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2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는  천스중 대만 위생복리부장(장관). ⓒphoto 뉴시스
지난 3월 22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는 천스중 대만 위생복리부장(장관). ⓒphoto 뉴시스

세계적 찬사를 받던 대만의 ‘T방역’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신규확진자 723명으로 지난해 코로나19 창궐 이래 최고치를 찍은 데 이어, 지난 5월 26일과 27일에도 600명대를 넘어섰다. 한국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인구 2300만명 대만에서 이 같은 신규확진자 규모가 갖는 파장은 엄청나다. 코로나19 초창기 발빠른 중국발(發) 입국봉쇄로 코로나19를 막아왔던 대만의 방역전선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는 6월 14일까지 3단계 경계태세가 발령되면서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지지율도 급락하고 있다. 코로나19 초창기 ‘국민영웅’으로 불리며 수도 타이베이 차기 시장으로 거명됐던 방역지휘관 천스중(陳時中) 위생복리부장(장관)은 백신 확보 문제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리며 야당인 국민당의 경질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문제는 백신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다. 특히 현존 백신 중 가장 방어력이 뛰어나 선호도가 높은 ‘화이자-바이오엔텍(BNT)’ 백신을 대만으로 도입하는 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의 중화권 총판(딜러)이 중국 상하이에 본사를 둔 푸싱(復星)의약이었던 것이다. 푸싱의약은 중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상하이의 유명 투자기업 푸싱그룹 궈광창(郭廣昌) 회장이 지배하는 제약사다.

코로나19 초창기인 지난해 3월 16일, 푸싱 측은 독일 바이오엔텍의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개발에 돈을 대는 조건으로 ‘전략적 합작’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대륙을 비롯해 홍콩, 마카오, 대만의 판권까지 일찌감치 확보했다. 당시 푸싱 측은 바이오엔텍 측에 8500만달러(약 950억원)의 연구비와 함께 중국 내 임상시험을 주선하고, 이와 별개로 5000만달러(약 550억원)를 들여 바이오엔텍 주식까지 확보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17일 미국 화이자가 독일 바이오엔텍과 합작계약을 체결하기 하루 전날이다.

자연히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의 중화권 판권이 중국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코로나19 초기 강경한 대중 봉쇄정책으로 방역전선을 유지하던 대만은 졸지에 중국 측에 구걸해 백신을 한 병이라도 얻어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계약 체결 직전 ‘국가’ 표기에 시비

심지어 중화권 판권을 갖고 있는 푸싱을 피해 독일 바이오엔텍 본사에서 백신을 직도입하려는 계획마저 제동이 걸렸다. 대만의 방역전선을 총지휘하는 천스중 위생복리부장에 따르면, 대만 정부와 독일 바이오엔텍 측은 이미 지난해 8월 말쯤 백신 구매를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상태였다. 지난해 12월 31일에는 사실상 계약을 타결했고 지난 1월경에는 최종적으로 계약서 문구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종계약 체결을 앞두고 언론에 배포하기로 한 보도자료에 적힌 두 글자가 문제가 됐다. 바이오엔텍 측에서 돌연 언론보도문의 ‘우리나라(我國)’란 두 글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 이 같은 문제제기에 결국 대만 측은 지난 1월 9일 ‘우리나라’란 자구를 ‘대만’으로 수정하기로 의견을 전달했지만, 바이오엔텍은 또 다른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며 끝내 쌍방 간 협상은 결렬됐다.

지난 5월 27일 이 같은 백신협상 결렬 과정을 공개한 천스중 부장은 “쌍방 간의 계약은 이미 결정지은 상태였다”며 “결국 계약서 내의 문제가 아닌 계약서 밖의 문제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고 토로했다.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협상 결렬 배경에 중국에서 꺼리는 ‘국가’ 표현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이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을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도 지난 5월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리는 바이오엔텍 독일 본사와 거의 계약을 체결했지만, 중국의 개입으로 지금까지 계약 체결을 못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폭스콘 등 개별기업 독자구매 타진

실제로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 확보에 차질을 빚고 있는 대만과 달리 1997년과 1999년 각각 중국에 반환돼 중국 당국에 비교적 고분고분한 홍콩과 마카오는 푸싱 측이 판권을 갖고 있는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을 차질 없이 공급받고 있다. 지난 2월과 3월에 걸쳐 100만회분에 달하는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이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홍콩 캐세이퍼시픽항공 편에 실려 홍콩으로 전달됐다. 이 중 일부는 강주아오(港珠澳)대교를 통해 마카오로 재배급됐다. 우이팡(吴以芳) 푸싱의약 CEO는 “우리는 홍콩과 마카오 특별행정구 정부의 백신접종 계획에 밀접하게 협력해 홍콩·마카오 지역의 방역성과를 굳힐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중국 측은 대만 정부의 이 같은 항변에 정반대의 설명을 내놓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지난 5월 22일, “최근 대만 지역의 코로나19가 악화하고 있는데 일부 기구와 단체들이 상하이 푸싱의약이 중화권 판권을 갖고 있는 백신을 긴급구매해 (대만)섬 내의 방역을 강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보도했다.

