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펑크 운동의 대표주자인 위키리크스 편집장 줄리안 어산지. ⓒphoto AP
사이퍼펑크 운동의 대표주자인 위키리크스 편집장 줄리안 어산지. ⓒphoto AP

원래 인터넷은 군사용으로 개발되었다. 1960년대 미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ARPA)의 연구용 네트워크가 시초이다. 처음에 미 국방부는 중요 군사정보를 철벽 요새를 구축한 뒤 그곳에 중앙 서버를 두고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핵미사일의 요새 공격에 대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 서버를 분산 설치한 뒤 이를 서로 연결하면 일부 서버가 공격당하더라도 나머지 서버들로 관리할 수 있다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로써 대학 4곳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아르파넷(ARPANET)’이 1969년에 탄생했다. 이후 여러 대학과 기업에서 아르파넷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요구가 생겼다. 미 국방부는 1973년 아르파넷을 군사용 ‘밀넷’과 민간용 ‘아르파넷’으로 분리시켜, 아르파넷을 민간에 개방했다. 이것이 오늘날 인터넷의 시작이다.

인터넷의 원조 ‘아르파넷’

여기에 더해 1975년 미국 정부는 군과 정보당국이 독점했던 암호기술까지 민간에 개방했다. IBM에 연구용역을 맡겨 만든 새로운 암호체계 DES(Data Encrytion Standard)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보당국의 술수가 있었다. 정보당국이 암호 내용을 검열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에 암호화를 우회하는 뒷문(backdoor)을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발각돼 제거되었다. 그 뒤 암호학자들과 컴퓨터과학자들 주도로 프라이버시 보호를 추구하는 사이퍼펑크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 초 레이건 정권은 ‘경제를 시장의 효율에 맡기자’는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로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 이론을 신랄히 비판했다. 케인스 이론은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완전고용을 이루고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여 부자증세로 소득불평등을 보완함으로써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책이다. 반면에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효율을 중시하며 ‘자유시장, 규제완화, 자유무역, 외환시장 개방’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부작용도 발생했다.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미국의 전략에 의해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기회로 삼은 IMF에 의해 강제로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을 개방당하면서 국부가 털려나갔다. 미국 지식인 사이에서도 신자유주의가 피도 눈물도 없는 ‘무한경쟁을 초래’하여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분배의 악화’를 가져온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레이건 정부가 실시한 부자감세 정책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계승한 이 정책은 소득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켜 심각한 부의 편중을 몰고 왔다.

“삶에 대한 조사와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사이퍼펑크의 활동은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감시의 상징인 정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사이퍼펑크 운동은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암호(cypher) 체계를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가장 먼저 우려한 암호학자는 데이비드 차움이었다. “현재 기술의 발전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호 장치와 개인 데이터에 접근하고 수정할 수 있는 권리를 모두 공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이 계속된다면 그들의 엄청난 감시 잠재력은 개인의 삶을 전례 없이 집중된 감시와 권위에 취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사이퍼펑크 운동에 불을 지핀 차움이 1991년에 한 말이다.

그는 1992년 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 방향으로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전례 없는 조사와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고, 또 다른 한 방향으로는 개인과 조직 간의 안전한 평형관계(패리티)가 유지되고 있다. 다음 세기의 사회 형태는 어떤 접근 방식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비트코인 탄생의 배경은 사이퍼펑크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에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이퍼펑크 모임이 시작됐다. 사이퍼펑크족은 정부로부터의 사생활 보호를 극도로 중요시했다. 금전거래 내역 역시 보호돼야 할 사생활의 일부로 보았다. 모임의 주요 멤버는 수학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에릭 휴즈, 인텔 시절 컴퓨터 칩의 알파입자 문제를 해결한 티모시 메이, ‘시그너스 솔루션’의 창립자 존 길모어 등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산발적으로 추진하던 프라이버시 보호 운동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암호학자들은 서로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합동 연구를 시작했다.

에릭 휴즈는 1993년에 발표된 사이퍼펑크 선언문에서 “프라이버시는 전자시대의 열린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프라이버시는 비밀과는 다르다. 프라이버시는 세상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비밀은 어떤 누구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세상에 선택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거대기업들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암호화된 익명 거래시스템을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티모시 메이는 공산당 선언을 흉내 낸 ‘암호화무정부주의자 선언’을 쓰기도 했다. 다양한 암호화 기술에 심취한 사이퍼펑크족들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기도 했다.

