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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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소설 ‘아주 보통의 연애’에는 영수증 관리 직원이 등장한다. 그는 연모하는 남자의 영수증을 모으며, 그의 삶을 짐작하고 간직한다. 작가는 말한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고. 그 작은 코팅지에 적힌 지출 항목과 숫자는, 주인의 취향과 습관, 현재의 관심사를 비춘다. 최근 이 영수증으로 데뷔 25년 만에 전성기를 누리는 남자가 있다.

김생민은 1992년 KBS 특채로 개그맨이 됐다. 동기로는 유재석, 조혜련, 지석진 등이 있다. 이들이 제각각 전성기와 침체기를 겪는 동안 김생민은 한결같이 시청자 곁을 지켰다. KBS ‘연예가 중계’ 23년, MBC ‘출발, 비디오 여행’ 21년, SBS ‘동물농장’ 17년 등이 그의 경력이다. 마치 방송국 직원처럼 각 방송사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20년이 넘는 장기근속으로 10억원을 모은 신화는, 그의 지인들이 모두 목격한 ‘실화’다. ‘옷은 한 번 사면 17년은 입는 것’ ‘껌은 친구가 주면 씹는 것’ ‘커피는 선배가 사줄 때 마시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개그가 아니다. 그의 삶이다.

그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자린고비 정신’이 우스개가 아닌 시대에 산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벌 곳은 적고, 쓸 데는 많다. 그렇다면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김생민이 전성기를 누리기 직전에, 젊은층에는 ‘탕진잼’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큰돈 모을 수 없다면 ‘당장을 즐기자’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멋있게 표현한 말이 ‘욜로(YOLO)’다.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생각으로 현재의 행복에 충실해 소비한다. 때문에 노후 준비나 내 집 마련보다는 여행과 취미, 자기계발에 집중한다. 김생민은 말한다. “욜로하다가, 골로 간다”고. 그의 이야기에 젊은층이 반발하지 않고 귀 기울인다. ‘욜로’를 외치는 동안에도, 미래는 두렵다. 젊은이들에게 그는 꼰대가 아니다. 고난의 행군기를 먼저 지난 전우다.

“이 세상에는 ‘잘되는’ 사람보다, 안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잘되는 1%가 아닌 안되는 99%인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살다 보면 기울어진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협상에서 나를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건 내가 들어놓은 적금입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오직 돈 때문에요.”

김생민이 25년 동안 어떻게 연예계에서 살아냈는지는 동료뿐 아니라 시청자도 안다. 겨울철에 야외에서 ‘게릴라 데이트’를 진행하는 그는, 늘 똑같은 검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도 20년 동안 그대로다. 시대와 유행은 바뀌는데 그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결같은 모습이다. 송은이와 김숙은 그의 오랜 동료다. 이들은 여성 예능인이 사라진 시대에, ‘팟캐스트’를 만들어 자력갱생을 도모했다. 김생민은 이 ‘비밀보장’ 팟캐스트에 ‘경제전문가’로 등장했다. 재테크에 대해서 연예인 중에 그보다 더 잔뼈가 굳은 이는 없다. ‘김생민의 영수증’은 코너의 인기가 높아 독립 팟캐스트가 됐고, 팟캐스트에서 청취율 1위를 차지한 뒤 지상파 고정 프로그램이 됐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안상은 PD는 ‘연예가 중계’ 시절, 김생민과 함께 야전(野戰)을 누빈 연출가다. 김생민의 ‘짠내’를 몸소 체험한 이다. 아직은 15분짜리 6부작 방송이지만, 본인의 이름을 딴 방송이 탄생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다. 지난 8월 19일 첫방송 후, 영수증 상담 신청만 230건을 넘어섰다.

