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 가돗은 군필자다. 김옥빈은 태권도에 합기도 유단자다. 갤 가돗은 DC코믹스 최초의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의 다이애나이고, 김옥빈은 칸영화제 초청을 받은 여성 액션영화 ‘악녀’의 주인공 숙희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할리우드에서 여성 원톱 액션영화를 선보였다. 아테나보다 현명하고 아프로디테보다 아름다운 전사 ‘원더우먼’은 수퍼히어로 영화 중 처음으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히어로 단독 주연작이다. 여성 감독이 맡은 영화 중 처음으로 제작비 1억달러가 넘는 영화이기도 하다.

1941년 TV 드라마에 처음으로 여성 영웅이 탄생했다. 순간이동술을 쓸 줄 알고 괴력을 지녔으며 무슨 무기든 막아내는 강철 팔찌를 찬 ‘원더우먼’이었다. 삼각형 모양의 헤드밴드를 쓰고 붉은색 상의와 푸른색 하의를 입은 원더우먼의 등장은 강렬했다. 그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75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현실계와 영화계에서 깨뜨릴 유리천장은 공고하다. 도장을 깨듯 현실의 벽을 넘는 여성 히어로 영화에 대중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원더우먼’은 남성 영웅들만큼이나 강인하고 무적이지만 한 가지 특기할 점이 있었다. 바로 ‘진실의 올가미’를 쓴다는 것이다. 대지의 신 가이아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진실의 올가미는 이들이 싸워야 하는 것이 악의 세력일 뿐 아니라, 여성에게 세상은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진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옥빈의 ‘악녀’는 악녀 숙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숙희는 어떻게 악녀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숙희는 중국 연변에 살다 11살 때 아버지가 무참히 살해된다. 이후 살인청부업을 하는 집단에서 길러진 그는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녔으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집단에 이용된다. 정병길 감독은 “악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악녀가 된 여자의 운명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성 액션’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보통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유연하고 섹시한 액션이 아니라 유능하고 압도적인 기술을 쓴다. 정병길 감독은 이미 ‘우리는 액션배우다’ ‘나는 살인범이다’ 등의 영화로 ‘한국 액션영화의 신세계’를 연 바 있다. 그 자신이 액션배우 출신이기도 하다. 그의 말이다.

“숙희는 웬만한 남자보다 더 힘든 훈련을 받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킬러다. 여자 대 남자의 액션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의 액션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래서 액션의 합을 만들 때에도 여성 캐릭터라 해서 특별히 다른 합을 짜지 않았다.”

한편 ‘원더우먼’은 여전사로 태어난다. 고대 아마존 종족이 만든 나라 데미스키라의 공주 다이애나는 여성들의 나라에서 길러진다. 데미스키라는 그리스어로 ‘정의의 여인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전사로 훈련된다. 실제로 ‘원더우먼’의 패티 젠킨스 감독은 이 부족 여전사들로 전·현직 스포츠 선수를 캐스팅했다. 복싱 챔피언 출신 배우가 다이애나를 훈련하는 아르테미스 역을 맡았다. 봅슬레이 은메달리스트, 육상대회 국가대표, 미국 크로스핏 챔피언 등도 작품에 참여했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이들의 전투 장면에서 영화 ‘300’의 느낌이 나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중 다이애나는 부족원 중에서 월등한 능력을 지녀 세상의 부름을 받는다.

여성 히어로가 전면에 등장한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영화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킬 빌’의 우마 서먼,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 등은 이미 남성 그 이상의 체력과 멘탈 능력을 보여주었다. 영화 개봉 후 ‘악녀’의 김옥빈과 자주 비교되는 ‘킬 빌’의 우마 서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피 튀기는 액션을 선보인다. 영화 중반부 즈음에 그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는데, 그 모습은 강인한 동시에 처연하다. 그가 달려온 길은 폭력남편과 일상화된 성추행, 여성에 대한 학대 등에 대한 칼부림이기 때문이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킬 빌’ 등을 만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B급 액션’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권에 대한 메타포가 함께 담겨 있다. 우마 서먼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킬 빌 3’에도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女 대 男’ 아닌 ‘사람 대 사람’의 싸움

그동안 한국 누아르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소비되거나 소진되었다. 남성 액션이 주가 된 영화에서 여성은 조력자이거나 피해자였다. 정병길 감독은 여성 캐릭터가 서브로만 소비되는 상황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시도조차 안 하니 더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악녀’를 썼다고 했다. “달나라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김옥빈 역시 오랜만에 여성 원톱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온몸을 던졌다. 자신이 잘해내야 다음 영화의 기회도 열리리라는 생각에 95%의 액션을 대역 없이 직접 소화했다. 배우가 앞장서고 액션감독이 말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악녀’를 통해서 제작진도 배운 게 있다. 여성과 남성이 제대로 맞붙는다면, 어쩌면 ‘남성은 여성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이다. 누군가를 이길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마음가짐인데 사랑하는 상대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 누군가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설정이라면, 이때 더욱 강력한 힘을 내뿜는 것은 여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DC코믹스는 이미 지난해 ‘배트맨 vs 슈퍼맨’의 실패로 뼈아픈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 작품에 혹평을 던진 이들조차 인정하는 단 하나의 장면은, 배트맨과 슈퍼맨의 진흙탕 싸움으로 진이 빠졌을 때 나타난 ‘원더우먼’의 존재감이다. 그의 등장은 한 줄기 상쾌한 바람이었다. DC코믹스가 차기작으로 바로 ‘원더우먼’을 준비한 것은 이런 영향이 크다. 2004년 미스 이스라엘 우승자이자, 같은 해 군에 입대해 2년의 군복무를 마친 갤 가돗은 ‘원더우먼’의 액션을 대부분 직접 소화했다. ‘악녀’의 숙희처럼 말이다.

‘악녀’에서 숙희에게 애정과 증오의 대상으로 등장한 중상 역의 배우 신하균은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 시대의 관객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을 계속 고민하며 작품을 하는 것이 배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남성 중심 영화의 홍수 속에서 누군가는 여성 영화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대의 질문을 듣고, 여기에 온몸으로 답한 배우들이 있다. 덕분에 2017년 초여름, 관객은 꽤나 근사한 ‘여성 액션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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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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