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코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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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탄식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 “영화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 봐도 영화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는 내 경험의 일부가 되어 나의 정서와 감각을 토막 낸 뒤다. 영화관에 들어서면 2시간은 꼼짝없이 암흑 속에서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야 한다. 영화가 갖는 권력이자 폭력이다.

2017년 여름, 한국 영화관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 ‘리얼’과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가 누가 더 망작(亡作)인가를 두고 자웅을 겨루고 있다. 두 영화에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갔다는 점과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뚜껑을 열자 튀어나오는 건 탄식과 분노였다.

먼저 ‘리얼’부터 살펴보자. 지난 6월 27일 개봉한 ‘리얼’을 실제로 본 관객 수는 현재까지 50만 남짓이다. 체감으로는 천만 영화 부럽지 않은 입소문을 타고 있다. 아직 보지 않은 이들은 그 소문 때문에라도 영화를 봐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미 ‘리얼’을 체험한 이들은 ‘아서라’라고 한다.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 불가’가 아니라 ‘인간 관람 불가’ 영화라는 것이다.

‘리얼’,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혹평’

실제로 ‘리얼’의 후기를 읽는 것은, ‘리얼’을 실제 보는 것보다 더 큰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일종의 동병상련인데, ‘리얼’은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혹평을 받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자신의 영화 사이트 계정에 “‘대체 어떻길래’라는 심정으로 보았다가… 레알”이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시사회 당일 영화를 관람한 영화평론가 듀나는 “‘리얼’ 봤어요. 이건 도대체 어느 짐승의 항문에서 굴러나온 X덩어리야”라고 썼고, 익스트림 뮤비 김종철 대표는 “이게 영화냐 쓰레기지. 분노에 몸이 떨린다”라고 평했다. 일반 관객의 평도 다르지 않다. ‘리얼’을 관람한 네티즌은 “여러분들은 리얼을 보지 않으신 것 자체로 훌륭한 138분을 보내셨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방 천장을 올려다보는 편이…” “집에서 배추김치를 보고 있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라고 적기도 했다. 심지어 ‘리얼’ 후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갈 이들을 위해 “‘리얼’ 안 보신 분들 보러 가지 마세요. 저희는 후기가 너무 웃기길래 호기심에 보러 갔지만 지금 뇌를 꺼내 씻고 싶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라고 남겼다.

‘리얼’은 어쩌다가 이런 논란의 중심에 섰을까. ‘리얼’의 언론배급 시사회는 개봉 바로 전날인 6월 26일에 있었다. 개봉 직전에 시사회를 여는 이유는 하나다. 관객에게 직접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실제 ‘리얼’ 시사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영화 상영시간은 억겁처럼 지나갔다. 처음에는 경악했다가 나중에는 실소했고 마지막에는 분노했다. 처음에는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화가 났다가, 이곳에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졌다. “왜 이런 영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중간중간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관객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리얼’은 막대한 제작비를 부어 만들었다. 감독은 중간에 교체됐는데, 코브픽쳐스의 대표이자 주연배우인 김수현의 이종사촌인 이사랑 감독이 맡았다. 그의 첫 데뷔작인 셈이다. 감독은 영화가 하나의 ‘마술쇼’처럼 보이기를 바랐다고 말했지만, 이들이 보여준 마술에 경이로움은 없었다. 상자 속에 칼을 찔러 넣으면 사람이 그대로 죽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는 폭력의 수위나 노출의 세기, 스토리 파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수위와 세기와 파격이 갈 곳을 모르고 영화 속에서 충돌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다. 영화에는 김수현, 설리뿐 아니라 성동일, 이성민, 이경영, 조우진 등 탁월한 연기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다. 각 인물이 가진 개연성이나 설득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들이 가진 연기력을 총동원해도 ‘리얼’을 구하긴 어려웠다. 개봉 후 여배우인 설리의 노출이나 스킨십이 필요 이상 화제가 된 것은, 그것 외에 딱히 화제가 될 만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리는 “시나리오를 보고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했다. 3번 정도 봤을 때 읽혔고, 6번 정도 보니까 조금 더 이해했다”고 말했다. ‘리얼’의 시나리오는 이정섭 감독이 썼다. 촬영 중간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지금의 ‘리얼’이 됐다. 출연한 배우도 6번을 읽어야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다른 감독이 맡아 최종 편집을 했다. 시나리오의 본뜻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리 시각적 이미지를 동원해도 시나리오가 가진 텍스트의 힘을 덮을 수는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관객에게도 6번의 관람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감독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감독

