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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9호]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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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내가 겪은 소련 공산당 귀족들의 충격적인 삶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johankwon@gmail.com

▲ 1990년 소련에 최초로 문을 연 맥도날드 모스크바 매장 앞에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photo rbth.com
필자는 한·소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출장 등의 명목으로 소련에 자주 갔다. 그러다 나중에는 10년 가까이 살아보는 귀한 경험도 가졌다. 필자가 직접 겪은 소련의 실상은 무계급, 무차별, 무특권이라는 10월혁명 이념과는 정반대였다. 혁명 후 7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서방 자본주의 국가보다 오히려 더 지독한 계급과 차별과 특권이 만연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을 지탱하는 3대 중심 권력기관인 공산당, KGB 그리고 군 간부들은 제정러시아의 왕족과 귀족을 대신해 신흥 귀족이 되어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3억 인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1900만 공산당원만의 나라였다. 이들이 누리는 특권은 당원용 생필품 특수 상점을 위시해 일상생활 곳곳에서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특히 당원용 생필품 상점은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아 특정 도시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을 포함한 외지인들은 존재조차 몰랐다. 하지만 특정 도시에 사는 소련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상점이니 당연히 선망의 적(敵)이었다. 그런 특수 상점에는 일반 상점에서는 볼 수 없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격은 일반 상점들보다 더 쌌고 특히 외국 제품은 현지 가격보다도 쌌다. 외국에서 대량 수입해서 원가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점을 통해 특권층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필자가 방문했던 소련 고위층들의 집은 서방 중산층 이상이 쓰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반인들은 필수 생필품이 상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나면 영하 20도의 날씨에도 상점 앞에서 1~2시간씩 줄을 서는 현실에서 필자가 가본 고급 공산당원들의 집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물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의장 집들이 경험의 충격
   
   소련 특권층의 특권 중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최고 소비에트(Supreme Soviet) 의장 집에서였다. 최고 소비에트는 당시 소련 최고의 헌법기관으로 법정 최고 의결 기구였다. 소련 헌법을 개·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엄청난 이름과는 달리 공산당 정치국(politburo)이 결정해서 내려준 안건을 단순 통과시키는 ‘고무도장’ 기구이긴 했다. 어쨌든 소련에서 필자와 사업을 같이 하던 그루지야(현 조지아) 출신 현지 파트너의 조카가 그 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결혼식 후 바로 집들이 초대를 받아 갔었다. 그 조카는 전에 영국에 영어 연수를 와서 필자의 집에서 수개월 같이 지낸 적이 있어 거의 딸 같은 관계였다. 조카의 남편이 맏아들이라 시집인 의장 집에서 바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의장 집을 가보고 가장 놀란 점은 위치였다. 그 집은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극장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어로 콜체바야(Koltsevaya)라고 불리는 3개의 환형도로(ring road)로 이루어져 있다. 3개 중 가장 안쪽 환형도로 안이 모스크바의 최중심으로, 붉은광장이 그 한가운데 있다. 모든 권력기관, 박물관, 극장과 문화시설이 거기 다 모여 있다. 아무나 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정말 금수저 중에서 금수저들만 그 중심지에 살 수 있었다.
   
   다음이 크기였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330㎡(100평)가 넘는 아파트였다. 당시 고관들 집을 많이 가 봤지만 현관 문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거실이 나오는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소련은 이론상으로는 부동산이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돈이 많아도 마음대로 아파트 크기를 정할 수 없고 식구 수에 따라 크기가 정해졌다. 가족 수가 같으면 누구나 같은 크기의 아파트를 당국으로부터 배정받아 살아야 했다. 거기다가 개인 소유가 아니고 주거 권리만 있었다. 물론 법 규정을 피해서 실제 사고팔기도 하고 교환이 성행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의장 집은 관사가 아닌 개인 소유였다는 점이 놀라웠다. 결국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이었는데 놀라운 특권이었다. 아마도 지금은 수백만달러에 해당하는 건물이라고 추정한다. 관공서 사이 조용한 길에 위치한, 전형적인 제정러시아 시절 지어진 격조 높은 5층 건물 아파트였다. 밖에서는 사무실 건물인지 아파트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그 집이 그렇게 큰지, 누구 집인지 알 도리가 없다. 소련 최고위 특권층은 이렇게 은밀하게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 소련 시절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관과 시민. photo 뉴시스