블록체인의 바탕기술 ‘가단성암호화’

사이퍼펑크 모임에서 개발된 여러 기술이 훗날 비트코인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하버드대학 여성 컴퓨터학자 신시아 더크와 분산 컴퓨팅 분야의 권위자인 유대인 대니 돌레브가 공동 개발한 ‘가단성암호화(Malleability)’ 기술이다. 이는 암호화된 데이터를 사용한 작업이 쉽게 변화되도록 설계한 기술인데 블록체인의 바탕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사이퍼펑크 사람들은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것이 열린사회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린 사고방식을 활용해 사람들의 익명성을 지켜줄 수 있는 도구를 지속적으로 개발키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퍼펑크 사상에 공감했고, 사이퍼펑크 운동은 소속 회원들끼리 뉴스와 관련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으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사이퍼펑크는 하나의 사회운동에서 점차 집단의 모습을 갖춰갔다. 이메일을 통해 정책, 철학,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수많은 논의들은 인터넷과 탈중앙화, 보안에 대한 개념 정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네트워크상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시작된 사이퍼펑크 운동은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자라나는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1990년대 인터넷 보급은 정보 공유와 개인의 의사소통 확장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사이퍼펑크 운동을 주도하는 암호학자들이 우려하는 사태가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국가조직이나 거대기업은 개인정보의 효율적 관리라는 명목으로 서버로 집중되는 정보의 감시와 검열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명 ‘빅 브라더’의 출현이다.

내부고발자 웹사이트 ‘위키리크스’ 편집장 줄리안 어산지도 1990년 이래 사이퍼펑크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1992년 펴낸 ‘사이퍼펑크: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에서 “해방을 위한 최고의 도구였던 인터넷이 전체주의의 가장 위험한 조력자로 변신했다. 인터넷이 인류 문명을 위협한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의 감시활동을 고발했다. 구체적인 증거도 나열하며 우리의 모든 표현과 의사소통, 웹페이지, 메시지, 그리고 검색용어들이 수집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국의 국가안보국, 영국의 정보통신본부 등 전자 감청기관들이 방대한 정보를 수집, 보관한다고 주장했다.

사이퍼펑크 사회를 그린 대표적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사이퍼펑크 사회를 그린 대표적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어산지와 스노든의 폭로

현재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이용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는 대부분 민간기업이 제공한다. 개인이 이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용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인정보가 자동으로 수집되기도 한다. 어산지는 자신의 책에서 민간기업이 개인정보를 가지고 ‘민영 비밀경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부와 손잡고 사용자 정보를 팔아넘기고,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통제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산지는 이 책에서 인터넷이 전체주의의 위험한 조력자로 변신한 과정을 낱낱이 폭로하며,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함께 싸워 나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약자에게 프라이버시를, 강자에게 투명성을’이라는 사이퍼펑크의 전통적 모토를 강조했다.

어산지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미군의 이라크 민간인 사살 영상을 공개하더니, 7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보고서 7만7000여건, 12월 국무부 외교전문 25만여건을 연이어 폭로했다.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기밀정보를 세 차례나 공개해 2011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위키리크스는 2017년에는 미 중앙정보부(CIA)의 사이버 정보센터 내부망에서 확보한 문서 수천 건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CIA가 애플,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전자기기를 원격조종해 일반인을 도·감청해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성전자의 스마트TV에 악성 코드를 설치한 뒤, TV 주변의 음성 등을 포착했으며, 이런 도·감청 기술은 TV가 꺼져 있을 때도 작동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2013년 6월 10일, 전직 미국 국가안보국(NSA) 계약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가디언과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미국 국가안보국과 영국 정보기관들이 전 세계 유명인사와 일반인들의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정보 등의 개인정보를 ‘프리즘(PRISM)’이란 비밀정보수집 프로그램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수집, 사찰해온 사실을 폭로했다.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이 브뤼셀의 유럽연합본부는 물론 미국 주재 38개국의 대사관을 도·감청한 사실도 폭로했다.

사이퍼펑크 운동은 기본적으로 정부나 거대기업은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개인이 정보를 갖고 어떤 행위를 하든 감시하지 말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이러한 감시와 간섭은 개인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인식이다.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원래 제러미 밴덤이 구상했던 원형감옥을 뜻한다.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감옥이다. 현대사회의 감시체계를 상징한다.

상대가 원하면 일분일초 단위로 감시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메일, 메신저, 크레디트카드, CCTV, 위치추적, 계좌추적 등은 감시체계의 유용한 도구가 돼버렸다. 예전에는 카카오톡 검열과 전화 도청도 있었다. 어떤 메일은 메일내용을 자동 파악해서 그에 맞는 광고까지 보여준다. 크레디트카드의 추적 또한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우리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SNS) 활동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가치기준과 취향에 맞는 페친들과 광고로 둘러싸이게 된다. 우리의 정보가 노출되고 감시된 결과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올린 소셜미디어 글들을 통해 신상이 털리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공격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 카카오톡을 통해 오간 개인의 대화가 정부 사정·정보기관에 넘겨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내에서 텔레그램의 점유율이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또 페이스북 가입자 8700만명의 학력과 전화번호, 종교, 정치 성향 등의 정보가 외부에 넘겨졌다는 소식도 나왔다.

인터넷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행동이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60명의 감시자가 당신의 모바일과 PC 모니터를 매일 지켜보고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이 매일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누구와 친한지, 어떠한 내용의 메신저를 주고받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상품을 구매했는지를 60개 업체가 추적·분석하고 있다. 이를 알게 되면 당신의 온라인 행동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이 모습은 이미 현실이다. 2015년 웹 프라이버시 센서스에 따르면, 온라인상 이용자의 행태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쿠키가 사이트당 평균 60개씩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보호란 21세기에 적극적으로 부활시켜야 할 기본권이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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