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일 기자회견 중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photo 뉴시스
지난 9월 2일 기자회견 중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photo 뉴시스

일본의 차기 총리가 될 자민당 총재를 새로 뽑는 선거는 오는 9월 14일 열리지만 이미 일본 사회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대세론이 퍼져 있다.

2012년 2차 아베 내각 발족 당시부터 7년9개월째 관방장관으로 일해온 그가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후임으로 차기 총리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9월 들어 일본의 TV와 신문, 잡지는 경쟁적으로 스가의 성장 배경, 정책, 인간관계 분석에 나서고 있다. 다양한 패널들이 출연하는 TV 와이드쇼에서는 “스가는 왜 술은 못 마시고 팬케이크만 좋아하느냐”고 토론하기도 했다.

총리 후보로서 스가의 등장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파격적이다. 지난 8월 28일 아베가 지병인 궤양성대장염으로 사임을 발표한 후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대세론이 만들어졌다. 자민당의 7파벌 중에서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와 다케시타·아소·니카이·이시하라파 등 5파벌이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와는 별도로 무파벌 소장파 그룹 30여명도 스가 지지를 결의했다.

밑바닥 정서에 밝은 3無 정치인

9월 14일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는 394명의 자민당 의원과 141명의 광역자치단체 대표 등 총 535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스가는 이 중에서 이미 의원 표 300표 이상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그가 이미 과반수를 확보함에 따라 득표율이 과연 어느 정도 나올지에 주목하고 있다.

스가는 원래 유력한 총리 후보가 아니었다. 아베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을 그의 후계자로 밀어왔다. 하지만 기시다는 올 들어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한 번도 10%를 넘은 적이 없다. 주로 4~7% 수준에 머물렀다. 자민당의 정책을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국가적 위기에 아무런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감점 요인이었다.

일본 의원들도 한국의 정치인처럼 자신이 속한 당의 대표를 뽑는 기준은 한 가지다. 차기 총선에서 자신의 재선(再選)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다. 상당수 의원들은 기시다가 총리가 될 경우 자민당이 참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의원직도 불안해질 것을 염려해 반대 의사를 피력해왔다. 이 같은 여론을 파악한 아베는 마지막 순간에 스가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아베의 입장에서 볼 때 8년 가까이 자신을 보좌해온 스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다. 두 사람이 동지적 관계를 맺은 것은 18년 전인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가는 당시 북한의 만경봉호가 일본을 오가면서 온갖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며 입항 금지를 위해 항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관방 부(副)장관으로 북한에 강경정책을 주장했던 아베가 그를 눈여겨봤다. 스가는 이때부터 아베와 같은 길을 걸으며 ‘아베 총리’ 만들기에 나섰다. 아베는 2006년 1차 집권에 성공하자 파벌도 없고, 가문의 후광도 없고, 빼어난 학력도 없는 ‘3무(無)’ 스가를 일약 총무대신에 발탁함으로써 그의 지지에 보답했다.

2007년 지병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상심하고 있던 아베에게 “훗날을 기약하자”며 다독거린 이 역시 스가였다. 스가는 건강을 회복한 아베가 2012년 9월 총재 선거에 출마하도록 강력히 권유함으로써 아베가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되는 길을 열었다.

스가는 가문의 후광으로 손쉽게 의원 배지를 단 세습의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아키타(秋田)현의 딸기농가 출신으로 식당 종업원, 경비원을 해가며 주경야독으로 호세이대(法政大) 야간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렇다 할 정치적 배경이 없다 보니 의원 비서관, 요코하마 시의원을 거쳐 48세가 돼서야 중의원에 진출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의 ‘밑바닥 정서’에 밝아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무부서를 제치고 관방장관인 그가 휴대폰 요금 인하를 주도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스가가 정치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두 번의 정치 이벤트를 통해서다. 2019년 4월 나루히토 일왕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쓰인 액자를 들어올리며 새 연호를 발표해 ‘레이와 오지상(레이와 아저씨)’으로 불리며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1989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공표했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관방장관이 나중에 총리가 된 것을 연상시켰다. 그가 거리에 나서면 사인을 요청하는 일본인이 생겨난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루히토 일왕의 새 연호 ‘레이와’를 들고 있는 스가 장관(왼쪽)과 아베 총리를 묘사한 전통 인형. ⓒphoto 뉴시스
나루히토 일왕의 새 연호 ‘레이와’를 들고 있는 스가 장관(왼쪽)과 아베 총리를 묘사한 전통 인형. ⓒphoto 뉴시스

‘아베스 정권’ 탄생하나

이어서 한 달 후에는 관방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4일간 미국을 방문, 마이크 펜스 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만났다. 뉴욕에서는 유엔 본부에서 열리는 납치 관련 회의에 참석했으며 ‘아베노믹스’를 미 경제계에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30여년간 관방장관이 해외 출장을 간 경우는 도쿄와 가까운 서울, 베이징 등이 전부였다는 점에서 아베 총리가 그를 미국 조야(朝野)에 소개하며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재로선 스가가 내년까지 아베의 남은 임기를 채우는 ‘1년짜리 관리형 총리’라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스가가 총리가 되면 아베 총리가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베스(아베+스가) 정권’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도움으로 총리가 된 후 다나카파 인사들을 대거 기용, ‘다나카소네(다나카+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린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가는 지난 9월 2일 출마 기자회견에서도 “아베 총리가 전심전력으로 해온 것을 확실히 계승하는 데 내 모든 힘을 다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아베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그는 이날도 자신을 홍보하기보다는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일각에서는 스가가 총리가 된 직후 연내에 전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 총선거에 돌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도쿄의 정치 1번지 나가타초에서는 그가 9월 16일 총리가 된 후 29일 전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 다음 달 25일 총선을 실시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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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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