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문라이트’ 포스터. 아카데미 시상식에 파란 리본을 달고 온 ‘러빙’의 주인공 루스 네가. ‘히든 피겨스’ 포스터.
(왼쪽부터) ‘문라이트’ 포스터. 아카데미 시상식에 파란 리본을 달고 온 ‘러빙’의 주인공 루스 네가. ‘히든 피겨스’ 포스터.

지난 3월 6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반(反)이민 행정명령’ 수정판을 발표했다. 지난 1월 27일 발동한 행정명령이 법원의 효력정지 판결로 사문화됐기 때문이다. 수정판에서는 입국금지 대상을 무슬림 7개국에서 이라크를 뺀 이란, 시리아, 리비아, 수단, 소말리아, 예멘 6개국으로 줄였다. 6개국에 해당하더라도 미국 영주권자나 비자 소지자의 입국은 허용된다. 처음 발표한 원안보다 일부 완화된 편이나 ‘무슬림 입국금지 조치’라는 기본정신은 그대로다. 위헌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무슬림 6개국 출신의 입국을 90일간 금지하고 난민 입국은 120일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폴라이트 뉴욕대 교수는 “트럼프 내각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기용하는 행정 관료도 백인 남성 일색이다. ‘흰 남자들의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미국에서 역설적으로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환호를 받고 있다. 현실의 결핍을 예술로 대신 채우려는 일종의 풍선효과다.

이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드러났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에서도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모든 배우 수상 부문에 흑인 배우들이 이름을 올린 첫 오스카 시상식이 됐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덴젤 워싱턴이 영화 ‘펜스’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러빙’의 루스 네가가 여우주연상 후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 엘리가 남우조연상에, ‘펜스’의 비올라 데이비스, ‘문라이트’ 나오미 해리스, ‘히든 피겨스’의 옥타비아 스펜서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중 남녀조연상은 모두 흑인 배우에게 돌아갔다. ‘문라이트’의 메허샬레 엘리와 ‘펜스’의 비올라 데이비스가 조연상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달빛 아래에서는 모두 파랗다 ‘문라이트’

이 중 작품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은 ‘문라이트’는 소외의 3중고를 앓는 흑인 소년의 이야기다.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난 흑인 소년 샤이론은 왜소한 체구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또래의 소년들에게 괴롭힘을 받는다. 이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블랙’이라고 부른다. 마이애미의 화창한 날씨는 그가 겪는 시련을 더욱 무람없이 보여준다. 그가 평온을 되찾는 시간은 해가 지고 달이 뜬 뒤다. 달빛 아래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그저 파랗게 보일 뿐이다. 영화의 제목이 ‘문라이트(Moonlight)’인 이유다.

‘노예 12년’에 이어 흑인으로는 두 번째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의 베리 젠킨슨 감독은 “영화에는 나의 성장기가 담겼다”고 말했다. ‘문라이트’의 프로듀서 아델 로만스키는 “TV로 시상식을 보고 있을 유색인종 소년·소녀들이 조금이나마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고 했다.

첫 흑백 커플의 이야기 ‘러빙’

올해 아카데미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 이슈로 뜨거웠다. 시상식에 참여한 영화인들이 한목소리로 ‘반(反)트럼프’를 외쳤다. 식전 레드카펫 행사에서 배우들은 파란색 리본을 달고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법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실화 영화 ‘러빙’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루스 네가는 붉은 드레스에 파란 리본을 달았다. 그의 부모는 에티오피아와 아일랜드 출신이다.

‘러빙’은 1958년 인종 간 결혼이 금지되어 있던 버지니아주에서 첫 부부가 된 흑백 커플 러빙 부부의 이야기다. 실제로 루스 네가는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아이리시 간호사, 아버지는 에티오피아 의사였다고 한다. 러빙 부부와 다른 점은, 흑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편견에 시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스 네가는 인터뷰에서 “‘러빙’은 국립 아프리카계-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에서 상영된 첫 무삭제 영화다. 사람들은 ‘러빙’을 조용한 영화라고 하지만 ‘러빙’은 지금 이순간 가장 목소리가 큰 영화”라고 말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을 맡은 미국 코미디언 지미 키멜은 “국가가 분열될수록 우리가 뭉쳐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것을 시작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올해는 모두 사라졌다. 모두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분장상을 수상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 제작진도 수상 소감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모든 이민자에게 이 상을 바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여성·소수인종 장관 지명자는 고작 5명이다. 클린턴 내각은 12명, 오바마 내각은 14명이었다. 트럼프 정부에서 각료급으로 지명받은 여성은 교통부 장관인 일레인 차오, 유엔 대사인 니키 헤일리, 교육부 장관인 베시 디보스와 중소기업청장인 린다 맥마흔 등 4명뿐이다. 이는 시간을 거의 레이건 시절로 돌린 셈이다. 레이건 때 2명, 아버지 부시 정부 때 5명이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미국의 ‘히든 피겨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숨겨진 숫자, 숨겨진 존재’라는 뜻으로 우주 개발을 두고 러시아와 대결하던 1960년대, NASA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천재들의 실화를 담은 드라마다. NASA의 전산실에서 일하던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은 오직 실력으로 NASA의 핵심 인력이 된다. 당시는 버스도, 화장실도, 도서관도 유색인종 자리가 따로 있던 시절이다. 영화는 세 명의 수학천재들을 통해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캐서린 존슨에게 ‘대통령 자유훈장’을 선사했다. 미셸 오바마는 ‘히든 피겨스’의 백악관 시사회에서 “절대 쉽게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라며 별 다섯 개의 만점을 주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건 ‘히든 피겨스’만의 특별한 수치다. 성별로 보면 전체 관람객의 64%가 여성이다. 인종으로 보면 37%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히스패닉도 13%가량 차지한다. 트럼프 시대를 사는 여성, 유색인종 관객이 이 영화관의 ‘히든 피겨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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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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