애증의 ‘트랜스포머’, 마이클 베이의 실패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의 체면을 지켜준 건 관객의 ‘의리’였다. ‘트랜스포머’는 국내에서 많은 팬을 보유한 시리즈 중 하나다. 1편부터 3편까지는 700만 이상의 관객을, 4편은 520만 관객을 동원했다. ‘트랜스포머’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한 이들은 ‘트랜스포머’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티켓을 끊었다. 덕분에 ‘트랜스포머 5’는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번 시리즈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트랜스포머의 고향 사이버트론을 되살리기 위해 지구에 있는 고대 유물을 찾아나선 옵티머스 프라임의 이야기다. ‘이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상이 멸망해야 한다’는 문장을 앞세운 이번 영화는 인간과 트랜스포머의 싸움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미 북미에서는 한바탕 혹평 세례를 받았다. 미국 영화전문사이트 로튼토마토는 “‘트랜스포머 5’는 썩토지수 17%를 기록 중이다”라고 썼다. 썩토지수란 65개 리뷰가 올라온 가운데 신선하다는 평은 11개, 썩었다는 평은 54개라는 뜻이다. USA투데이는 “특수효과가 몰아치지만 재미가 없다”, 시애틀타임스는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평했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빌리지보이스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fiiigjhkwetwnwwwjsahafajhwfohofoehaoowofoeoicioeciaqidjFaerlaeaffjgjlje XGRSXSsfdsmfjjjsomuchrandomstuffsomuchegjwogpjwd”. ‘오타’ 사고가 아니다. 영화평론가 빌지 에비리의 영화평이다. 그는 평론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의미 없는 알파벳을 잔뜩 나열해 놓고 여기에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새로운 트랜스포머는 이와 같다’.

마이클 베이 감독과 ‘트랜스포머’는 애증의 관계다.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가 시리즈 사상 가장 낮은 오프닝 성적을 냈을 뿐 아니라 마이클 베이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록’ ‘아마겟돈’ 등의 작품으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의기투합해 만든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영광도 안았다. 2007년 첫 작품으로 무려 7억달러를 벌어들인 이들은 곧 속편을 제작했다. 그러나 전편의 영광에 기댄 안일한 속편은 혹평 세례를 받았다. 그해 골든라즈베리 최악의 영화상과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역대 망작 영화의 공통점

