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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3호]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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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한국 덮친 환율전쟁의 여파, IMF 사태 부른 시장의 저주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2021-11-18 오전 8:33:36

▲ 1997년 12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금융지원 협의차 방한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접견하고 있다. photo 연합
강대국의 통화팽창과 환율전쟁이 개도국을 어떻게 피폐화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1971년 8월 미국은 자기들이 주도해 만든 브레턴우즈 협정을 스스로 깨버리고 국제 외환시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세계 외환시장에 큰 충격을 준 이른바 ‘닉슨쇼크’이다. 미국은 금과의 고리가 끊어진 달러의 발행량을 1970년대 내내 매년 11% 이상 늘렸다. 방만한 통화팽창 정책은 결국 탈이 나고 말아 미국은 10년 동안 고인플레이션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게 된다. 경기부진과 물가오름세가 같이 나타나는 스테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미국을 덮쳤다. 동시에 미국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함께 높아지는 쌍둥이 적자에 허덕였다. 미국은 이러한 적자를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바로 달러의 평가절하였다. 선진 5개국 장관이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 은밀히 모여 달러를 평가절하시키고 엔화와 마르크화를 절상시켰다. 플라자합의가 채택되자 엔화는 일주일 만에 8.3%, 서독 마르크화는 7% 각각 상승했고, 이후 2년 동안 엔화와 마르크화는 달러화에 대해 각각 65.7%와 57% 절상됐다. 그만큼 달러가치가 상대적으로 절하된 것이다. 이게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단초였다.
   
   중국 정부도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해 대미 수출경쟁력에 차질을 빚자,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에 대항하기 위해 위안화 공정환율의 평가절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84년 달러당 2.8위안이었던 것이 1986년에 달러당 3.2위안, 1989년에는 4.7위안, 1990년 5.2위안으로 연속적으로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렇게 위안화는 계속 계단식으로 평가절하되다가 1993년 말 달러당 5.8위안이던 공정환율이 이듬해 관리변동환율제를 도입하자 수직 상승해 1월 25일 8.7위안까지 급등해버렸다. 한 달도 안 되어 무려 49.8%나 평가절하된 것이다. 1984년을 기준으로 하면 달러당 2.8위안이 10년 만에 무려 300% 이상 평가절하된 것이다. 이로 인해 달러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의 인건비가 3배 이상 싸지며 외국 제조업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이후 중국 정부도 위안화를 단기간에 너무 많이 평가절하시켰다고 여겨 강세 통화로의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서부터 주변국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외국인 자본이 위안화 강세가 진행되는 중국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국들로부터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자 기초 여건(펀더멘털)이 튼튼하지 못한 주변국들이 하나둘씩 외환위기에 봉착했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태국의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도 안전하지 못했다. 결국 1997년 IMF 사태를 맞았다. 그 무렵 우리의 기초 여건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당시 상황을 복기해본다.
   
   
   구매력 평가설을 무시한 한국의 환율
   
   IMF 사태 당시 원달러 환율은 800원대였다. 환율 결정요인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길게 보면 궁극적으로 양국 간의 구매력 평가 차이에 수렴한다. 경제학 용어로 ‘구매력 평가설’인데 장기 환율결정이론이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올림픽을 준비하기 시작한 1984년의 환율이 800원대였다. 이때부터 1997년 IMF가 일어날 때까지 13년간 한·미 양국 간 물가상승률의 누적 차이는 30%를 웃돌았다. 미국의 연간 물가상승률이 3% 안팎일 때 우리는 연평균 5.4%로 13년간 물가가 97.5%나 올랐기 때문이다. 구매력 평가에 따르면 우리 원화의 환율이 달러에 비해 30% 이상 올라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우리 환율은 1984년에서부터 1997년까지 13년간이나 계속 800원대 내외에 머물러 있었다. 구매력 평가설에 따르면 1100원대 이상에 있어야 할 환율이었다.
   
   정권의 논리는 단순했다. 군대식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적 긍지를 높이고 ‘1만달러 시대’를 앞당겨 ‘선진조국 창조’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정치적 캠페인이 정권의 존립 기반과 연결되어 성역화 조짐을 보였다. 결국 정치 논리가 시장경제 논리를 무시하고 강하게 사회를 리드하면서 시장을 무시했다. ‘1만달러 시대의 선진조국 창조’에 집착하여 원고를 고집하는 무리한 시장방어가 계속되었다.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외국 헤지펀드들이 이걸 놓칠 리 없다. IMF의 원인이야 많겠지만 직접적 주범은 인위적으로 고평가된 환율이었다. 환율만 시장에 맡겨놓았더라도 혹독한 외환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원화의 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내 금리를 국제금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고금리정책이 필수적이었다. 결국 부채비율이 높은 우리 기업들만 녹아났다. 이처럼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진 것은 정권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종금사의 돈놀이가 화 불러
   
