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와 인터뷰 중인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 ⓒphoto NHK
NHK와 인터뷰 중인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 ⓒphoto NHK

올해 들어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크게 화제가 됐던 TV프로그램은 단연 NHK의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94)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 인터뷰다. 3월과 8월에 걸쳐 2부작으로 방송된 인터뷰는 현재까지 모두 4차례 재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흔이 넘은 와타나베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기억력과 논리력으로 쇼와(昭和)시대, 헤이세이(平成)시대 정치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은 많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요미우리신문의 라이벌인 아사히신문은 상(上)편이 방송된 후 “와타나베 주필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 같은 모습은 독재자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것”이라며 “다음 방송도 꼭 보고 싶다”는 리뷰를 내보내기도 했다.

NHK와의 인터뷰서 군국주의 비판

그는 일본의 종전 75주년 행사를 앞두고 최근 방송된 하(下)편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도쿄대 시절 유서(遺書)를 써놓고 징집된 그는 군부(軍部)가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았기에 좋은 정치가 될 리가 없었다”는 일갈이다. 1945년 패전 이후에 군국주의자를 엄격하게 처벌했어야 일본 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요미우리신문이 2005년부터 1년간 ‘검증(檢證) 전쟁 책임’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한 것에 대해 “(군국주의자들이) 수백만 명을 죽여 일본을 폐허로 만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약 3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와타나베는 1960년대 기자 신분으로 한·일수교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던 사실도 밝혀 주목받았다. 그는 1962년 서울 방문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도움으로 한·일 국교정상화의 단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특종보도했다고 밝혔다. “무상원조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1억달러라고 쓰인 문서를 김종필이 보여줬다. 3·2·1…. 배상 금액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가 대특종의 배경을 육성(肉聲)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김종필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두뇌가 우수했다. 인격도 좋고…. 재팬(일본) 콤플렉스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2005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김종필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지나간 과거는 흐르는 물속에 흘려버렸다”는 말을 듣고서 감동, 그를 돕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던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부총재가 방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도록 한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당시 역할이 “기자로서의 선을 넘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답했다. “전례 없는 것이지만 양국 간 국교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교정상화가 양국 모두에 플러스가 된 것 아니냐.”

와타나베는 일본 정치의 이면(裏面)에 대해서도 비화를 털어놓았다. 1950년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돈이 자주 오갔다고 회고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가 될 때 전당대회장 복도에서 의원들이 돈을 주고받은 것을 목격한 그는 “마치 성관계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이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상이었다. 그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대장성(大藏省) 대신일 때 비서관을 지낼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오히라가 정치적으로 성장, 주목받기 시작하자 이케다가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라 외상이 내게 ‘이케다 총리가 나를 싫어한다. 넘버 원은 넘버 투를 싫어한다. 그것은 질투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라고 믿었는데… 정치는 미묘하다’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유능한 정치부 기자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 것도 눈에 띄었다. 정치인이 불우할 때 정성을 들여서 각별한 관계를 맺고,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와타나베는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막후(幕後)의 쇼군(최고 실력자)’ ‘일본의 마지막 괴물’로 불리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름을 축약한 ‘나베쓰네’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언제든 아베 총리와 통화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NHK는 1991년 요미우리 사장에 취임한 와타나베의 주장과 행동이 헤이세이시대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 요미우리그룹 이사회에서 대표 겸 주필로 유임됨으로써 당분간 일본 최고 발행 부수의 신문을 이끌며 논조에도 계속 관여하게 됐다.

70년째 활약 중인 ‘오노의 양아들’

70년째 요미우리에서 활약 중인 그는 1950년대 당시 미래의 총리 후보로 꼽혔던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를 담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오노의 양아들’이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로 신임을 얻어 국회의원 공천에도 관여했다.

1960년대 이후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와 의기투합했다. 그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이 된 과정을 다룬 ‘대통령 만들기(The making of the president)’라는 책으로 학습 모임을 시작, 10년 넘게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두텁게 했다. 지난해 타계한 나카소네가 생전에 그의 묘비명을 미리 써 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그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찬성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정반대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선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교양도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도쿄대 시절에는 공산당 지부 책임자였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발해 전향했다. 1995년 아사히신문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고 나서자 “공동 개최한다면 양국 모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지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는 요미우리 사장이 된 후 콘텐츠를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수적 색채가 강한 신문을 만들면서 공격적 경영으로 신문 부수를 늘려왔다. 물론 와타나베에 대해서는 비판적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의 정언(政言) 유착 성향과 지나친 권력 지향이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횡(專橫)의 카리스마 와타나베 쓰네오’라는 책을 출간한 저널리스트 오시타 에이지(大下英治)는 그가 사내(社內) 권력 투쟁을 일삼으며 대표 자리에 오른 후 ‘종신 독재자’가 됐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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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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