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약품 창업자인 노천 민병호의 장남인 민강 사장(왼쪽)과  제2 창업을 이끈 보당 윤창식 사장.
동화약품 창업자인 노천 민병호의 장남인 민강 사장(왼쪽)과 제2 창업을 이끈 보당 윤창식 사장.

노천(老川) 민병호(閔竝浩)·민강(閔橿) 부자와 보당(保堂) 윤창식(尹昶植)은 활명수로 유명한 한국 최고(最古) 제약사 동화약품을 창업, 승계하여 제약보국(製藥保國)을 실현한 우국지사들이다.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이 창립한 것은 1897년 9월.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보다 빨랐다. 한국 기업 전체로도 두산그룹(1896년 창업)에 이어 두 번째로 태어난 뿌리 깊은 기업이다.

1930년대 주식회사 동화약방 사옥 입구. ⓒphoto 동화약품
1930년대 주식회사 동화약방 사옥 입구. ⓒphoto 동화약품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

노천 민병호는 1858년 10월 15일 충북 청주에서 부친 민영석과 모친 한(韓)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금의 선전관(경호관)을 지낸 노천은 궁중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비방을 익히 알 수 있을 만큼 한약 지식에 능통했다. 그는 이러한 궁중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하여 일종의 혼합처방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活命水)이다. 한국에 온 미국 선교의사 알렌이 경이적인 서양의학을 선보인 지 10여년 후 궁중의 전래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보완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활명수는 신속한 약효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노천은 20대 초반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근시(近侍)의 직임인 선전관은 서반승지(西班承旨)로 불리기도 했다. 노천은 대궐 내외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평소 의약에 관심이 깊어 특히 전의들의 궁중 비방을 습득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노천은 당시 궁중 전의였던 알렌의 서양 의학술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금위대장 민영익을 빠른 시간에 완치시킨 것을 계기로 궁중 전의가 됐다. 노천이 서양 의학술에서 주목한 것은 그들이 우리 전래 의학을 인정한 부분이었다.

“초기 알렌의 의료 활동에서 괄목할 만한 방법 중의 하나가 한국의 전래 약전이나 치료 방법에 대해 사뭇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삼의 약효에 대해서 상당한 견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민간요법으로서의 침이나 뜸에 대해서 처음에는 불신과 경계도 하였지만 아주 절망적인 사람이 그 요법으로 회복된 경우가 있어서, 이 요법이 순수하고 소박하게 실시만 된다면 서양의학과 비교될 수 있음을 시인하였던 것이다.”(‘동화약품 100년사’)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남승룡 선수를 축하하는 동화약방의 신문 광고. ⓒphoto 동화약품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남승룡 선수를 축하하는 동화약방의 신문 광고. ⓒphoto 동화약품

알렌으로부터 서양의학을 접하다

노천은 선교의사와 접촉하여 서양의학을 알수록 근대 서양문명의 핵심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서양문명에서 최선의 것들이 선교와 함께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기독교인이 되어 한국 최초의 장로교파 교회인 정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의 가슴속에 기독교가 스며들자 자신과 이웃의 복리증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간 터득한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 만든 것이 활명수이다.

노천은 자신이 만든 활명수를 교우들에게 나눠 줘 복용케 하였다. 노천이 활명수를 처음 만든 까닭은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 위장장애와 소화불량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대대로 활명수는 신통한 효력을 보였다.