   별천지 정치국원들의 주택단지
   
   당시 모스크바 일반 시민들은 대개 외곽의 신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에 대거 건축되어 ‘흐루쇼프 아파트’라고 불린 주택이다. 너무 단시간에 대량으로 지어 부실하다는 평이 있었지만 한 가족이 단독으로 사용했다. 거기에 반해 제정러시아 시절에 지어진 시내 아파트는 공동아파트, 콤뮤날나야 크바르티라(kommunalnaya kvartira·Communal Apart)라고 불렀다. 아파트 한 채 안에 거실 포함 방이 4개면 4가족이 화장실, 목욕탕, 식당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옆방의 말소리가 당연히 다 들려 사생활이 없는 삶이었다. 아파트 안에서는 어느 가족이라도 비밀이 없었다. 소련 시절 소설이나 영화에는 공동아파트 안에서 일어나는 10대들의 사랑과 다른 부부들 사이의 불륜 같은 것들이 많이 다뤄지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가 가 본 의장 집에는 두 부부와 아들 부부 총 4명만 사는 집인데도 일반 아파트의 5배 크기는 되는 듯했다.
   
   필자가 직접 겪은 가장 놀라운 특권은 정치국원 30여명이 사는 주택단지였다. 정치국이라면 실질적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기구이다. 여기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고 최고 지도자도 선출한다. 소련 정치국원은 정말 VIP 중에도 VIP였다. 여기서의 음모로 반란이 일어나 흐루쇼프가 졸지에 권력을 잃고 내려앉기도 했다. 이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모스크바 외곽 쿤체보 지역이었다. 깊은 산림 속에 위치하고 삼엄한 담장과 경비가 갖춰진 주택단지다. 주위에 산림이 우거져 있어 아주 쾌적하다. 당시 소련인들은 쿤체보에 가 본 적이 없어도 어떤 곳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완전히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격리만이 아니라 전기, 수도, 가스 같은 모든 기본 시설이 단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쓰는 시스템과는 별도의 시설이 운영된다는 말이다. 전기도 자체로 발전하고 수돗물도 독립 수원에서 끌어서 정수해 공급하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다. 채소, 육류, 우유, 치즈 같은 유가공제품, 과일, 심지어는 잼 같은 장기저장 식품마저도 자체 농장에서 생산해서 먹는 정말 별천지였다. 일반 시민들과는 완벽하게 절연된 세상에서 생활하는 셈이었다. 만일 인근 모스크바에 정전이나 수돗물 문제가 생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도 이곳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초대를 받아 이 동네에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정치국원 후보였던 집주인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었는데 경악스러움에 입을 벌리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당시 갈 만한 레스토랑이 별로 없었다. 정부 레스토랑은 가격은 싸고 음식은 먹을 만했지만 실내장식이나 분위기가 별로였다. 당시 소련을 방문하는 모든 외국인이 이용했던 엄청나게 큰 아르바트 레스토랑이 그런 곳이었다. 큰 건물 1층에 공장 사내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사기업이 운영하는 코프라티브 레스토랑은 아직 동네 식당 수준밖에 안 되었다.
   
   당시 최고급 레스토랑은 기관들이 운영하는 일종의 클럽 같은 곳이었다. 그런 곳은 전형적인 유럽풍 제정러시아식 건물에 실내장식도 고전적이어서 흡사 궁궐이나 귀족 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음식도 최고 수준이었고 와인도 최고급 그루지야나 아르메니아산을 쓰고 있었다. 가격은 그런 분위기와 음식 수준에 비하면 정말 염가였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학교 앞 라면가게 값을 낸다고 보면 된다. 바로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낸다는 것이 특혜였다. 국가 예산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특권층이 혜택을 보는 셈이다. 아무나 이용할 수 없다는 점도 특혜였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실내가 아름다운 소련건축가클럽이나 소련작가클럽은 협회 회원 중에서도 고급 간부 회원만 이용이 가능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당원 중에서도 가장 고급 당원이었다.
   
