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31일 다이애나 왕세자비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살았던 런던 켄싱턴궁 앞에 추모 화환과  사진들이 놓여 있다. 올해 7월 1일 다이애나 60세 생일을 맞아 영국에서는 다시 추모 열기가 일고 있다. ⓒphoto 뉴시스
2017년 8월 31일 다이애나 왕세자비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녀가 숨지기 전까지 살았던 런던 켄싱턴궁 앞에 추모 화환과 사진들이 놓여 있다. 올해 7월 1일 다이애나 60세 생일을 맞아 영국에서는 다시 추모 열기가 일고 있다. ⓒphoto 뉴시스

영원한 세인의 연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요절해야 하는가 보다. 영면한 지 벌써 4반세기 가까운 24년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아직 그리워하며 떠나보내질 못한다. 잊을 만하면 그녀와 관련된 뭔가를 끄집어내어 기억나게 하니 말이다. 지난 연말에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공전 최고 특종이었던 다이애나 인터뷰(1995년 11월)가 마틴 바시르라는 BBC 기자의 위조서류 등 기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금까지 소란스럽다.

거기다가 올해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아 있는 다이애나가 만 60세가 되는 해이다. 그래서 그녀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그녀가 떠날 때 15살과 13살이던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합동으로 준비한 동상이 세상에 선을 보인다. 동상은 다이애나가 신혼 생활부터 숨질 때까지 살던 켄싱턴궁 정원에 세워지고 두 아들에 의해 제막된다.

이제 정말 다이애나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얘기했듯이 왕실의 공주가 아니라 ‘국민 공주(The People’s Princess)’가 되어 버렸다. 왜 영국인은 다이애나를 아직도 떠나 보내지 못하는지 그 심정을 한번 살펴보자. 다이애나의 육성이 담긴 문제의 BBC 인터뷰로 이 의문에 대한 출발점을 삼고자 한다.

BBC의 다이애나 인터뷰는 세기의 특종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만 전체 인구의 39.3%인 2300만명이 시청했다. 성인 인구로만 보면 영국인 중 인터뷰를 안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그때까지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모두가 그녀를 동정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아직도 다이애나를 잊지 못한다

다이애나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BBC 인터뷰 전에도 1992년 발간된 다이애나 전기와 1994년 민간 방송 ITV가 찰스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을 육성으로 듣는 영국인들의 심정은 특별했다. 자신의 딸, 자신의 언니, 자신의 누나, 자신의 동생이 겪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듣는 심정이었다.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찰스와 약혼(1981년 2월)한 다음 주부터 우울증에 걸렸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헤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찰스의 무관심과 카밀라(찰스의 현 부인) 문제, 그리고 왕실의 냉대와 그로 인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BBC 인터뷰 대담자인 마틴 바시르 기자가 왕실 가족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다이애나는 “그 집안에는 대대로 우울증 걸린 사람이 없어 이해를 못 했고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어요. 그 집안 사람들은 타인이 보는 앞에서 운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해요”라고 했다. “그런 내게 왕족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다이애나(Diana Unstable)’ ‘정신적으로 불균형인 다이애나(Diana Mentally Unbalanced)’라는 딱지를 붙였다”고도 했다. 바시르가 자해(自害)에 대해 묻자 “팔다리에 칼로 상처를 냈다. 왕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못 견디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서였다”는 솔직한 고백도 했다. 심지어 윌리엄 왕세손을 뱃속에 가진 상태에서 계단에서 굴러 자살하려 했다고까지 말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폭식증(暴食症)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폭식증이 약혼식 바로 다음 주부터 우울증과 같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폭식을 ‘냉장고 안으로 뛰어들었다(Jump into fridge)’고 표현했다. 폭식증이 있을 때는 자신을 증오하고 수치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자 왕실 사람들은 ‘옳다구나’ 하면서 폭식증을 그녀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돌렸다. 이런 상황을 다이애나는 “폭식증이 모든 문제의 이유(Bulimia as a coat on a hanger)로 취급됐다”라고 표현했다.

다이애나는 위 속에 쓸어넣은 음식을 토한 다음 또 음식을 퍼먹고 토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했다. “허리 사이즈가 약혼하던 2월에는 29인치였는데 (결혼하던) 7월에는 23.5인치였다. 불과 5개월 사이에 정말 빼빼 말라 버렸다”면서 고통을 남의 말 하듯 가볍게 얘기했다.

이런 고통 속에 있었지만 무관심한 약혼자 찰스는 13살 연하의 20살짜리 신부를 데려다 놓고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약혼을 하고 세상에 정식 공표를 기다리는 2주 동안 전화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약혼을 하고 결혼 준비를 하는 사이 언니에게 “나 이 결혼 못 해. 정말 불가능해”라고 호소했지만 언니마저도 “기념품 티타월(tea towel)에 이미 너희 사진이 다 인쇄되어 팔리고 있어. 너무 늦었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결혼의 끝을 뻔히 보면서도 상황에 밀려 도살장으로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다이애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 표정을 하면서 불행으로 말려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착한 소녀?

