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구시가지 전경. 황금돔 사원이 있는 곳이 성전산 중심이다. ⓒphoto 셔터스톡
예루살렘 구시가지 전경. 황금돔 사원이 있는 곳이 성전산 중심이다. ⓒphoto 셔터스톡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성전산(聖殿山·Temple Mount)을 꼭 찾는다. 사실 산이라는 느낌은 없고 대략 동서로 300m, 남북으로 500m 정도인 마름모꼴 광장이다. 중심에는 황금돔 이슬람사원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성전산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최고 화약고다. “성전산에서 갈등이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을 통해 요르단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성전산을 탈환했다. 하지만 이미 이슬람 성지가 된 성전산을 강제 접수하기에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운영은 요르단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공공재단 와크프(WAQF)가 맡고 이스라엘 경찰은 외곽경비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잦다.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가 돌연 성전산을 방문하자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벌어졌다.

“여기서 갈등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

최근 발생한 유혈사태도 성전산에서 비롯됐다. 당초 유대인 정착촌 셰이크 자라의 팔레스타인 퇴거 재판에서 이스라엘 법원이 이스라엘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팔레스타인 측 시위가 잦아진 가운데, 라마단을 맞아 성전산 알아크사사원에 모인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이스라엘 경찰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가 성전산에서 이스라엘 경찰에 철수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먼저 로켓을 발사했고 양측 충돌은 격화되었다.

도대체 3대 유일신 종교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성지로 여기는 성전산이 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약고가 되었을까. 유대교에서 성전산은 아담과 노아가 밟았던 땅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주된 사역이 벌어진 무대이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하늘을 다녀왔다는 전승에 따라 지어진 2개 사원이 자리 잡고 있어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구약성경에 따르면 BC 1000년경 다윗 왕이 아라우나로부터 은 50세겔(일반 노동자 200일의 품삯)에 성전산(당시에는 타작 마당)을 구입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BC 960년 그곳에 제1성전을 세웠다. 하지만 BC 586년 바빌론의 침공으로 제1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대거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50년 뒤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의 지휘로 성전 재건을 시작했고 BC 516년 제2성전을 완공했다.

시간이 흘러 BC 20년, 유대인이 아닌 에돔 사람으로 로마의 분봉왕(分封王·Tetrarch) 노릇을 하던 헤롯은 유대인의 민심을 얻으려고 성전과 부속건물을 화려하게 신증축했다. 땅도 지금처럼 평평하게 골랐다. 하지만 AD 70년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 타이투스 장군은 제2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예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부서져버렸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로마가 파괴, 이슬람이 화려하게 부활

이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성전산에다 주피터신전을 세웠고, 이후 비잔틴시대에도 유대교의 성전터였다는 이유로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성전산의 이슬람시대가 화려하게 열렸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40세인 AD 610년부터 계시를 받고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기면서(히즈라) 독자적인 종교로 발돋움했다. 이후 포교를 위해 주변에 대한 무력정복을 병행했는데, 632년 무함마드 사후 확장세는 더욱 빨라졌다.

638년 예루살렘과 성전산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는 코란 17장1절에 나오는 ‘알라의 종을 밤새 메카 사원에서 아득히 먼 사원으로 데려갔다’는 구절의 ‘아득히 먼(알아크사·Al-Aqsa)’ 장소를 예루살렘이라고 특정하게 된다. 당시 무함마드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경쟁이 치열했는데,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본거지를 둔 우마이야 왕조가 메카 지역 칼리프에 맞서 예루살렘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 우마이야 왕조의 5대 칼리프인 압둘 말리크는 691년 8각형의 바위사원(Dome of the Rock)을 세웠다. 돔 아래에는 폭 10m가 넘는 바위가 있는데 무함마드가 야간비행을 통해 메카에서 날아와 이 바위를 딛고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몇 년 뒤에는 바위사원 남쪽에다 알아크사사원을 추가로 지었다.

바위사원은 1099년 십자군 시대에 교회(템플럼 도미니)로 잠시 바뀌었으나 1187년 다시 이슬람 손으로 들어갔다. 20세기 들어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사재 650만달러를 털어 24K의 순금으로 1200장의 얇은 판을 바위사원에 씌웠다. 이제 명실상부한 황금돔이 되어 예루살렘을 압도하는 포토존이 되었다.