   
   특권층 전용 중앙차선의 위력
   
   고급 공산당원들의 특권에 대한 경험은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르비브(Lviv)라는 폴란드 접경도시에 시청 초청으로 갔을 때도 겪었다. 당시 합작기업 관련 상담을 마치고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호텔로 필자를 데리러 온 차가 삼엄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기관총을 든 경비병이 서 있는 흡사 수용소 같은 교외의 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거의 10분 이상을 아름드리 전나무가 서 있는 길로 더 들어가서야 드디어 궁전 같은 집이 나왔다. 바로 그곳이 르비브 공산당 고급 간부 휴양시설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이 이 고급 당원의 휴양만을 위해 존재했다. 휴양시설은 큰 것도 아니었다. 방이 10개 정도 있을까 말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화려한 레스토랑을 비롯해 사우나, 당구장, 실내 체육시설 같은 모든 유흥시설과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그날 우리 일행 단 6명을 위해 일하던 종업원만 30명은 넘는 듯했다. 거기서 그날 저녁, 문자 그대로 주지육림의 연회가 열렸다. 물론 아직 서슬이 시퍼런 공산당 시절에 인구 100만명이 넘는 도시 공산당 시당 위원장이 출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모스크바 시내 중심 대로에는 좌우 차선 중앙에 차선이 하나 더 있었다. 원래는 앰뷸런스, 소방차, 경찰차들이 긴급 출동할 때 교통혼잡 방해를 받지 않고 가기 위해 만들어진 긴급 주행 차선이다. 그런데 실제 사용은 비상등을 달고 앞뒤에 경호차를 대동한 소련 특권층의 차이카, 볼가 같은 대형 차량 전용도로가 되어 버렸다. 스탈린 시절에 이 도로에 특권층 차가 비상등 켜고 달리다가 초록색 신호에 길을 건너는 행인을 그대로 밀고 간 사례가 있다고 모스크바 시민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나 있었다. 실제 필자의 지인 한 명은 그런 일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그 지인은 “아마 그런 상황에서는 운전기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했다. 특권층이 암살이나 테러 문제에 조심을 하다 보니 보행자를 밀고 가도 된다는 규정이 있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였다.
   
   당시 소련 자동차 회사는 모두 국영기업이라 생산하는 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그중에도 대형 자동차는 두 종류밖에 없었다. ‘갈매기’라는 뜻의 차이카는 가장 큰 고급 승용차였다. 당 간부를 비롯해 정부의 장차관급 고위관리들만 타는 관용차용이었다. 크기가 롤스로이스보다 더 큰 초대형이었다. 볼가는 그 아래 크기로 고급 관리들의 차였다. 계급이 없다는 소련이었지만 계급에 따라 차 종류까지도 달랐던 셈이다. 그래서 소련 국민들은 차만 보면 어느 계급의 승객이 타고 다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대형차들은 소련 시절에는 관용차용이라 일반인들은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불가했다. 필자도 원자재 구매를 위해 모스크바에 가면 공항 귀빈실로 나와서 차이카를 타고 중앙 긴급 주행 차선으로 상담 장소나 호텔로 갔다.
   
   필자가 소속됐던 한국 기업이 당시 첫 한·소 합작기업을 설립했다. 그러고 나서 당시 소련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자이체프와 협업으로 패션쇼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패션업계 인사의 초청으로 모스크바 근교의 고급 별장 지대에서 열린 주말 파티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 주민 대다수는 교외에 ‘다차’라는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그냥 판잣집보다 좀 나은 수준의 크기와 구조였다. 다차 주위에 텃밭이 있어 거기서 모자라는 채소를 주말을 이용해 키워 자급하고 도시와 아파트를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식이었다.
   
   물론 필자가 간 다차는 일반 시민들의 다차와는 달리 엄청나게 화려하고 큰 저택이었다. 그 저택 안에서 모스크바 상류층 사교계의 주요 인사 수십 명이 모여 주말 파티를 열곤 했다. 패션, 영화, 음악, 연극, 연예계는 물론 각종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문제는 그 파티가 서방 영화에서나 보던 탈선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영화배우, 가수, 패션모델 등 예술계의 선남선녀들이 모여 보드카 같은 독주를 망가질 때까지 마시는 ‘빈지 드링킹(binge dringking)’은 물론 마리화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마약까지 즐기고 있었다. 이들 전원이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부모가 모두 중앙당 간부들이었다. 이들의 신분은 엘리트 공산당원이었고, 젊은 공산당원들의 조직인 콤소몰(Komsomol) 간부들이기도 했다. 대를 물려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민영화를 통해 불하되던 주요 국영기업을 하나씩 차지해 현재 러시아의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oligarch)들이 되었다.
   