“활명수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큼직한 가마솥에 위장약 계통 각종 한약 건재를 넣은 다음 물을 붓고 한참 달이면 생약의 약물이 우러나와 진한 팅크로 변한다. 다음은 이 팅크를 솜을 넣은 고운 채로 걸러내는 여과과정. 그런데 곱게 빻아낸 수입약재 아선약과 정향 가루를 타고, 당시 새로 들어온 클로로포름과 박하를 묘미 있게 배합했다.”(‘동화약품 100년사’)

드디어 노천은 장남 민강과 함께 활명수라는 위장약을 주력제품으로 1897년 서울 중구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同和藥房)을 창업했다. 활명수는 급체, 토사곽란만으로도 죽어가던 구한말 사람들에게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어 불티나게 팔렸다. 아울러 가짜 제품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동화약방은 1910년 활명수를 보호하고 그 가치를 차별화하기 위해 부채표로 상표등록을 했다. 부채표는 많은 부채살이 한데 결속되어 있다는 의미의 일심동체를 뜻했다.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동화’의 뜻과도 합치한다.

한국 최초의 상표등록 등 동화약방은 기네스 4개 부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동화약방에 대한 기네스 인증서. ⓒphoto 동화약품
한국 최초의 상표등록 등 동화약방은 기네스 4개 부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동화약방에 대한 기네스 인증서. ⓒphoto 동화약품

기네스에 오른 최초의 상표등록

이는 국내 최초의 상표등록이었다. 이로 인해 동화약방은 기네스북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이자 제약사, 최초의 등록상표, 등록상품 등 4가지 부문에 등재된 기업으로 남게 됐다.

동화약방은 창업 초기부터 사회공헌 활동을 해왔다. 민강 사장이 설립에 참여한 사립 소의학교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1915년에 열린 조선물산진흥회에서 경품부 판매로 얻은 수익금 전부를 학교에 기부했다. 개인에게 돌아가는 경품은 없는 공익경품부 판매를 한 것이다.

소의학교는 1907년 인재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 서소문 밖 조개골에 있던 전 외부대신 이하영의 별장에 설립한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이하영이 초대 교장, 공동설립자로 참여했고 민강은 3대 교장을 역임했다. 1920년 소의학교는 봉래동(현 만리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3년제 소의상업학교로 바뀌었다. 1922년에는 5년제 남대문상업학교로 변신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화약방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항일 민족기업으로 각인돼 있다. 민강 사장은 1909년 항일구국단체인 대동청년당의 결성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동청년당은 신민회 소속의 청년들이었던 안희재, 서상일, 윤세복, 남백우, 김동삼, 김사용, 김규환, 신백우, 신팔균 등이 신민회 이념을 계승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강은 한성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에도 가입하였다. 대동단은 제1차 행동으로 의친왕 이강공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 계획은 압록강 건너 안동(현 단둥)역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대동단 간부는 거의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민강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동화약방에 설치된 상하이임정의 서울연통부를 기념하는 비석.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화약방 창업지인 서울 중구 서소문로9길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때 동화약방에 설치된 상하이임정의 서울연통부를 기념하는 비석.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화약방 창업지인 서울 중구 서소문로9길에 세워졌다.

동화약방에 설치된 임정의 서울연통부

이 기간 중 동화약방에는 비밀리에 서울연통부(聯通府)가 설치되었다. 서울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하이임시정부가 비밀연락 행정의 첫 조치로 국내와 국외의 연락을 목표로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서울에 설치한 비밀 행정부서였다. 연통제는 국내 각 시·도·군·면까지 조직을 갖추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연통부 활동은 1922년 일제가 전국의 여러 조직을 적발하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동화약방 창업지인 서울 중구 서소문로9길 14에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서울연통부 기념비’가 있다.

민강 사장은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최전방 행정책임자 역할도 했다.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지참했다가 현지에서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민강은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임정의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으로 임명됐다. 이후 한인사회 계몽과 민족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귀국해서는 동화약방 경영을 계속하면서 상하이임정의 자금조달책으로 활약했다. 그는 사업을 확장해 북간도, 하와이, 일본 등지까지 활명수를 수출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면 할수록 동화약방의 경영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경영자가 영어의 몸이 돼 있지 않으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느라 회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니 경영상태가 신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화가 보유했던 약품 허가 품목 수만 하더라도 전성기의 87종에서 24종으로 줄어들 정도로 사세가 위축됐다. 이러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민강 사장은 동화약방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게 된다.”(‘활명수 100년 성장의 비밀’·예종석)

1931년 동화는 액면가 50원의 보통주 2000주를 발행하면서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민강은 그해 11월 4일 4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6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당시 민강의 부친이자 동화의 창업자였던 노천은 74세의 고령이어서 경영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동화약품의 까스활명수 큐 생산시설.
동화약품의 까스활명수 큐 생산시설.

