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였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photo. 뉴시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였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photo. 뉴시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국영기업이 ‘간섭하고 참견하는 관리들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노동조합 수뇌부의 손에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민영화는 ‘부식되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주의 영향을 돌리려는 치명적인 노력’이고 ‘자유의 영토를 탈환하려는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민영화는 ‘국가의 권력을 줄이고 국민의 힘을 증대시킨다’는 주장도 폈다. 대처의 국영기업 민영화 시도는 당시 누구도 감히 대들지 못하던 노동조합의 생사를 건드린 역린의 모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조종을 받는 노동당은 물론 결사반대했다.

심지어 보수당 내에서도 저항에 부닥쳤다. 당시 보수당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수많은 공청회와 콘퍼런스 등을 통해 직간접으로 국민을 설득했다. ‘부자들의 정당이니 민영화는 국민보다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여론부터 돌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회의와 의심을 불식할 최고의 방법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여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성공적인 주식 공개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민영화의 가장 큰 시도였던 1984년의 BT(British Telecommunications·영국통신회사) 공개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덕분에 국영기업 공개는 순조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민영화 성공의 초석이 된 BT 주식 공개 사실 BT 공개의 가장 큰 협조자였어야 할 런던 금융계가 가장 큰 적이 됐다는 사실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들은 BT 주식 50.2%에 해당하는 39억파운드(현재 가치 128억파운드)가 시장에 쏟아져 나올 때 누가 살 수 있을지 의심했다. 39억파운드는 그 이전까지 세계 기록이었던 미국 거대 통신기업 AT&T의 10억달러(7936만파운드·당시 파운드 달러 환율 1.26) 주식 공개의 5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1984년 당시 런던 주식시장(LSE·London Stock Exchange)의 상장주식 평균 총액이 182억파운드에 불과했는데 총액의 21%에 해당하는 큰 주식이 쏟아져 나올 터이니 전문가들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걱정과 우려가 기우였음이 주식 공모 첫날부터 증명되었다. 공모 청약 비율은 3.2배였는데 200만명이 공모주를 청약하는 광풍이 영국을 휩쓸었다. 큰손 금융기관들이 아닌 순수한 국민들이 산 주식만 전체의 34.3%였다. 진정한 국민주가 탄생한 셈이다. 상식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영국 주식 역사는 BT 주식 공모 전과 후로 나뉜다.당시 공개 주식 총액의 10%를 BT 직원 25만명 중 96%가 사서 소유했다. 1인당 1666파운드어치를 산 셈인데, 당시 영국인 평균 연봉이 1만파운드가 채 안 될 때였음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투자였다. BT 주식 가격이 공모가의 10배는 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는데 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1986년 135파운드였던 주식이 2011년 1686파운드가 되었다. BT 주가는 1980년 2만1000파운드, 1990년 5만9000파운드, 2000년 9만4000파운드, 2010년 17만파운드, 2020년 25만6000파운드로 계속 뛰었다. 영국 주택 가격이 지난 40년간 12.1배 올랐는데 BT 주가는 15년 만에 12.4배가 되었다.

공기업 민영화로 1500만명이 주주로 BT 주식 공개 당시 벌어진 열풍을 보며 보수당 정권은 대오각성했다. 민영화는 소유와 산업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총선 득표와도 연관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BT 이전에도 몇 개의 소규모 국영기업 공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덕분에 BT 이후 민영화가 실행된 40개 국영기업의 종업원들 대부분이 공모에 적극 참여했다. 예를 들면 브리티시에어로스페이스 직원 96%, 영국항만주식회사 90% 등 국영기업 직원들의 90% 이상이 자사 주식을 보유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1979년에는 7%의 영국인만 주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1991년에는 25%가 주식을 소유하게 됐다. 참고로 2020년에는 33%의 영국인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BT 민영화 후 계속된 민영화로 현재 영국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GDP의 2%에 불과하고 고용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대처가 권좌에서 내려오는 1990년까지 종업원 60만명의 국영기업체 40개가 민영화되어 600억파운드가 국고에 들어왔다. 그 결과 1500만명의 국민이 주식 소유주가 되었다.이 모든 주주가 보수당 지지자가 되었을 리는 없지만 분명 노동당과의 선거전에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이다.

물론 노동당도 이런 내용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몇 표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당헌 4조이긴 하지만 실제 당헌 1조라고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철학인 ‘기간산업의 공동소유’, 즉 국유화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1983년 대처 2기 집권을 가져온 총선에서도 당헌 4조 문제는 논란이 되었다. ‘이렇게 당헌을 놔두고 총선에 들어가면 우리사주 소유 노동자뿐만 아니라 1500만명의 주식 소유자들이 노동당을 지지하겠느냐’는 당연한 논란이었다. 하지만 노동당은 4조를 그대로 지킨다. 이때 노동당 그림자 내각 환경부 장관이던 하원의원이 노동당의 총선 정강정책(manifesto)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 노트(The longest suicide note in history)’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983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적인14.8%의 표차로 눌렀고 과반수에서 무려 72석을 더 얻는 압승을 한다. 그래도 노동당은 역사상 가장 긴 자살 노트를 12년간이나 더 부여잡고 있으면서 그 후 총선에서 두 번을 더 패한다. 결국 1994년 41살의 토니 블레어가 70~80세의 의원이 득실득실한 100년 전통의 노동당 당수가 된 뒤에야 산업 국유화를 고집하던 4조는 폐지됐고, 2년 뒤인 1997년 18년 만에 드디어 정권을 잡는다. 결국 정치란 현실이고 그래서 버리지 못할 정책은 없다.

키워드

#런던 통신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