‘김생민의 영수증’(KBS2)을 보다 보면 먼저 그의 경제상식에 놀란다. 그는 영수증 한 장으로 개인의 삶을 통찰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하다. 적금을 할 때도, 소액을 꾸준히 모으는 ‘개미형’인지, 목돈이 생겼을 때 한 번에 넣는 ‘밀어넣기’ 스타일인지 구분한다. 물론 김생민은 두 가지 모두를 애용한다. 두 번째로는 다정함에 놀란다. 그는 어른에게 깍듯하고, 가정을 1순위로 생각한다. 그의 유행어인 ‘스튜핏(Stupid)’과 ‘그레잇(Great)’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서 탄생했다. 그는 과소비를 하는 이들에게는 ‘스튜핏’을, 절약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그레잇’ ‘알러빗(I love it)’을 날린다. 영어를 잘하길 바랐던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영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방송에서 “초심 is very important, When I was young” 같은 매우 기초적인 단어를 던진다. 뒤늦은 효도다. 생수 한 병을 산 1200원은 질책하며, ‘물은 집이나 직장에서 떠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부모님을 위해 한 행동에는 거침없이 ‘그레잇’을 날린다. 정작 자신은 아이들 로션에 물을 적셔 바르며 ‘물광’을 내고, 햄버거는 명절에 조카들이 모일 때나 먹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슬그머니 영수증을 꺼내 보게 된다. 다이어트 한약을 먹으면서 밤이면 야식을 시키는 어리석음이, 손님이 온다는 핑계로 장바구니에 평소 먹고 싶었던 주전부리를 가득 담는 눈속임이, 나의 영수증에도 고스란하다. 자신의 ‘치부책’과도 같은 영수증을 김생민 앞에 꺼내 보내는 이유는, ‘먹고사니즘’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 때문이다. 그는 숫자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영수증에 찍힌 시간을 보면서 “늘 쇼핑하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 차라리 이 시간에 잠을 자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대안 제시도 구체적이다. 나주에 살면서 광주에 일자리를 얻은 직장인의 월세 비용을 걱정하면서, 이렇게 되면 월세뿐 아니라 전기세, 물세, 생활비도 추가된다는 현실 조언을 남긴다. 이 고정지출을 줄이고 통근을 해보길 바란다는 쓴소리도 함께다. 직장 근처에 독립해서 살게 될 20대에게 추가 지출은 무궁무진하다. 그의 집은 동료들의 아지트가 될지도 모른다. 김생민의 말대로 그러면 “편의점에서 맥주와 오징어라도 사다 놔야” 한다.

팟캐스트부터 함께한 김숙·송은이(왼쪽부터).
팟캐스트부터 함께한 김숙·송은이(왼쪽부터).

절실함이 있다면

‘통장 요정’ ‘생블리’ ‘드디어 찾아온 전성기’라는 말을 그는 경계한다. 거품이 끼면 허세를 부리게 되고 그럼 감정도, 재정도 과소비를 하게 된다. 함께 방송을 진행하는 김숙에게도 그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지금 잘나간다고 소비를 늘렸다가 나중에 낭패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비 요정’ 김숙과 ‘통장 요정’ 김생민의 언쟁은 ‘아주 보통의 삶’을 그대로 담는다. 김숙이 대형마트에 가다가 김생민에게 들켜 차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대형마트는 과소비의 주범이다. 김생민의 말대로 ‘메모하지 않고 가는 마트’는 소비행(行) 급행열차다. 그는 여전히 담백한 ‘김생민’이기를 원한다. 25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전성기가 오히려 독이 되는 걸 숱하게 봐왔다. ‘한 방’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과 성실함이다. 그리고 절실함이다. ‘절실함이 있다면’ 음악은 ‘1분 미리듣기’로 충분하고, ‘절실함이 있다면’ 충동구매 대신 충동적금을 든다는 게 그의 말이다. 때문에 그는 조언을 할 때도 ‘절실함이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인생에 한 번, 모아둔 돈을 탕진하는 웨딩을 앞둔 예비신부에게도 “절실함이 있다면, 네일케어는 받지 말라”고 한다. 결혼식 사회를 숱하게 봐온 그는, “어차피 장갑을 끼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의 현실조언에는 이처럼 일리가 있다. 더구나 그의 조언은 하버드 경영학책의 조언과도 통한다. 그는 ‘빅(big)픽처’라는 말 대신 ‘엔드(end)픽처’라는 말을 쓴다. 그가 책에서 본 말인데, ‘인생의 마지막 그림’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나약함과 귀얇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탐욕과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다. 이때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규율이다. 마지막 그림이 자신이 바라는 그림이 되려면, 지금은 규율을 만들어 지켜야 할 때다. 그는 외친다. “Rule is very important.”

