미줄 같은 영업소 조직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1980년에는 특약점과 영업소가 전국에 총 664곳, 판매원은 1만6571명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장원은 ‘녹차 사업에 성공해 국민기업이 되자’는 야무진 문화 산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아름다운 집념’을 펼쳐간다. 1979년 한라산 남서쪽 중턱에 위치한 도순다원을 개척한 데 이어 1983년부터는 서광다원도 개간했다. 돌덩이만 가득했던 황무지에서 시작한 개간 작업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식수도 구하기가 힘들어 물탱크를 설치하기 위해 손으로 돌덩이를 부수며 땅을 팠고, 퇴비를 구하기 위해 오물이 넘쳐나는 양계장을 드나들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에 ‘오설록 티뮤지엄’이 문을 열었다. 녹차 사업은 장원의 오랜 신념과 뚝심이 일궈낸 문화 산업이라 할 수 있다.

장원은 이런 여러 업적을 남기고 2003년 1월 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벽제 선영에 안장되었다.

장원의 가계

장원은 부인 변금주(91)씨와의 사이에 2남4녀를 두었다. 장녀 송숙(74)씨와 차녀 혜숙(71)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혜숙씨는 김일환 전 내무장관의 3남인 김의광(72·목인갤러리 운영)씨와 결혼했다. 3녀 은숙(68)씨는 최두고 국회건설위원장의 차남 상용(69·고려대구로병원 간담췌외과 교수)씨와 결혼했다. 4녀로 미숙(63)씨가 있다.

장남 영배(65·와세다대 경영대학원 졸업)씨는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토목·건축 사업을 하는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 있으며,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작고)의 장녀 방혜성(61·이화여대 졸업, 태평양학원 이사)씨와 결혼했다.

차남 경배(58·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씨는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으로, 신춘호 농심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53)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장원 서성환

정부 감시 시퍼럴 때 ‘기자협회 10년사’ 제작비 후원

김병익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1975년 무렵 우리 언론은 많은 제약과 간섭, 통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쳤지만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었다. 그런 상황을 보다 못한 기자들이 나섰다. ‘기자협회 10년사’를 제작해서 기자의 사명이나 역사를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 나는 그 책의 출간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역스러운 일은 편집과 인쇄에 필요한 돈을 구하는 것이었다. 급한 대로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책에 광고를 실어 드릴 테니 광고비를 좀 주십시오.”

정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기자협회에 광고할 기업은 없었다. 광고가 어려우면 밥 한 끼 샀다 치고 돈을 달라 해도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나는 장원도 찾아갔다. 다른 기업인들의 반복되는 거절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갔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취지를 전하자 장원은 흔쾌히 돈을 내준 것이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는 돈을 받아들고 나오며 약속했다.

“고맙습니다. 책이 나온 다음 한 권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노력을 기울인 끝에 ‘기자협회 10년사’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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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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