성전산 중심에 있는 황금돔 이슬람사원. ⓒphoto 셔터스톡
성전산 중심에 있는 황금돔 이슬람사원. ⓒphoto 셔터스톡

성전산에 덧씌운 무함마드의 전설

그렇다면 무함마드의 야간비행 스토리는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무함마드 사후 그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는 시대별로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9세기 부카리 하디스에 비교적 상세한 스토리가 수록되어 많이 회자되고 있다. 골자는 무함마드가 621년경 메카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 1486㎞ 거리를 부라크라는 천마를 타고 순식간에 날아와(이스라·Isra·수평이동) 그곳에서 다시 칠층천(七層天)을 올라갔다(미라지·Mi’raj·수직이동)는 것. 특히 알라를 만나 하루 50번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무리”라는 모세의 조언에 따라 알라에게 계속 간청한 결과 결국 하루 5번으로 줄였다는 내용도 있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코란에 예루살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없다는 점을 들어 야간비행을 허구라고 지적한다. ‘아득히 먼 사원’이 메카 근처에 있는 알지라나(Al-Jiranah)란 작은 마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국제문제저널리스트인 오가와 히데키(小川秀樹)는 저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기행’에서 “점령한 기독교 도시 예루살렘을 빠르게 이슬람화할 필요가 있어 창작되어진 설화일 것”이라며 “아무리 봐도 억지로 만든 이야기”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이 무함마드의 야간비행을 믿기 시작한 이상, 성전산이 이슬람 제3의 성지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최영길 명예교수는 논문에서 “전설적으로 전해오는 우화적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전 세계 16억 이슬람인은 그 사건 발생의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신이 밝힌 역사적·사실적 사건으로 믿고 교리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슬람에서는 성전산을 ‘하람 알 샤리프(Haram al-Sharif)’, 즉 고귀한 장소라고 부른다. 따라서 앞으로도 성전산에 대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침범을 용납할 수가 없다. 유대교나 이슬람과 달리 성전산에 대한 기독교 입장은 조금 복잡하다. 무엇보다 유대인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시각이 다양해졌다.

제3성전 짓자는 기독교 세대주의

첫째는, 예수 승천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은 사라졌고 ‘천상의 새 예루살렘’이 중요하므로 지금 중동의 이스라엘은 그냥 세속국가의 독립일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입장은, 비록 유대인의 선민(選民) 지위는 사라졌지만 로마서 11장 등을 보면 종말에 적지 않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므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두 가지 입장은 성전산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건물인 ‘성전’의 기능은 구세주인 ‘예수’로 대체되었으므로, 물리적인 성전산에 의미를 두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입장은 조금 묘하다. 19세기에 등장한 세대주의(世代主義·Dispensationalism)가 그것이다. 영국에서 플리머스형제단(Plymouth Brethren)을 이끌었던 존 넬슨 다비가 주창한 세대주의 신학은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 발간된 스코필드주석성경을 시작으로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도 대부분 세대주의자였다. 세대주의는 신(神)이 인류 역사를 7세대로 나누어 각각 경륜을 달리하는데, 예수 이후부터 일정 기간 교회를 통한 이방인 구원에 집중하지만, 종말을 앞두고 유대인을 다시 불러모아 천년왕국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절기와 제사를 부활하고 성전산의 이슬람사원을 제거한 뒤 제3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AD 70년 로마에 망했다가 1948년 극적으로 재건되면서 세대주의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남동부 지역과 최대 교단인 남(南)침례교의 상당수가 세대주의 영향을 받아 친(親)이스라엘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댈러스신학교 등이 세대주의 교육을 많이 했다. 그래서 세대주의를 ‘기독교 시온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드는 것을 두고는 학계·언론계·금융계 등 핵심 요직을 유대인이 장악한 데다 AIPAC(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협의회) 같은 단체의 막강한 로비가 배경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맞는 말이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 바로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일부 기독교계의 자발적 지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최근 기독교와 유대교의 정서적 연대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껴진다. 비행기와 터미널을 잇는 통로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을 당긴다. ‘전 세계 수백만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동료애의 실천을 통해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단결한다’고 적힌 IFCJ(국제기독교유대인협회) 단체의 포스터다. ‘유대교에 근거한 기독교를 깨달음으로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이 IFCJ 원칙이다.

현재 기독교 세대주의와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반(反)유대주의, 유대인 고국 귀환(알리야), 성전산 이슈 등에서 유대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예수를 믿는 극소수 유대인을 가리키는 ‘메시아닉 쥬(Jew)’와 세대주의의 교류는 더욱 활발한 편이다.

루터와 칼빈의 개혁주의(改革主義)를 따르는 정통 신학계에서는 세대주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시한부 종말론과 환란 전(前) 휴거론 등을 내세운 이단들이 세대주의를 이론적 배경으로 깔고 있고, 백투예루살렘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친이스라엘 운동 역시 세대주의와 관계가 있어서다.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성전산 갈등에서 비롯됐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불타오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photo 뉴시스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성전산 갈등에서 비롯됐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불타오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photo 뉴시스

미국 기독교인의 20%가 세대주의

총신대 이한수 명예교수는 유튜브를 통해 “세대주의는 미국 기독교인의 20% 정도를 차지하고 한국에도 많이 스며들어 있다”며 “세대주의는 유대인 우월주의를 강조하고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회복을 문자적으로 믿는 등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사실 성전산을 가장 원하는 건 유대교 쪽이라고 봐야 한다. 이슬람은 메카와 메디나가 더 중요하고, 기독교는 물리적 장소에 대한 관심이 덜해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전산에 잘 올라가지 않는데, 정치적 이유와는 별도로 과거 제2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지성소(The Holy of Holies)의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자칫 그 땅을 밟을까 염려해서다. 비행기도 성전산 위로는 날지 않도록 조심한다. 대신 유대인들은 성전산 바깥의 서쪽벽(통곡의 벽)에서만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성전산을 반드시 회복하고 싶어 한다. 성전연구소(The Temple Institute)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는 성전산에 제3성전을 짓기 위한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다. 하지만 세계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하기에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논쟁도 치열하다.

이렇게 각 종교마다 복잡한 속내로 얽혀 있어 성전산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될 전망이다. 믿음의 뿌리가 다르고 서로에게 입힌 역사적 상처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장소가 중요한가, 믿음이 중요한가. 성전산 문제의 해답은 신(神)만이 알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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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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