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제국의 금은화. ⓒphoto 셔터스톡
스페인제국의 금은화. ⓒphoto 셔터스톡

16세기 스페인은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신대륙 발견과 중남미 식민지, 필리핀 등 동남아 식민지, 결혼동맹으로 획득한 오스트리아 등 합스부르크 영토,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왕국 등이 모두 스페인제국의 영토였다. 참고로 필리핀은 ‘필립 왕자의 땅’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제국의 이러한 외형적 팽창과는 달리 1492년 유대인 추방 이후 내실은 곪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재정 충당을 위해 신대륙 식민지에서는 현지 인디오들을 금은 채취와 제련에 강제 투입해 노역시켰다. 그렇게 하여 식민지 개척자들이 채굴한 금은의 5분의1을 본국 왕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를 ‘오일조(五一租)’라 불렀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중남미에서 약탈하거나 채취한 금과 은의 5분의1만 스페인 왕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신대륙으로 몰려갔다.

스페인 식민지 가운데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어 대량의 은이 스페인으로 밀려들어 왔다. 1503년부터 1660년 사이에 300t 이상의 금과 3만t 이상의 은이 세비야항구로 들어왔다. 이는 당시 유럽 전체 은의 무려 3배에 달했다. 16세기경에 스페인은 세계 금은 총생산량의 83%를 차지하는 최고 부국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통화량이 갑자기 늘어나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가 폭등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런 경제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무렵 ‘스페인에서는 은 빼고 모든 게 비싸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고 경제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그의 책 ‘15~18세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설명했다.

유입량만큼이나 막대한 은이 유럽 여러 나라로 빠져나갔고 그 은은 다시 국제 무역망을 통해 투르크와 페르시아, 인도와 중국까지 전 세계로 흘러나갔다. 스페인 은화는 엄청난 물량을 앞세워 국제 화폐경제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스페인의 ‘8레알’(페소 데 오초) 은화는 사실상 당시의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18세기에도 3만9000t 이상의 은이 스페인에 유입되었다. 스페인을 통해 세계로 풀려나간 은은 세계경제에 전례 없이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했고, 이로써 중세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국제무역 시대가 도래했다.

유대인 17만명 추방이 몰고 온 혼란

1492년 초 스페인제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콩키스타’, 곧 국토회복운동을 마무리했다. 이후 전쟁 비용으로 불어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이단 종교를 믿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 17만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이렇게 많은 유대인이 갑자기 사라지자 스페인제국의 금융산업과 유통산업은 붕괴되고 말았다.

1492년 7월 유대인 추방 직후부터 손실이 나기 시작한 스페인제국은 국고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와야 했다. 주로 제노바와 독일의 금융가에게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이후에도 팽창정책이 지속되어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중에는 그 이자조차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1543년의 경우 경상수입의 65%가 이미 발행된 정부 공채의 이자 상환에 지출되는 실정이었다.

1550년경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 유대인이 빠져나간 후유증으로 산업은 급속히 침몰했고 전쟁으로 돈은 무한정 빨려들어갔다. 더구나 영국 해적선들은 스페인 배들을 공격해 금과 은이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약탈하곤 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은 국가수입의 70%를 전쟁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 대규모 재정적자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 5세의 경우 재위 기간인 1516~1556년 40년 동안 부채만 4000만 두카트(Ducat)를 남겼다. 같은 기간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보화 3500만 두카트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두카트는 당시 기축통화 격인 베네치아 금화다.

그 뒤 1568년부터 80년간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일 때는 이보다 더 많은 적자가 났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식민지의 은이 거쳐가는 단순한 경유지로 전락했고 국내 산업은 침체했다. 스페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당시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징세와 통제를 강화했고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한다. 여기에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하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도왔다.

살인적 증세가 불러온 악순환

스페인은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증세를 서둘렀다. 그런데 증세 방법으로 최악의 세금징수 시스템을 선택했다. 바로 거래 때마다 부과되는 소비세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당초 부동산이나 일부 상품의 거래에만 부과되던 것을 점차 과세 대상을 확대해 식료품 등의 생활필수품에도 적용했다. 소비세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경기를 악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의 소비세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한 상품에 보통 세금이 서너 번 부과되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세수가 늘어나 좋겠지만 하나의 상품에 이토록 높은 소비세가 매겨지면 당연히 물가는 올라가고 경기는 나빠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대항해 시대에 물가가 대폭 올랐다. 스페인 물가는 은의 대량 도입으로 화폐 유통량의 대폭적인 증가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그에 더해 이런 무거운 세금제도가 물가 상승의 주범이었다.

스페인제국은 당시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여파로 북부 독일 군주들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게 발전하여 오스만제국과 프랑스 등 사방의 적들과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스페인제국은 광대하지만 흩어진 영토를 가진 탓에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를로스 5세는 이런 상태로는 하나의 왕조가 이를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그는 나라를 둘로 쪼개어 15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도하고, 이듬해에는 스페인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카를로스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펠리페 2세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와 더불어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다. 그가 1556년 등극하여 보니 1561년까지의 국고수입이 모두 저당잡혀 있었다. 결국 등극 다음해인 1557년에 최초의 파산선언(디폴트)을 했다.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 파산이었다.