사실 다이애나는 두 개의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보통 생각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착한 소녀 같은 이미지가 그중 하나다.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불행이 우리 둘이 너무 달라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같은 점도 참 많아요. 예를 들면 시골 생활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아이 좋아하고, 암환자와 호스피스 사람들 보살피는 것 좋아하고…”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들어보면 ‘이 여인은 정말 순진하거나 바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도 남편인 찰스를 정말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 사람들은 능구렁이 같은 찰스와 13살 어린 다이애나와는 정신연령이나 지적 수준이 한참 떨어져서 맞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순진한 다이애나는 그런 말뜻을 진심으로 못 알아챈 것이다. 자신과 찰스가 닮은 점이 많은데 왜 우리를 다르다고 하느냐고 말하는 걸 보면 다이애나는 정말 어린애 같다.

더군다나 다이애나는 단순한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소위 말하는 ‘가방끈의 길이’ 같은 것 말이다. 사람들은 2년의 시도 끝에도 영국 고등졸업학력고사(O Level) 10과목 중 한 과목도 통과 못 하고 대입학력고사(A Level)는 아예 시도할 엄두도 못 낸 다이애나를 아예 저능아 취급했다. 다이애나 역시 “그이는 나를 아예 10살 아이로 취급했어요”라면서 “내 일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내 입으로 ‘나는 멍청했다’라고 말한 일”이라고 했다. 자신은 멍청하지 않은데 그렇게 얘기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들어버린 일을 뒤늦게 후회한다는 말이다.

다이애나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의 원천은 무지와 순진이 한 얼굴에 공존하는 백치미였다. 너무나 약해 보여서 누구에게나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여인은 드물다는 통념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이애나를 외모만으로 쉽게 판단했다. 외모는 아름다운데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데다 학력까지 안 좋으니 당연히 머리가 나쁠 것이라고 여겨버렸다. 그래서인지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대하면 누구도 경계를 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 다이애나 자신도 사람을 편하게 대해주는 친화력이 있어서 누구나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느 영국 왕족이나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래서인지 왕족과 귀족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자신들 부류와 다른 다이애나를 쉽게 대하고 무시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남편 찰스가 가장 심했다. 심지어 결혼하기 이틀 전에 카밀라에게 선물하려고 맞춰놓은 팔찌를 찾아왔고 다이애나가 보는 앞에서 그날 저녁 전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이애나의 두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왼쪽)과 해리 왕자.  이들은 다이애나 60세 생일인 오는 7월 1일 켄싱턴궁에서  다이애나 동상 제막식을 연다. ⓒphoto 뉴시스
다이애나의 두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왼쪽)과 해리 왕자. 이들은 다이애나 60세 생일인 오는 7월 1일 켄싱턴궁에서 다이애나 동상 제막식을 연다. ⓒphoto 뉴시스

연약함 뒤에는 전략가의 내공이

이제 우리가 모르는 다이애나의 다른 면을 볼 차례이다. 다이애나는 연약하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대단한 전략가라고 해도 될 만큼 내공이 대단한 여자였다. 믿을 만한 측근 하나 없이 연약한 여인이 2000년 이상 이어져온 영국 왕실과 벌인 전면전은 한 편의 잘 짜인 전투 작전 같다. 우선 다이애나는 전면전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전초전부터 벌였다. 찰스나 왕실이 자신을 밟으면 그냥 밟히고 마는 바보로 취급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부터 던졌다. 바로 별거(1992년 12월) 7개월 전 발간된 앤드루 모튼의 다이애나 전기가 전초전이었다. 전기는 모튼이 대리인(다이애나 어릴 때 친구인 외과의사)이 해온 인터뷰 녹음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다.

둘째 해리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시작된 찰스와 카밀라와의 관계는 8년을 참고 견뎠지만 어떤 것보다 힘든 고통이었다. 다이애나는 결혼 후 10년 이상 받아온 그런 고통을 모두 세상에 까발렸다. 전기 한 편으로 찰스를 비롯해 영국 왕실은 된통 한 방을 맞았다. 그전까지 궁궐 직원들이나 언론에 의해 간혹 전해지던 각종 소문이 사실임을 책 한 권으로 세상에 알리는 대단한 거사를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해치웠다. 이렇게 해서 당하기만 하던 상황을 뒤집어 자신이 공세를 잡아버렸고 찰스와 왕실은 허겁지겁 수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다. 다이애나가 전기를 낸 이유도 대단했다.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털어놓은 카타르시스도 그중 하나지만 다른 이유를 작가 모튼은 이렇게 설명한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먼저 나오길 바란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혼 실패 책임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유가 아니었나?” 모튼은 데일리메일 칼럼에서 ‘돌아보면 다이애나의 배짱은 기가 막혔다(Diana’s audacity was breathtaking)’라고 썼는데 영어 단어 ‘audacity’에는 뻔뻔함이라는 뜻도 있다. 다이애나는 그 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모튼은 말했다. 심지어 그녀의 친구이자 영화제작자는 이런 증언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이 계획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 뭔지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불러올 계산된 위험을 받아들였다. 비록 죽을 정도로 겁을 내긴 했지만. 나는 분명히 말하는데 그녀로부터 후회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전기는 부부가 별거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기가 나오고 7개월 뒤 결국 둘은 별거에 들어갔다.