   게다가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세계화’는 사실상 외환과 금융에 대한 급진적 규제 철폐를 불러왔다. 그리고 감독기구 같은 것도 없이 ‘종금사(종합금융사)’와 같은 금융업체 설립이 허가되었다. 이 종금사가 이른바 ‘만기 불일치’ 방식의 금융업 돈벌이를 처음 선보였다. 금리가 싼 엔화 단기대출을 얻어다 금리가 비싼 국내 시장과 동남아 금융시장에 투자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종금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해외에서 이자가 싼 자금을 들여와 이자가 비싼 국내에서 돈놀이를 했으니 앉아서 큰돈을 벌었다. 이러니 종금사 설립은 거대한 이권이 되었다. 정권은 무더기로 종금사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환율이 상승하면 종금사는 환차손을 입을 수밖에 없다. 달러당 800원에 10억달러를 들여왔다면 총 8000억원을 돈놀이해서 해외 이자와 국내 이자의 차이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환율이 1100원으로 오른다면 원금은 7억3000만달러로 줄어든다. 환차손이 원금의 30%에 이르러 이자 차익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되면 종금사는 대부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금융기관이 비슷한 처지였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당시 정권은 결사적으로 환율을 방어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원화 환율의 800원대 고집은 결국 탈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부터 흑자로 들어섰던 우리 무역이 1990년대 들어 적자로 돌아가면서 1997년 IMF 때까지 7년간 무역적자 행진이 계속된 것이다. 특히 외환위기 직전 4년 동안의 국제수지 적자는 430억달러로, 1990년대 중반의 외환보유고보다 두 배나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막대한 단기외채를 들여와 외환보유고를 메워야 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10년 이상 800원대를 고집한 원화의 환율을 1990년대 중반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외환시장의 시장기능에 맡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환율이 자연스럽게 올라야 국제수지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환율을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당시의 관치경제는 국내 자금의 배분과 이자율의 결정, 그리고 외환의 배분과 환율도 관 주도로 결정했다.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변 이후의 이런 관행을 부족한 재원의 효율적 집중과 선택이라 여기고 정부 관료는 물론 언론 등 어느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계경제의 변화에 둔감했다. 무역적자의 누증은 국가의 외환보유고가 점점 줄어든다는 의미로 그 끝은 국가 부도였다. 결국 외환위기를 맞아 그동안 시장을 무시했던 원화가치는 한꺼번에 폭락하여 환율이 순식간에 폭등했다. IMF 뒤 1998년 1월의 평균 환율은 1707원, 1년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올랐다. 이 과정에서 환율을 억지로 방어하려다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것이다. 800원대에 판 달러를 1700원대에 다시 사들여야 했다. 엄청난 국고의 손실이었다.
   
   
   “한국 관료와 종금사는 근친상간 관계”
   
   “한국 관료와 종금사는 근친상간 관계에 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1997년 말 한국에 구제금융을 주기 직전 외신 기자회견에서 퍼부은 독설이다. 이 얼마나 영원히 씻기 힘든 쓰라린 비난인가. 캉드쉬만 당시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니다. “한국 정부는 모든 것을 비밀로 덮어두고 군대와 같은 수직적인 조직에 휩싸여 있다. 한국 국민은 우선 정부 관료들이 수년간 양산한 쓰레기 청소부터 해야 할 것이다.”(루디거 돈부시 MIT대 교수) “한국 경제 몰락의 원인은 지적으로 무능하고 부도덕한 금융 관료 때문이다.”(독일 ‘디 자이트’) “한국이 그동안 고속성장을 이룬 것은 한국 국민의 근면성, 교육열, 저축심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이 모든 것을 망쳐놓고 있다.”(폴 크루그먼 당시 MIT대 교수)
   