민족기업가 보당에게 경영권을 넘기다

그후 동화약방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아 경영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1937년 민강의 가족이 당시 민족기업가인 보당 윤창식에게 경영권을 인계했고, 보당은 동화약방의 제2창업을 이끌었다. 보당 역시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한 민족기업인으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업인이면서도 당대의 큰 인물로 꼽혔던 육당 최남선이나 인촌 김성수 등과 교유하며 사회사업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보당은 1890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부친 윤태진과 모친 나주 임씨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보성고보를, 1914년 보성전문(현 고려대) 상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듬해에는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결성에 참여해 총무직을 맡아 경제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항일비밀결사체는 민족경제 자립을 위해 일제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경제독립운동 단체였다. 보당은 다른 애국독립단체와 달리 주식제도의 장점을 주장하며 자금지원을 외부에 의탁하지 않고 자립 적립하려고 했다. 독립자금도 그런 방식으로 조달했다.

그는 1917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활동하던 단체를 산업진흥단체로 위장한 것이 통해 석방되었다. 보당이 조선산직장려계 사건에서 풀려나 본격적인 이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는데, 우선 적은 자본으로 사업이 가능한 정미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미업을 하며 근검절약으로 자본을 늘려갔다. 정미업을 하면서도 흰 쌀밥을 먹지 않고 싸라기만을 먹었으며, 이것도 떨어지면 곡식 중에서 가장 싼 핍쌀을 먹기도 하였다. 보당은 1922년 김주용이 시작한 보린회(保隣會)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서민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행랑식 주택을 보급하는 보린회 사업에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 김일선, 홍병선 목사 등도 가담했다.

1927년 보당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남모르게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지원 등 독립운동가로서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애국애족 활동을 바탕으로 그는 1937년 동화약방 제5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민족기업 부채표 동화의 제2창업자가 되었다. 그는 동화약방을 인수하면서 “오직 생명을 살리는 좋은 약만 만들자. 이 땅에서 핍박받는 동포들을 돕고 일제에 의해 쫓겨나 해외에서 유랑하는 동포들에게도 동화의 양약이 전해지게 하자”라는 각오를 거듭 밝혔다.

보당이 경영을 이어받은 1937년은 중일전쟁과 물자통제로 민족기업들이 사업을 영위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보당은 솔선수범해 인재 채용과 개혁을 주도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또 자본과 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지배인 중심의 경영 방침을 채택하고, 원리원칙과 정직, 성실을 바탕으로 기업 근대화를 추진했다.

동화약품 연구소
동화약품 연구소

지배인제도 도입 등 기업 근대화 추진

당시 보당은 지배인에게 실질적인 경영권을 이양하고 외무제도를 도매상 위주 영업으로 정착시키는 한편 재무도 독립시켰다. 또 전문 약사를 초빙하여 쇠퇴해진 제품 개발과 품질 관리를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1938년 보당은 만주국 안동시(현 단둥시)에 동화약방 지점을 개설해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광복 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국 지점을 잃고, 뒤이어 6·25전쟁으로 순화동 공장이 완파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보당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대학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는 등 나름의 역할을 했다. 당시 이 단체의 총재에는 이승만 박사, 부총재에는 김구 선생이 추대되었다.