   
▲ 모스크바 중심부에 자리 잡은 볼쇼이 발레극장. photo 셔터스톡

   70년 소련 역사서 당원이 소추받은 적 없어
   
   10월혁명 이후 소련 70년 역사에서 여하한 일로도 당원들이 정식으로 법의 소추를 받아 처벌받은 예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가히 공산당원의 무오류 원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말까지 지식인 사회에서 있었다. 공산당원이라고 오직(汚職)이나 횡령, 심지어는 치정살인 같은 범죄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범죄라도 공산당원은 결코 정식 재판을 통해 형을 받지 않았다. 그냥 당이나 조직 내에서만 조용하게 처분이 이루어졌다. 경찰이고 검찰이고 법원이고 모두 권력의 손발이니 제대로 된 소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거기다가 신문이나 방송마저 당에서 장악해 전혀 보도가 안 되니 일반 국민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조용하게 지나갔다.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의 ‘카더라 통신’을 통해 알게 모르게 진상이 퍼져 나가긴 했지만 그것도 소수 국민들만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프라우다에는 진실이 없고, 이즈베스티야에는 뉴스가 없다”는 비아냥이다. 러시아어로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의 뜻은 ‘진실’이고 소련 정부가 발행하는 이즈베스티야(Izvestia)의 의미는 ‘뉴스’이다. 진실이란 이름을 달고 진실은 보도하지 않고, 뉴스라는 신문이 뉴스를 싣지 않는다는 뜻을 비틀었다. 결국 소련 언론은 진실도 뉴스도 보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련 특권층이 누리는 특권을 필자가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제일 놀란 점은 소련의 특권층이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정부가 중요한 일을 하는 간부들에게 특권을 선의로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권리가 되어 버렸을 수 있다. 특권을 받을 만한 특권층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라고 여겨 얼마든지 누려도 된다고 여기는 듯했다. 또 하나 놀란 점은 특권층의 자식들까지도 당연히 부모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점이었다. 어차피 특권 계급은 대를 물려 내려가게 되어 있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자식들이 부모 직업을 따라 가는 걸 자연스럽게 여겼다. 아버지가 화학공장 기술자이면 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해 화학공장으로 취업하는 식이었다. 서민은 서민대로,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그 계급 내에서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해당 기술학교를 졸업하면 가야 할 직장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가 정해줬다. 결국 대를 물려 직장과 계급이 이어지는 기가 막힌 현실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시되는 ‘부모 찬스’와 대물림 특권
   
   그러니 당연히 서민층과 특권층 자녀들은 모두 부모들이 간 길을 따라 가려고 거기에 맞는 학교를 가서 사회 진출 준비를 했다. 당연히 특권층 부모는 자신의 특권을 자식이 이어받을 수 있는 계급으로 만들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말하는 ‘부모 찬스’를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계급 간 이동이나 신분 세탁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였다. 당시 소련에는 대학생 데모가 한 건도 없었다. 옐친 쿠데타 때 데모를 하고 탱크와 대치하던 극렬 청년 시위대는 젊은 직장인들이었지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 대학생들은 학업이나 사회·정치활동 참여보다는 취직과 창업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소련 대학생은 모두 금수저 아니면 최소한 은수저였기 때문이다. 은수저도 안 되면 모스크바 소재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계급을 흔들 데모를 할 대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무계급, 무차별, 무특권을 지향한다는 소련에서 제일 놀란 점은 서방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지독한 계급과 차별과 특권의 횡행이 아니었다. 그런 계급과 차별과 특권을 보면서도 그냥 받아들이는 소련인들의 태도가 더 놀라웠다. 매일매일 모든 면에서 결핍을 느끼며 살면서도 자신들과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 사는 특권층에 대해 전혀 반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신비로웠다. 특권층이 누리는 특권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어서였는지, 혹은 너무 오랫동안 행해지면서 세뇌되어서인지,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무뇌충(無惱蟲) 같은 소련인들의 태도가 정말 충격이었다. 인간이란 이렇게 부당한 일도 오래 지속되고 주위에 만연하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특권층 전용의 특수 상점 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 안에 못 들어가는 현실에서도 소련 일반인들은 격렬한 반감이나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소련인들의 삶의 태도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지 당시 머리가 복잡했었다. 그래서 주위의 한국인이나 외국인 친구들과 논쟁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우선 그런 무신경 혹은 무관심은 같은 공장에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은 가구, 가전제품, 옷을 입고 생활을 한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위의 모든 이웃들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살기 때문에 나만 뒤처지고 못살고 못 구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자위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짐작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그 밖의 상류 계급에 대해서는 무신경, 무관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사람들이란 멀리 있는 상류층의 특권보다는 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누리는 작은 특권을 더욱 질시해서 배 아파하는 심리가 있다. 워낙 계급 차이가 나면 포기와 체념을 하기 때문에 배도 안 아프고 분노도 안 하는 심리이다.
   
   
   차별과 특권에 분노하지 않는 시민들
   
   또 다른 결론은 자신들과는 다른 일을 하고 다른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특권은 누려도 된다고 느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는 능력 사회가 아니라 계급 사회였다.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이 능력이 아니라 피(血)로 내려왔기에 오랫동안 계급과 차별과 특권에 익숙해져 있었다. 제정러시아에서 소련으로 바로 넘어왔기에 신흥귀족인 특권층의 특권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보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부정을 소추해야 하는 경찰과 검찰과 법원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의 수족이 된 마당에, 비판세력인 언론마저 통제되면 국민은 판단능력이 없어져 세뇌돼 버린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은 특권층의 특권이 있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분노하지 않게 된다. 권력자의 조그만 시혜에도 행복해하면서 부당함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게 된다. 진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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