그다음 전면전 선포가 별거 3년 뒤에 나온 BBC와의 인터뷰였다.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전기 때보다 더 솔직하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다이애나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지옥 같은 고통의 이야기는 책으로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이애나는 깊은 동정심과 함께 애정을 받아 ‘영국인’이라는 우군을 확실하게 확보했다.

사실 BBC 인터뷰를 보면 다이애나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바보나 저능아가 아니다. 차라리 대단히 지적이다. 대답이 곤란한 질문에는 물의를 피하는 방법으로 돌려 말하면서도 시청자들이 행간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한다. 예를 들면 ‘찰스가 다음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와 ‘왕이 되면 잘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예’와 ‘아니오’를 쓰지 않으면서도 부정적인 뜻을 교묘하게 전달했다. 대화 중 쓰는 단어나 어구 등으로 미루어보면 비록 교육수준은 낮을지 몰라도 타고난 현명함과 판단력은 누구 못지않았다. 예를 들어 너무나 유명해진 이런 말에서 알 수 있다. “우리 결혼 안에는 3명이 있지요. 그래서 조금 붐벼요(There were three of us in this marriage, so it was a bit crowded).” 이 표현은 너무 영국적이어서 거의 셰익스피어 수준이라고까지 칭찬하는 영국인도 있다.

영국 울린 잔혹 동화

영국인들을 울려 자기 편으로 만든 다이애나의 고백은 너무나 생생하다. 심지어 다이애나는 전기 초안을 읽다가 자신의 스토리에 너무 슬퍼서 울었다고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궁궐 안에서 소외 당했느냐’고 바시르가 묻자 “아주 많이요(Very much so)”라고 답하는 장면에 가슴이 뭉클했다는 영국인들이 많다.

다이애나는 별거가 결정되고 나서 “엄청나게 깊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도 했다. ‘별거는 누구 아이디어였나’라는 질문에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느냐는 투로 “물론 그이가 먼저 했고 나는 동의를 했어요”라고 했다. ‘당신은 별거를 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니오. 전혀 아니었어요(No. Not at all)”라고 두 번이나 부정을 했다. 그리고는 “아주 많이 슬펐어요. 정말 슬펐어요(It was very very sad. Really sad)”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혼가정 출신이에요. 그런 불행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 안에는 ‘내 사랑하는 두 자식에게 내가 겪은 불행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엄마로서의 깊은 사랑이 내포되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온갖 불행을 다 겪고 있지만 자식에게만은 불행을 주고 싶지 않아 갖은 희생을 하더라도 견디려고 했고 별거나 이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실제 다이애나는 왕실과 찰스로부터 받은 무시와 모멸을 견디면서 별거 후 4년을 더 버텼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면전인 BBC 인터뷰를 하고 만 1년도 안 되어 이혼을 하고 만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별거 후에도 켄싱턴궁 안에서 지역을 달리해서 살았는데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궁에서 살았다. 무엇보다 아들 둘과 같이 살려는 이유였다. 왕실도 왕자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왕실이 두 왕자를 다이애나로부터 뺏으려 했다면 전대미문의 왕조 간 친권소송이 벌어질 판이라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물론 다이애나가 소송을 벌여도 여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여왕은 법적으로 영국 내 모든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왕의 친손자 문제라면 다이애나가 승소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결혼 실패는 보통 한쪽만의 잘못은 아니다. 양쪽의 책임이 어느 정도 같이 있기에 발생한다. 그러나 다이애나와 찰스의 결혼 실패에서 영국인들은 다이애나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지만 다이애나가 끝까지 찰스를 사랑했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거기에 대한 방증은 상당히 많다. 다이애나의 절친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찰스를 사랑했다고 증언한다. 특히 찰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혼 전에 여러 남자들과 맞바람도 피웠다고 한다. 특히 이혼 후에는 무슬림 교인들과 깊은 교제를 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 되는 왕의 생모가 무슬림의 부인이 될 판이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다른 방증은 그의 전기와 인터뷰에서 보듯이 엄청난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한 별거가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는 점이다. 다이애나는 더더욱 이혼은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받으면 지긋지긋해서라도 별거나 이혼을 원할 만도 한데 자식을 위해 완전한 실패는 피하려고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펼쳤다. 절친들 말처럼 20살까지 남자친구 하나 없었던 다이애나의 찰스를 향한 순애보일 수도 있다.

세상은 다이애나를 신데렐라로 부러워했고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끝은 잔혹한 동화였다. 이렇게 해서 영국인들은 모두 다이애나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들이 밀어서 시집 보낸 누이나 동생 혹은 딸이 불행을 맞은 듯 여긴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죄 같아서 언제나 짠해지고 동정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왜 그녀의 불행을 모르면서 부러워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면서 아직도 보내주지 않고 있다.

키워드

#런던 통신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