스페인제국의 카를로스 5세 국왕. ⓒphoto 위키피디아
스페인제국의 카를로스 5세 국왕. ⓒphoto 위키피디아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 파산

이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하기 31년 전의 일이었다. 제국의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먼저 깨진 것이다. 한때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지역까지 합병하고 4개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운영했던 스페인제국이 사실상 파산한 것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뽐내던 스페인제국은 ‘기독교왕국’이라는 종교 근본주의에 갇혀 유대인을 추방함으로써 경제기반이 무너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페인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멈출 줄 몰랐다. 펠리페 2세의 과도한 정치적 야망으로 전쟁을 계속 치르는 바람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실 전비 차입방식이 문제였다. 한번 데인 금융업자들은 스페인 장기채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차입은 대부분 ‘아시엔토’라는 단기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채무를 단기로 빌리니 만기가 빨리 돌아왔다. 전쟁 중 만기가 되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계속 더 큰돈을 빌려 빚을 갚는 악순환에 빠져 단기채 계약을 계속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국유지와 광산이 채권자, 곧 부유한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결국 펠리페 2세는 견디다 못해 1560년에 다시 파산선언을 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572년에는 군사비 지출이 재정수입의 2배 이상 많았다. 게다가 유대인을 주축으로 한 네덜란드 함선들이 그간 스페인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안달루시아 등 주요 소금 생산지 항구들을 봉쇄하자 막대한 이윤이 남는 소금을 수출하지 못하게 된 펠리세 2세 통치하의 스페인은 또다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왕에게 돈을 대주던 채권자들도 위험을 감지하고 이자를 천정부지로 올렸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가 경제를 부흥시킨 네덜란드에서는 이자가 연 3%에 불과했는데 1573년 스페인 왕국은 연 40%의 이자를 물어야 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1575년에 세 번째 파산선언을 해야만 했다.

1576년에 이르러서는 병사들에게 지불해야 할 급료가 국가 수입액의 2.3배에 달했다. 이번에도 더 이상 막대한 부채를 해결할 길이 없었다. 이때 채무자들에 대한 지불중단을 선언하면서 등장한 것이 스페인 공채(juro)다. 채무를 장기융자로 전환한 것이다. 채무불이행 선언은 거의 20년을 주기로 5번이나 더 계속되었다. 메디치가보다도 돈이 많았다던 독일의 금융가문인 푸거가와 제노바의 은행가들이 여기서 거덜이 났다.

네덜란드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격멸한 1607년의 지브롤터 해전. ⓒphoto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격멸한 1607년의 지브롤터 해전. ⓒphoto 위키피디아

정부 수입의 70%가 이자로 빠져나가

1581년 여전히 개신교 지역으로 남아있던 네덜란드 북부는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인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에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파병했다. 그러나 오히려 칼레해전에서 영국에 대패했고, 이때부터 스페인제국은 완연한 쇠퇴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 작위나 영주권이 매매되었으며,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들여왔음에도 군사비 증대로 인한 국고 파탄은 막지 못했다. 결국 1596년에 또다시 대규모 파산선언을 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소금 수출을 봉쇄하여 전세에 승기를 잡았으나 이는 절임청어 사업을 주도하는 네덜란드에도 큰 타격이었다. 유대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는 소금 수입을 위해 멀리 중남미로 눈을 돌려 서인도제도에서도 소금을 공수해왔다. 17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아라야 갯벌 주변에 쌓인 엄청난 소금퇴적물 채굴을 시작해 베네수엘라와 네덜란드 사이에 매년 100여척의 배들이 오고 갔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다시 유럽 내 소금 상권과 절임청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강력한 해상무역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스페인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에 걸쳐 페스트까지 유행했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최전성기를 이끈 펠리페 2세가 1598년 암으로 서거할 무렵 이미 스페인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세입원이 저당 잡힌 상태였고 미래의 세입을 담보로 빌린 돈으로 국가재정을 꾸려야 했다.

이후 등극한 펠리페 3세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는 1599년 화폐를 주조할 때 모든 주화에서 아예 은을 빼버렸다. 시중의 구화도 강제로 신화와 교환케 해 여기서 뽑아낸 은으로 빚을 갚으려 했다. 이로써 저질 주화만 시중에 유통되고 금화와 은화는 해외로 유출되거나 자취를 감춰버렸다. 시중 화폐에 대한 불신은 통화 붕괴를 불러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그 뒤 스페인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1607년 네덜란드 함대가 지브롤터만의 스페인 함대를 격멸했고, 1648년에 마침내 네덜란드가 80년전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이어 1640~1668년에는 포르투갈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분리해나갔다. 1659년에는 프랑스 남서부와 북부 일부를 프랑스에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국가채무는 더 늘어갔다. 1560년에 380만 두카트였던 국가채무는 1667년에는 900만 두카트로 늘어났다. 당시 차입금은 정부수입 10년치였다. 채무가 늘어나자 이자도 높아져 정부 수입의 70%가 이자로 빠져 나갔다.

1678년에는 동부를 프랑스에 내주었다. 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직후인 1714년에는 시칠리와 나폴리 그리고 사르데냐와 네덜란드 남부지방을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다. 그 뒤 스페인은 세계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과도한 재정 팽창의 비극은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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