최근 치솟는 인기로 팬클럽이 생길 거라는 소식에 그는 근심한다. 마흔다섯에 ‘연예인병’이 생길 리야 만무하지만 자신이 혹시 들뜰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김생민은 괜히 바람이 들까봐 영어로 된 운동은 하지도 않는다. ‘헬스’ ‘필라테스’ ‘플라잉 요가’ 같은 운동 대신 ‘도보’를 하는 게 건강에는 제일 좋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25년간 인터뷰를 하며 만난 ‘건강한 어르신’들은 모두 ‘도보’를 통해 건강을 도모했다는 게 그의 분석 결과다. 더구나 그런 그에게 ‘팬클럽’은 무서운 영어다. ‘팬클럽이 커피차라도 보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이 정도면 그의 경제관념은 ‘(경의의 의미를 담은) 두 손 수퍼 울트라 그레잇!’이다.

‘김생민의 영수증’을 띄운 사연

선물용 감자칩 15만원어치 산 의뢰인에게 그가 한 말은?

‘김생민의 영수증’이 처음 전파를 탄 건 지난해 6월 19일이다. 처음에는 ‘파일럿’으로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진행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0회’라는 넘버가 붙었다. 당시 제목은 ‘고민녀의 폭망대망 영수증’으로, 아직 방송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방송작가’의 사연으로 시작했다. 월수입이 400만원 정도되는 30대 중반의 한 방송작가는 부동산이나 펀드, 주식이나 투자 등 각종 재테크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월 100만원 이상 저축하는 것이다. 평소 과소비를 하지는 않지만, 가끔 여행을 가는데 몇 달 전 어머니와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는 작가, 그의 삶이 담긴 영수증을 보고 김생민은 탄식했다. 여기서부터 ‘스튜핏’과 ‘그레잇’이 나뉘는데, 그의 멘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est 그레잇

1. 미혼인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여기에 92점 드린다. 그래야 돈을 모은다.

2. 이 정도 수입이라면 100만원이 아니라 166만원씩 저축해서 6개월에 1000만원을 모아야 한다. 현재 1억원 정도는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3. 혼자 다니면 편의점에서 1000원짜리 어묵을 사먹을 수 있다. 이런 소비가 중요하다. 사람은 착하기 때문에 남을 배려한다. 친구와 함께 다니면 돈을 더 쓴다.

Best 스튜핏

1. 운동화를 같은 브랜드 상품으로 두 번 결제했다. 둘 중 고민이 된다고 둘 다 산 건데, 이러면 여기에 맞춰서 티셔츠를 사게 된다. 수퍼 스튜핏이다.

2. 일본에서도 컨버스 운동화를 샀다. 신발 중독자일 확률이 높다. 지금 사둔 운동화로 10년은 신을 수 있다.

3. 일본에서 10만원 넘는 티셔츠를 샀다. 적어놓자. 반팔 티셔츠는 2만원 이하로 산다. 명품 티셔츠도 12번 빨면 늘어난다.

4. 일본에서 감자칩 15만원어치를 샀다. 아마 선물용으로 산 감자인가 본데, 방송국 스태프에게는 1200원짜리 열쇠고리 20개를 돌리는 게 합리적이다.

5. 소비에 계획이 없다. 이런 분은 수첩에 살 것을 적고, 산 뒤에는 가계부를 적자. 멘탈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이 의뢰인에 대한 김생민의 최종 진단은, 일단 하루에 3만원씩만 쓰는 습관을 들여 보라는 것이다. 한 달을 90만원으로 보내는 데 성공하면, 일단 기본기는 다진 셈이다. 이후 한 달에 166만원씩 적금을 들어 6개월에 1000만원을 모으는 데 성공하면, 1년에 4000만원을 모으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 김생민의 저축은 성문기초영어, 맨투맨 중간영어, 성문종합영어처럼 단계가 있다. 앞 단계를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결코 지름길은 없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은 지름길이 아니다”라는 게 평소 그의 지론이다. 한 달에 400만원을 버는 의뢰인은 분명 능력 있는 사람이다. 김생민은 한 달에 4000만원을 벌어도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저축하지 못한다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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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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