신화사는 푸싱의약 CEO 우이팡의 말을 인용해, “푸싱의약은 대만 동포(同胞)들에게 백신을 제공하길 희망한다”며 “우리는 지난해부터 여러 개의 채널을 이용해 대만 지역에 바이오엔텍 백신을 제공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고 해명했다.

자연히 불똥은 다시 대만 정부로 튀었다. 실제로 홍하이정밀(폭스콘) 등 대만 유력 기업들은 그간 개별적인 채널을 통해 푸싱 측이 판권을 갖고 있는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을 확보하겠다는 의사를 대만 정부 측에 수차례 타진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홍하이정밀은 애플의 아이폰을 중국 현지에서 위탁생산하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위탁제조(EMS) 기업으로, 중국 현지에 거느린 직원만 60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대만 당국은 개별기업의 백신 확보 시도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 5월 26일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신 구매는 중앙의 통제하에 진행되고 전체적인 방역정책과 부합해야 한다”며 “그래야 백신 접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공평성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하루 수십 명대에 불과했던 신규확진자수가 최고 700명대까지 치솟으면서 개별기업의 백신 확보 노력을 막아온 당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비등하는 상황이다.

지금은 야당인 국민당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진당 내에서도 백신 개별확보론이 나오고 있다. 대만 최고 갑부로 지난 대선 때 국민당 대선 경선 후보로도 나섰던 궈타이밍(郭台銘) 홍하이정밀 회장도 지난 5월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총 500만회분의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 확보 계획을 밝히면서 독자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궈타이밍 회장은 “아스트라제네카(AZ), 모더나, 바이오엔텍 혹은 자체 백신이든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우리는 어떠한 기회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확보 사활

실제로 오는 10월까지 전체 인구(2300만명)의 65%인 1500만명에게 백신을 접종해 ‘집단면역’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대만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돼버렸다. 1인당 2회 접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총 3000만회(1500만×2)분의 백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 확보 실패 등으로 대만 당국이 실제로 확보한 물량은 지난 5월 28일까지 87만6600회분에 불과하다. 백신접종률도 아직 2% 아래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이에 수세에 몰린 대만 정부의 입장이 조금씩 바뀌는 기류도 보인다. 차이잉원 총통도 지난 5월 31일 방역과 백신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백신을 쟁취하자”는 진일보한 입장을 내놨다.

일단 가장 만만한 것은 주요 백신 가운데 가장 선호도가 떨어져 구하기 쉽다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다. 대만 야후 온라인 여론조사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선호도가 2.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지난 3월 한국 경북 안동의 SK바이오사이언스에서 위탁생산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1만7000회분을 대한항공 편으로 긴급 공수받았다.

지난 5월 19일에는 세계 백신 공동분배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 퍼실리티’를 통해 확보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41만4000회분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대만 에바항공 편으로 싣고 왔다.

지난 5월 29일에는 일본 정부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일부를 대만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10년 전인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때 대만이 지원해준 데 대한 보답 차원이다. 일본은 ‘혈전’ 논란이 불거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지난 5월 21일에야 긴급승인했는데, 이마저도 대만으로 보내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대만은 자국 내 백신선호도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41.6%의 선호도를 기록한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 공급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라도 끌어모으는 데 사활을 걸고 있는 셈이다.

한편 대만 당국은 자체 개발 백신 도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만 정부는 지난 5월 28일 자국 제약사인 가오돤(高端·메디젠) 및 롄야(聯亞·UBI)와 각각 최대 1000만회분의 백신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오는 7월경 보급이 예상되는 대만 자체 개발 백신의 경우, 재조합단백질 방식으로 화이자-바이오엔텍이나 모더나가 사용하는 mRNA 방식과 다르고, 임상 2기 시험절차도 아직 끝나지 않아 여러 가지 우려가 제기되는 형편이다. 대만 내 백신선호도 여론조사에서도 가오돤·롄야 백신 선호도는 각각 5.7%와 0.9%에 불과했다.

이에 천스중 대만 위생복리부장은 지난 5월 28일 “(자국 백신기업들과) 선행계약을 체결한 것은 공급상에게 양산 및 연구개발에 필요한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고, 대만 국민들이 가장 처음 백신을 사용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국제사회에서도 수많은 국가가 백신 임상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은 단계에서 대량의 자금을 투입해 백신 구매에 나선 바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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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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