‘리얼’에는 무려 115억원의 제작비가, ‘트랜스포머’에는 3000억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전자는 ‘김수현’이라는 브랜드파워를 내세워 작품을 홍보했다. 후자는 마이클 베이를 앞세워 트랜스포머의 충성 관객들을 겨냥했다. 시작은 ‘소문난 잔치’였지만, 소문의 진상은 곧 밝혀졌다. 김수현은 인터뷰에서 “영화가 불친절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이클 베이는 다섯 번째 ‘트랜스포머’를 만든 뒤 “이제 트랜스포머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는 ‘리얼’에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다. 북미에서만큼 혹평을 받지 않는 이유가 ‘리얼’이 막아주고 있다는 우스개가 나오고 있다. ‘리얼’을 보고 ‘트랜스포머’를 보면 “잘 만든 영화로 여겨질 정도”라는 게 관객의 반응이다. 이 때문에 일부 관객들은 ‘리얼’을 영화 ‘클레멘타인’ ‘7광구’ ‘다세포소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에 비교하고 있다. 모두 영화 팬에게는 희대의 졸작으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먼저 ‘클레멘타인’은 52억원을 들여 2억원을 벌어들인 슬픈 영화다. 일각에서는 “‘클레멘타인’의 아이가 자라 ‘리얼’을 만들었다”는 농담이 나온다. 이 농담에 뼈가 있는 이유는, ‘리얼’의 연관검색어에 ‘클레멘타인’이 뜰 정도로 잠자고 있던 슬픈 전설을 깨웠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요’가 많은 평은 “이 영화를 보고 암이 나았습니다”라는 반어법이다. 2004년 개봉해 스티븐 시걸, 이동준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지금도 ‘영화인들의 성지’라 불린다. 여전히 영화에 별점을 매기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 이곳에 와서 마음을 달래고 간다는 의미다. 실제로 ‘클레멘타인’의 주연으로 소개된 스티븐 시걸이 등장하는 건 1분 남짓이다. 그럼에도 그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제작비 중 12억원을 그의 개런티로 썼기 때문이다. ‘아빠를 기다리는 소녀’ ‘소녀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지만 아빠가 왜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자체가 억지에 가깝다. 전설의 싸움꾼인 이동준과 스티븐 시걸의 싸움을 만들기 위해 딸을 납치하는 설정이다. 실제로 배우 이동준은 이 작품으로 큰 빚을 져서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안성기, 하지원 등이 출연한 ‘7광구’도 비슷하다. ‘7광구’는 역대급 제작비를 쓰고도 실패한 한국 영화 5선에 드는 작품이다. 130억원의 제작비를 쓴 이 영화는 초반 스크린 독과점에 힘입어 첫날 136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나 바로 관객이 60% 이상 감소했고 총 관객 224만명을 기록했다. 한국 영화에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로 남은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마찬가지다. 2002년 당시 총 110억원의 제작비로 가상현실 세계를 그린 이 영화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전개와 뚝뚝 끊기는 액션, 난해한 스토리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 등으로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충무로는 한동안 대자본을 투입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한국 영화계에 끼친 이러한 악영향 때문에 ‘성냥팔이 소녀의 재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화는 2주 동안 1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막을 내렸다.

 ⓒphoto 메가박스 플러스엠
ⓒphoto 메가박스 플러스엠

작지만 큰 영화, ‘박열’

현재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은 ‘리얼’도 ‘트랜스포머’도 아닌 ‘박열’이다. 이준익 감독이 10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는 이 작품은 순제작비 26억원의 작은 영화다. 10년 전 ‘아나키스트’라는 영화를 준비하면서 처음 ‘박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준익 감독은 이후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해왔다. 제작비 6억원으로 만든 전작 ‘동주’는 ‘박열’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작은 영화이지만 스토리의 힘으로 승부한다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실제로 ‘동주’와 ‘박열’은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박열’은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불량 조선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은 실화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에 등장하는 사건들, 대지진, 6000명 학살, 재판 기록,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 문제제기, 괴사진, 그 사진이 일본 전역에 미친 여파 등은 사실을 벗어난 것이 전혀 없다. 시기와 날짜를 확실히 고증해 만들어낸 영화다”라고 말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영화 한 편당 평균 총 제작비는 24억원이었다. 10억원 이상~30억원 미만의 총 제작비를 쓴 영화들의 투자수익률은 -42.4%에 그쳤다. 하지만 ‘박열’은 개봉 열흘이 안 돼 손익분기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리얼’의 교훈은 ‘박열’로 이어진다. 영화의 힘은 제작비도 감독도, 배우도 아니다. 이야기다. 영화로 받은 상처는 결국 영화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상처받은 관객의 발길이 작지만 큰 영화 ‘박열’로 이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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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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