   IMF를 불러온 또 다른 배경에는 미국의 금융우선정책도 도사리고 있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미국의 달러는 10년 동안 약달러를 지향했지만 도저히 무역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미국 제조업은 점점 더 경쟁력을 상실해갔다. 일본의 엔화가 80엔까지 떨어지고 미국의 저성장이 지속되자 미국은 작전을 바꾸었다. 그들이 제조업의 대안으로 찾은 것이 ‘금융’이었다.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점을 무기로 해 무역수지 적자를 자본수지 흑자로 메워 보기로 한 것이다. 월가는 그때부터 해외 공략 전진기지가 되었다. 당시 이를 주도한 사람이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다. 루빈은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으로 월가 유대 금융계의 대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전후로 등장한 ‘워싱턴 컨센서스’는 미국의 경제체제 확산 전략이다. 한마디로 외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빗장을 강제로라도 열어 미국 자본의 활동무대로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외환위기 같은 위기 발생을 제3국의 구조조정 기회로 삼아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를 심겠다는 미 행정부와 IMF,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거시경제 안정화, 경제 자유화, 사유화, 민영화’가 그 뼈대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시행해야 할 구조조정 내용은 ‘정부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매수 허용, 정부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등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때 해당국 집권세력의 비리를 폭로하고 무력화해 구조조정을 하게 한다는 전략도 도사리고 있다. 또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방치함으로써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관철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의 외환위기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아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전략이다. 조지 소로스는 이를 ‘시장근본주의’라고 비난했다.
   
   1997년 11월 시작된 외환위기 당시 우리 정부는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118억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애당초 무지한 게임이었다. 1992년 영란은행과 이듬해 유럽 주요 국가들이 헤지펀드에 당하는 모습과 과정을 조금만 유심히 보고 공부했더라면 이런 객기를 부리지 않았을 터였다. 이 통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만 바닥났다. 달러를 비싸게 사서 싼값으로 시장에 팔아치운 꼴이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IMF와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1997년 11월 중순 IMF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뒤에도 재정경제부는 아시아태평양 재무차관회의가 열린 필리핀 마닐라에 엄낙용 차관보를 보내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차관을 면담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한국 금융기관들에 빌려준 단기채무 상환을 연장해 주도록 대장성이 적극 나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그 뒤에는 미국의 훈수가 있었다.
   
   
   한국을 밀어붙인 미국의 유대인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위기 사태 초기부터 직접지원 방안을 배제한 채, 오직 IMF를 통한 지원 방안만 강력히 고수했다. 그 전제는 한국 경제의 강력한 구조개혁, 곧 ‘완전개방 시장경제체제’로의 환골탈태였다. 미국 정부는 이 같은 방침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시 일본 정부가 추진하던 아시아통화기금을 포함해 한국이 시도하던 다른 자금조달 수단을 차단했다.
   
   당시 국제사회가 한국에 우선적으로 요구한 두 가지는 ‘투명성 확보와 상호보증 해소’였다.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멀쩡해 보이던 한국 기업이 픽픽 쓰러지자 월스트리트의 한국 담당자들은 일제히 투명성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은 회계가 엉망이다. 채무가 기록이 안 돼 있다.” “부채 규모를 파악할 수가 없다. 상호지급보증 때문이다.” 이런 지적들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박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돈이 빠져나갔다. 당시 미국의 서머스 차관은 “한국 금융기관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 규모를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정리가 불가피한 금융기관을 선정해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환율제도도 조속히 자유변동환율제로 전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1997년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입국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로 미셸 캉드쉬 총재를 찾아갔다. 캉드쉬는 비밀협상을 현장에서 지휘하려고 내한한 것이다. 그 와중에 대통령은 경제부총리를 경질했다. 임창렬 부총리가 한국 경제의 키를 새로 잡은 11월 19일 오후, 임 부총리는 서울에 와 있던 가이트너 차관보와 IMF 피셔 부총재를 차례로 만났다. 모두 유대인이었다.
   
   가이트너로부터 전해들은 미국의 입장은 확고했다. “한국이 현 금융위기를 넘기려면 IMF의 자금 지원을 받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IMF를 통하지 않고 양자 지원을 통해 한국을 도울 수는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미국 현지에서의 압박도 심했다. 루빈 미국 재무장관은 11월 20일 오전에 한국 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히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IMF에 손을 벌리라는 경고성 메시지였다. 당시 미국 재무부 3인방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는데 결국 우리의 IMF 사태는 이렇게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1월 20일 외환시장은 달러가 거의 증발한 상태에서 4일째 거래가 중단되었다. 이튿날 재경원이 마지막 순간까지 IMF 자금지원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으나, 밤 10시20분경 임 부총리가 IMF 자금지원 요청을 전격 발표했다. 지원금액과 조건 등 실무협상은 11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협상이 막바지에 들어서자 미국 대통령까지 나섰다. 클린턴은 11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요구했다. “12월 첫째 주가 되면 한국은 파산이다.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이라는 게 통화의 요지였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은 우리 관료들이 ‘튼튼한 펀더멘털’을 강조하던 1997년 중반부터 이미 단기부채 급증으로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경고했다. 결국 11월 말 정부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장부상에 남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외환보유액 300억달러가 실은 거의 바닥났다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 국민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정부는 마침내 IMF에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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