보당은 62명으로 구성된 중앙상무위 위원으로 선임됐다. 중앙상무위에는 보당 외에도 오세창, 김법린, 방응모, 윤보선, 김동원, 전진한, 박종화, 허정, 장덕수 등 각계의 저명인사들이 고루 참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사회질서가 잡히고 안정을 되찾아 가면서 동화약방도 서서히 생산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보당과 그의 아들 윤광열은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순화동 공장 생산 시설은 공산군에 탈취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55년 환도와 더불어 순화동 공장을 복구하면서 동화약방은 다시 신제품 발매 사업을 확대했다. 사업 기반을 확충한 동화약방은 1962년 회사 이름을 동화약품공업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보당은 이듬해 3월 13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선영에 안장됐다. 그는 동화 식구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

동화약품은 보당의 유언대로 지금도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다. 동화약품 산하 동화약품연구소는 현재 항암제와 함께 면역질환, 호흡기질환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합성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천식과 항감염제 적응증 기반의 천연물 신약도 임상단계에 있다.

활명수 역시 매년 독특한 디자인을 담은 아트 컬래버레이션 ‘활명수 기념판’을 선보이며 아직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활명수 기념판의 판매수익금은 아프리카 등 물 부족 국가의 식수 정화, 우물 설치, 위생교육 사업 등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

노천 민병호·민강 부자

보당 윤창식

1897년 민병호·민강 부자 동화약방 창업

1910년 부채표 상표등록

1919년 서울연통부 설치

1937년 윤창식, 동화약방 인수

1967년 까스활명수 발매

1973년 국내 최초 희귀약품센터 설치

1978년 국내 최초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 실시

1995년 서울연통부기념비 본사 설치

2015년 신퀴놀론계 항균제 ‘자보란테’ 식약청 허가

보당의 가계

보당은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화열(작고)씨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차남 중열씨는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3남 광열(작고)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보당의 세 자매는 모두 숙명여고를 다녀서 보당은 숙명여고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맏딸 선열씨는 서울대 약대를, 차녀 덕열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3녀 옥열씨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였다.

보당의 뒤를 이어 장남 화열씨가 1963년 동화약품공업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화열씨는 광복 후 혼란기에 동화가 생산을 재건할 때부터 취체역(이사)으로 일해 왔다.

그 뒤를 이은 보당의 3남 윤광열 회장은 보성전문(현 고려대) 재학 시절 일제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광복군에 합류해 중대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활명수에 탄산을 첨가한 까스활명수를 개발한 주역으로, 1973년에 한국 최초의 희귀약품센터도 개관했다. 그는 또 국내 최초로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도를 도입하여 국내 기업과 노동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동화약품은 윤광열 전 사장의 장남인 윤도준 회장(70·경희대 의대 졸업 의학박사·신경정신과 전문의)이 2008년부터 이끌고 있다.

내가 본 동화약품

숱한 위기 극복한 ‘활명수 경영학’ 현재도 유효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 교수

활명수의 역사는 바로 대한민국의 근세사이자 의약품의 역사이며 나아가서 근대적 기업 경영의 자취나 마찬가지다. 일찍이 의약품을 통한 대중구제를 결심해 활명수를 개발하고 동화약방을 창업한 노천 민병호, 그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초대 사장 민강, 쓰러져가는 동화약방을 인수해 다시 일으켜 세운 사회운동가 보당 윤창식, 그 뒤를 이어 성장의 기반을 닦은 그의 아들 가송 윤광열 등의 이야기 속에는 민족기업인의 자부와 긍지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활명수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침략자들에게 수난을 당했고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는 회사가 존폐의 고비를 넘겼으며, 수많은 경쟁자의 공격과 외환위기의 어려움까지 감내해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활명수는 시대를 뛰어넘는 경영철학으로 어려운 시기마다 슬기롭게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오늘의 험난한 기업 환경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경영자들이 한 세기 전의 선조에게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활명수 경영학을 통해 우리 모두 어떠한 위난도 이겨낼 수 있는 예지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키워드

#한국의 명가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